(연재) 곽상주의 천태산 편지

 

 

 

어느덧 농번기의 마무리 단계라서 마음이 한가로워져 오토바이를 타고 논배미를 둘러보었다. 한배미 두어배미 가벼은 미소와 함께 눈도장을 찍고 다른 논배미로 넘어간다.

그런데 직파한 논배미에 물이 벙벙하여 두눈이 휘둥그레지고 아연실색했다.  급히 이곳 저곳을 살피는데 용수로의 물이 평소와는 달리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물이 필요한 때가 아니고 그저 보충만 해주면 되는 시기다. 직파한 논은 말려야 하는데 밤 사이 누군가 수문을 크게 열어 온 논이 물에 잠겨버린 것이다. 직파벼가 콩나물처럼 길쭉하게 고개만 내밀고 있어서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위 아래를 살펴봐도 누구 소행인지 짐작만 갔지 심증 따로 물증 따로. 섣불리 단정하지 못한 채 들판을둘러보니 짐작은 잡혔다.

사정을 알리려 농업 기반공사에 들러 소식을 전하고 담당 직우너과 동행하여 수문을 살펴보니 누군가 수문을 일부러 쳐부수어 수문 관리가 안된 결과였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리 화가 나고 성질머리 급했어도 이렇게 일부러 수문의 볼트까지 풀어 부속을 없애버리고 부숴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논배미 사정이 급하다고 수문 부수고 남의 논에 물 들어가 물난리 나도록 만드는 심보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은 물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단지 보충만 하면 되는 것을... 몇십분 먼저 자기 논에 물 대겠다고 이런 몹쓸 짓을 해대고 있으니 같은 농투사니로서 하늘이 두렵지 않은 지 두고 두고 살펴볼 일이다.

겨우 부서진 수문을 조절하고 나니 물은 예전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쓰린 내마음과 악행을 불사했던 그 어떤이의 사연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흙 묻은 손을 씻어준다. 머리끝까지 올라왔 울화 덩어리가 어느새 씻겨가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렇게 마음 다스리고 살고 지고싶다. <곽상주 님은 현재 전북 정읍 인근에 위치한 천태산에서 생활하며 유기농을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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