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명은 기자의 서울인근산 샅샅이 훑기-봄과 겨울의 양극화 북한산

이른 아침 사무실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데 봄 방학 중인 딸아이도 같이 덩달아 바쁘다. 오늘은 아빠와 딸이 같이 출근한다. 그리고 퇴근 뒤에는 또 같이 산에 오르기로 했다. 토요일. 평소 같으면 투덜투덜 대며 `나에게도 주말에 친구들과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사자후를 떠뜨릴 딸아이가 이날 따라 고분고분 따라 나선 배후에는 최근 1.5kg이 불은 몸무게가 자리하고 있다. 누가 여자 아니랄까봐, 평소에도 하루에 두세번씩은 저울에 오르락 내리락 몸매관리에 신경을 쓰는 딸아이. 그런데 며칠 전 딸아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물었더니 글쎄, 2kg도 아니고 1.5kg이 늘었다나 어쨌다나. 산에 자주 다니면 저절로 살이 빠진다고 기대도 안하고 한마디 툭 던졌는데, 글쎄 "좋아, 나도 일요일마다 산에 다닐 거야"란 답이 돌아오는 거였다. 그래도 설마설마 했는데, 산에 같이 가기로 한 토요일 아침, 먼저 일어나 설쳐댄다. 의지 강한 우리의 딸아이.


#북한산 매표소 인근에서 본 정상봉들. 왼쪽이 원효봉, 가운데가 만경대, 오른쪽이 노적봉이다.

그래서 집을 나섰다. 회사 출근길에 등산 배낭을 메고, 등산화에 등산복까지 차려 입고…. 자, 지금부터 시작이다. 회사까지 걸어가는 거야. 어라? 그런데 또 고분고분이다. 그래서 한시간을 걸었다. 참 좋은 날씨. 딸아 이제 봄이 오려나보지?? 응, 그런 것 같애!!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난 시간이 오후 1시. 이미 슈퍼마켓에 들러 500원짜리 초콜릿 두개와 2500원짜리 미니족발을 산 터였다. 이는 딸아이와 수십차례 동행 등반길에서 처절하게도 느낀 경험 때문. 군것질 거리가 없으면 그날 산행은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다 못해 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은 날은 출발 때부터 딸아이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아~힘들어` 소리. 그 뿐 아니다. 평소에도 달변인 딸아이의 입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꿍얼거림들. 다시 말해 족발과 초콜릿은 순전히 입막음용이다.

오늘의 산행 출발지는 북한산성 매표소. 사무실에서 전철을 타고 구파발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다소 번거롭고 먼 일정이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날씨도 좋잖은가. 딸아이와 소풍을 간다고 생각하면 그만일 터…. 거기다 딸아이도 별로 불만이 없다. 구파발에서 부곡리행 버스에 오른다. 1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버스 안엔 등산복 차림의 산행객들이 많다. 뉴타운 개발로 난리통이 아닌 건설현장 일대를 지나자 웅장한 규모의 북한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저게 북한산이야. 응 그래??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딸아이의 한마디. 족발은 언제 먹을 거야?? 웅?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빨리 올라갔으면 좋겠다. 히히히 약발 받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10여분 뒤 북한산성 매표소 입구를 알리는 버스 안내 방송. 많은 등산객들이 내린다. 입구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물 두병을 구입한다. 매표소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는데 딸아이 묻는다. 오늘 어디로 가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북한산 주봉들이 눈에 들어온다. 백운대는 가려져 보이지 않고, 노적봉과 만경대, 그리고 용암봉 등이다. 저기로…. 오호…그래?? 사실 계획은 아니었다. 그쪽으로 오르는 코스는 아무래도 급경사다 보니 힘이 들기 때문이다. 아직 채 녹지 않았을 얼음도 문제고…. 원래 계획은 매표소-계곡 탐방로-북한동-중성문-중흥사지선정비-대남문-대동문-우이동 코스였다. 거리상으론 다소 멀지만 실제로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론 힘도 덜 들고….

하지만 매표소 입구에 세워진 등산로 안내도를 보고 원래 코스를 설명해주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딸아이가 위문으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를 고집하고 나선 것이다. 얼음이 얼어 있어서 위험하다, 경사가 무지 급하다, 엄청 힘들 것이다, 아주 위험한 암벽도 타야 한다 등등 벼라별 엄포와 위협을 늘어놓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 한마디.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

사실 딸아이는 밋밋한 등산로보다는 경사가 급하고 다소 위험한 코스를 좋아한다. 지루하게 늘어서 있는 계단 보다 로프 하나에 의지해 올라가야 하는 아슬아슬한 절벽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이전에도 딸아이는 그런 코스만 나오면 먼저 선뜻 나서 앞장을 서곤 했다. 그게 힘이 덜 든데나 어쨌다나.

매표소에 가져간 신문을 주고 차들이 다니는 시멘트 도로에서 나와 마악 계곡 탐방로로 접어든 시간이 정확히 오후 2시. 그때 부부로 보이는 한 등산객 커플이 다가와 길을 묻는다. 영취봉을 거쳐 백운대로 바로 가는 코스를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안내를 해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거긴 지금은 위험할 텐데요. 출입통제기간이기도 할 거구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걸요?? 그래도 겨울철엔 위험할 텐데…. 아니에요, 눈도 다 녹고 그랬는데요 뭘!!


#계곡 탐방로.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현장이다.

