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명은 기자의 서울 인근산 샅샅이 훑기-불암산 편

"야호…눈이다!!"
딸아이가 소리를 지른다.

"그래??"

폭설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겐 죄스러운 이야기지만 올 겨울 서울에서 그다지 많은 눈을 구경하지 못한 기자 역시 반갑긴 매 한가지. 물론 가끔 눈이 내리긴 했지만, 그것도 콜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이 밤손님처럼 몰래 왔다가 처연한 분신만 살짜기 뿌리고 가버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럼 산에 가야지…."
항상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산행에 동참했던 딸아이의 표정을 살피니 그래 이번엔 인심 한 번 쓰겠다는 듯 결연하기만 하다.

"컵라면이랑, 밥도 준비해가야지…."
"그럼 당근이지."
참고로 딸아이는 산에 가는 유일한 재미가 바로 먹는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스파게티보다 100배는 더 맛있다는 고추장 바른 밥도 그렇고, 보온병에 담아간 물을 부어 호호 거리며 먹는 컵라면 맛도 그만이란다.

그런데 어느 산으로 가지?? 한참을 궁리하다가 이내 내린 결론은 불암산. 불암산은 이미 여름에도 한 차례 독자님들께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여름산도 그렇지만 겨울산은 더욱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소나무가 많아 눈 내린 다음의 그 아름다운 설경이란….

휘경동 위생병원 앞에서 202번 버스를 탄다. 물론 가방 속엔 컵라면과 밥, 계란말이 등 반찬이 묵직하게 들어있다. 딸아이의 표정이 밝다. 차창 밖으로 잔설이 흩날린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버스는 중량교를 건너고 한일교회 앞에서 좌회전해서 태릉길로 접어든다. 화랑대를 지나면서부터는 풍경이 달라진다. 새하얗게 눈이 쌓인 나무들이 부쩍 눈에 띈다. 머얼리 산 정상에 하얀 눈을 군데군데 뒤집어 쓰고 있는 불암산이 보인다. 삼육대를 지나자 태릉갈비촌이다. 라면으로 간단한 아침을 떼워서인지 침이 꼴깍 넘어간다. 갈비촌이 끝나는 즈음에 버스 종점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불암동.

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건넌다. 주유소를 지나 약 50미터 가량 직진하다 보면 천막으로 둘러쳐진 포장마차가 나오고 바로 그 옆에 산으로 향하는 골목길이 나온다. 더 직진해서 불암동 시내 방향으로 해서 불암사나 천등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도 있지만 기자는 이 골목길을 통해 능선으로 오르는 길을 더 선호한다.


#처마에 고드름이 열렸어요.

골목 양 옆으로 배나무 밭이 펼쳐진다. 이곳의 명물 먹골배다. 태릉갈비촌이 유명한 것도 바로 이 먹골배 덕분이다. 고기를 잴 때 바로 옆 밭에서 나는 먹골배를 넉넉하게 갈아 넣는 것이다. 거무튀튀한 배나무에 하얀색 눈이 얼룩져 있다. 배밭의 원두막 처마에는 고드름이 열려 있다. 딸아이 탄성을 지른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길이 미끄러운가요??"
"예, 아이젠 해야 될 거에요!!"


#계곡 물 위에 쌓인 눈. 환상적이다.

항상 겨울엔 가방 속에 두쌍의 아이젠을 넣어서 다니는 게 습관이 돼있다. 처음 등산할 때 고생했던 경험 때문이다.
골목길도 미끄럽다. 차들이 많이 다닌 모양이다. 남아 미술관 옆 군부대 유격장을 빙 돌아서 등산로가 나 있다.
"아이젠 해야 하는 거 아냐?"

딸 아이 겨울 산행을 몇 번 해본 경험이 있다고 아는 체 한다.

"올라갈 때는 그냥 가는 게 나을 거야."

소나무 마다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참 멋지다. 딸 아이가 소나무를 발로 찰 때마다 밀가루 같은 눈이 흩날려 머리에 쌓인다. 아직 초등학생인 딸 아이에게 이런 추억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싶다.
"어때, 산에 오니까 좋지?? 눈도 많고…."