이럴 땐 더 이상 간섭은 노!! 스스로들 알아서 할 일이지. 다만 기자의 충고를 가급적 듣는게 나을 텐데 하는 마음 뿐…. 딸아이에게 얘기한다. 아직 눈도 얼음도 덜 녹아서 위험할 텐데….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오늘 그 말 잘도 써 먹는다.

계곡엔 얼음이 꽤 녹아 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뜨인다. 물론 장소는 다르지만 1주일 전(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구천폭포-대동문-우이동 코스)만 해도 계곡에 흐르는 물 구경하기가 힘들었는데….


#얼음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물. 봄을 재촉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걸음을 재촉하길 30여분. 다시 시멘트 도로와 만나는 끝 자락에 북한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북한동은 산 중턱에 음식점들이 운집해 있어 사시사철 음식점들에서 내뿜는 연기가 자욱하다.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길거리에까지 식탁을 벌인 채 고기를 굽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배가 고파온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갈래길이 나온다. 우회전하면 중성문을 거쳐 보국문-대동문-대성문-대남문 등지로 갈 수 있고 좌회전하면 보리사-대동사-약수암을 거쳐 위문에 오르는 코스다. 위문까지 거리는 1.3km. 경사가 급하다보니 아무래도 거리는 짧다. 딸아이에게 다시 묻는다. 진짜 이쪽으로 갈거야?? 응. 빨리 가자. 가서 족발 먹어야지. 단호한 딸아이의 태도에 웃음이 나올 정도다.


#북한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 북한동. 주로 음식점들인데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왼쪽으로 원효봉이 자리하고 있다. 등산로는 눈이 다 녹은 상태다. 얼음도 없다. 완연한 봄 기운이 곳곳에 감돈다. 계곡에도 군데군데 두텁게 언 얼음들의 잔해만 남아 있을 뿐, 봄을 부르는 물은 끊임없이 그 겨울의 마지막 잔해를 희롱하듯 흘러내린다.

걸음이 느려진다. 좋은 날씨 탓이다. 이곳 저곳 사진도 찍고 초콜릿도 하나씩 나눠먹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원효봉 가는 갈래길이 나온다. 계곡 탐방로에서 길을 물었던 부부가 떠오른다. 영취봉을 통해 백운대로 바로 오르려면 이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안내도에 출입 통제 구간이라고 명확히 표시돼 있다. 그냥 우리가 가는 위문 쪽으로 향했길 간절히 빌 수밖에…. 약 1시간 20여분(매표소에서)을 오르니 대동사가 나온다. 조그마한 사찰이지만 왠지 깊은 맛이 느껴지는 고찰이다. 대동사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다가 반가운 이들을 만났다. 아까의 그 부부다. 바위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행이다…. 아빠 말을 들었나봐. 딸아이 한 마디 한다.


#대동사.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글귀가 시선을 붙잡는다.


#위문에서 약 10여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약수암. 스님들의 기도수련장으로 쓰인다.


바로 우측으로 노적봉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봤을 때와 모습이 많이 다르다. 조금만 더 올라가서 족발을 먹자, 하는 소리에 딸아이 입에서 탄성이 나온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길 15분여. 왼쪽으로 영취봉이 지나고 마침내 백운대가 얼핏 모습을 비춰주는 곳에 배낭을 푼다. 이제 5분여만 오르면 위문이다. 자, 족발 먹자. 흘린 땀 때문인지, 앉아서 성찬을 즐기는데 몸이 떨려온다. 하지만 딸아이 아랑곳 않고 열심히 먹는다. 춥지 않아? 괜찮아. 맛있어?? 끝내줘. 순식간에 족발은 동이 난다. 딸아이가 뼈를 챙긴다. 집에 있는 강아지 갖다 주겠단다. 다시 출바알.


#딸아이. 족발을 뜯고 있는데 추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런데 안춥단다.

금새 위문이 나타난다. 왼쪽으론 웅장한 크기의 백운대가 하늘을 덮고 있다. 시간을 보니 4시20분. 매표소에서 총 2시간20분이 걸린 셈이다.


#백운대 바로 아래 위치한 위문이다.


#마치 백년빙처럼 얼어붙은 하산길. 북한산의 양극화다.

위문을 벗어나서 도선사 쪽으로 하산을 하려는데 오잉, 세상에 이럴 수가!! 이 쪽은 딴 세상이다. 마치 백년빙(百年氷)처럼 등산로를 완강하게도 뒤덮은 얼음들. 다행이다. 그래도 가방에 아이젠 두 켤레를 챙겨온 게…. 꺼내서 등산화에 착용한다. 그래도 미끄럽긴 매한가지. 조심조심 20여분을 내려오자 백운산장이 나타난다. 평소 같으면 5분이면 내려올 거리. 산장 지붕 너머로 인수봉이 덮칠 듯 자리하고 있다. 딸아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온다. 다시 백년빙을 아슬아슬 내려오기를 30여분. 산악구조대 건물이 나오고 나서야 등산로에 얼음이 사라진다. 아빠, 내려가면 아이스크림 사줄 거지?? 그래, 우리 딸이 아빠에게 막걸리를 사준다면…. 까짓 거 슈퍼마켓에서 과자에다 막걸리 한 통쯤이야….


#구조대 인근에서 본 인수봉.

우리는 도선사 앞 광장 슈퍼마켓에서 막걸리 한 통과 오뎅 몇 꼬치,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돈은 모두 기자가 내야 했다.  지갑을 안가져왔다나, 어쨌다나. 30분을 더 걸어내려와 버스 타는 곳까지 총 4시간 30분 소요.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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