#등산로 입구의 사자상. 딸 아이가 깜짝 놀란다.

"근데 밥은 언제 먹을 거야??"
채 20여분도 안돼 밥타령이 시작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온 초콜릿으로 딸 아이의 입을 막는다. 우리 예쁜 딸 아이 먹을 것만 입에 물려주면(이런 표현은 아동학대에 들어가나?) 군말 없이 산 잘 오른다.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 미끄럽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전부 아이젠을 하고 있다. 딸 아이는 산을 오르다 힘들면 눈위에 발자국을 찍기도 하고 뭉쳐서 던지기도 하면서 숨을 돌린다.

"어디까지 갈거야? 헬기장 까지만 가자."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헬기장은 불암산의 제2봉 격이다. 버스 종점에서 성인 걸음으로 약 1시간 남짓 오르다보면 먼저 만나는 곳이 바로 헬기장이다. 그리고 그곳서 약 10여분을 더 걸으면 불암산 제1봉이 앞을 가로 막아선다.

"그래, 헬기장까지만…오늘 눈이 와서 특별히 봐준다."

올라갈수록 바람이 심하게 분다. 모자에 귀마개까지 쓴 딸아이의 얼굴이 빨개진다. 이럴 땐 밥을 먹는 장소를 찾는 것이 곤욕이다.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딸아이도 땀이 나는 모양이다. 모자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렇게 1시간 20여분을 오르니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헬기장이다. 등산객들이 많지 않다. 날씨 때문이리라.


#소나무 숲 위에 쌓인 눈.

"어? 그런데 왜 아이스께끼 장사는 없지??"
헬기장에 항상 나와 있는 아이스 바 파는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500원 하는 아이스 바를 1000원에 판다.
"야, 이 추운데 아이스께끼 장사가 나오겠냐?? 빨리 밥 먹을 곳이나 찾자."
바람이 들지 않는 곳을 찾아 헤매길 10여분, 간신히 그럴싸한 자리를 골랐다. 자리를 깔고 보온병과 보온 도시락을 꺼내고 컵 라면에 물을 따른다. 딸 아이의 입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김치 볶음을 올려 먹는다. 물론 준비된 고추장도 젓가락으로 찍어서 밥에 무친다.

따뜻한 물을 따라 한 모금씩 마시는데도 온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이럴 땐 딱 체하기 십상. 조심해야 한다. 특히 어린이들은….

컵 라면을 열어보니 알맞게 익은 것 같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딸아이 "캬아∼"소리가 절로 난다. 밥 위에 라면을 얹어 먹는다. 완전 짬뽕밥인 셈이다. 그래도 맛만 좋다.

옆 자리에 있던 남자 등산객 두 명이 마시던 소주잔을 건넨다.
"이럴 땐 한 잔 하는 게 좋아요. 몸이 풀리거든요."

이미 경험이 `많이` 있던 터다. 얼른 받아 마신다. 한 잔을 더 받는데 딸아이 눈을 흘긴다.


#헬기장에서 딸 아이다. 하도 추워 하길래 기자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줬다. 크흐흑 아버지 신세란...

아쉬운 성찬 타임이 끝난다. 짐을 정리하고 가방에서 아이젠을 꺼내 하나씩 발에 찬다. 내려오는 코스는 천등사 쪽으로 잡았다. 올라간 코스보다는 경사가 급하지만 아이젠이 있으니 큰 걱정은 없다. 약 15분여 내려오다 보면 천등사와 만난다. 그곳 입구에 약수터가 있다. 얼음이 살살 떠있는 약수로 목을 축인다. 그곳서부터는 평평한 하산길이다. 딸아이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온다. 딱 두잔 마신 소주 때문인지 얼었던 몸도 녹는 느낌이다. 기분 최고다.
"공주니임, 우리 불암동에서 막걸리 한 사발 하고 갈까?"
"……그래, 안주는 두부로 시키는 거다??"
"얏호...당근이쥐. 우리 공주니임 최고!!"
정명은 기자 sljung99@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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