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명은 기자의 북한산 샅샅이 훑기-정릉→보국문→백련사편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단음절의 말 `봄`입니다. 봄을 떠올려도 설렐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봅니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고 설레는 건 설레는 거니 어쩌겠습니까. 차마 억누르지 못하고 들고 일어났습니다. 지난 4일 토요일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독자님들께 매주 들려드리고 있는 산행 이야기도 취재해야 하고…. 그래서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기로 했습니다. 하나는 봄이 오는 현장을 잡아내는 것이구요, 또 다른 하나는 물론 연재 중인 `북한산 샅샅이 훑기`입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위의 두가지 건은 하나로 묶어 가기로 했습니다. 대신 다른 기획을 하나 했습니다. 봄이 오는 현장을 잡기 위해 걸었던 2시간 여 동안, 서울 시내 곳곳의 암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두 시간 동안 걸었던, 혹은 누볐던 곳은 바로 사무실이 위치한 종로 숭인동에서 정릉 청수장, 그러니까 북한산 바로 아래까지입니다. 서울 시내에서도 오래된 고택들이 많이 남아 있던 곳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걷는 두 시간여 동안 참 많은 생각이 떠오르게 하더군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양극화의 모습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해소한다고 했던 그 바로 양극화. 어쩌면 개발 논리를 앞세운 양극화 해소 현장이 될 수도 있겠군요. 전언했듯이 여기선 북한산에 봄이 오는 현장만을 들려드리기로 하고, 양극화 해소인지 심화인지 하는 그 현장 모습은 다른 기획 기사에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른합니다. 일주일 동안 쌓인 피곤 때문인지, 복잡한 서울 도심속 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한가한 토요일 낮 따스하게 내리쪼이는 봄 햇볕 때문인지 자꾸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옵니다. 그래서 털고 일어났습니다. 어차피 산에도 가야 하구요.


#정릉 계곡입니다. 봄 기운이 완연히 느껴지죠.

그래서 걸었습니다. 신설동 로터리에서 성신여대-돈암동 젊은이들의 거리-아리랑 고개-정릉 순이었습니다. 사실 이번 주에도 어디를 소개해드릴까,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그러다가 봄을 떠올렸지요. 정확히 얘기하자면 떠올린게 아니고 떠오른 겁니다. 순전히 너무도 따스한 햇볕과 날씨 때문이었지요. 두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더군요. 사무실에서 정릉 청수장 매표소까지 가는데…. 그래도 기분 좋았습니다. 차들이 내뿜는 매연 때문에 목이 컬컬 하긴 했지만요. 청수장 입구 허름한 중국집에서 간자장면 한그릇을 시켜 먹을 생각을 한 것도 순전히 요놈의 날씨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도착한 매표소. 정확히 오후 2시더군요. 거기까지 가면서 마주친 등산객들의 옷차림이 지난주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지더군요. `봄이 왔네, 봄이 와`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집니다.

정릉에서 보국문→대동문→진달래능선→백련사→수유리 4.19탑으로 코스를 정했습니다. 경험에 비춰보았을 때 북한산 중에서 가장 봄을 만끽할 수 코스가 되리란 생각에서였죠. 역시나, 였습니다. 정릉 매표소 입구에서부터 봄은 느껴지더군요.

둘 셋씩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한가로운 모습에서부터 봄은 이미 와 있었습니다.
매표소에 신문을 주고, 정릉 계곡 탐방로로 들어섰습니다. 탐방로 입구에 `맷돼지를 만났을 때 안전하게 대처하는 법` 표지판이 있더군요. 그렇게 북한산을 많이 올라봤지만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시내 곳곳에 출현했던 멧돼지떼들 때문인가 봅니다. 아직 기자도 멧돼지를 직접 만난 일은 없는데 북한산에 진짜 멧돼지가 있긴 있나 보군요.


#힘찬 폭포수도 봄의 생동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산객들 중에는 반팔 차림도 보입니다.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가벼운 차림인데, 기자만 유독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고 있는게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지요. 계곡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일주일 전과 또 달랐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냥 봄이 흐르는 소리라고 해두지요. 힘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맑았지요. 세상 만물을 깨우는 영혼의 소리로 들렸다면 과한 것일까요??

5분여 걸으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힙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만끽하기 위해서지요. 진달래가 곧 피어나려나 봅니다. 한껏 물을 머금은 꽃봉오리가 금새라도 시뻘건 자태를 터뜨려 낼 것 같더군요. 응달쪽의 마지막 남은 잔설들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입니다. 그 또한 그들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셈이고 이제 스러져도 아쉽지 않겠지만요. 바람조차 불지 않습니다. 이미 복잡한 도심에서 두 시간 이상을 걸어온지라 피곤할 법도 하건만 두 다리는 이날만큼은 건각(健脚)입니다. 지칠 줄 모릅니다. 등으로 땀줄기가 흘러내립니다. 계곡 곳곳에 자리한 폭포에선 겨울 내내 얼어붙었던 물줄기가 힘차게 힘차게 떨어져 내립니다.

#정릉 2교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으론 칼바위 능선이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고 왼편으론 형제봉과 보현봉이 정겹게 다가옵니다.
보국문까지 이르는 길, 마지막 20여분은 아주 가파릅니다. 매주 등산을 다니는 사람들도 숨이 차다고 하소연할 정도지요. 쉬엄쉬엄 천천히 오르는게 상책입니다. 땀은 계속해서 흐릅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겨울 산행에선 기대하기 힘든 것이지요.


#고래 바위, 기자가 붙인 이름입니다. 머리 위에 소나무를 이고 있어요.

매표소에서 1시간 10여분만에 보국문에 다다랐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서 둘 셋씩 모여 앉아 준비해 온 도시락을 까먹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보국문입니다.

문을 통과해 산성탐방로에 들어설려는 찰나, 어디선가 짤그락 짤그락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발원지를 찾으니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입니다. 대남문쪽에서 오는 사람들인데 아이젠을 차고 있습니다. 이 좋은 날씨에…혀를 끌끌 차다가 이내 기자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능선의 산성탐방로는 아직도 한겨울입니다. 다행히도 양지 바른 곳은 얼었던 눈이 조금은 녹았는데, 음지 쪽은 두껍게 얼어 붙은 눈들이 빙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양극화가 진행중인 북한산의 모습입니다. 경험상, 매번 잊어버리는 경험이지만 북한산은 4월 중순까지도 얼은 눈이 녹지 않아 길이 미끄러운 곳이 많습니다. 일단 서쪽 능선 중에 비봉 우회길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모바위를 마악 문수봉쪽으로 향하는 지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청수동암문에서 대남문에 이르는 코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동문에서 우이동쪽으로 내려서는 코스도 그렇구요. 또 하나 위문에서 백운산장 쪽 내려가는 길도 늦은 봄까지 빙판이 녹지 않는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북한산성 담장에 뚫린 사각 구멍을 통해 본 도심입니다.


#대동문 광장. 사람들이 꽤 보입니다.

아이젠을 넣어 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발에 쥐가 나도록 힘을 줘가며 조심해야했지요.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대동문에 도착. 대동문 앞 광장엔 꽤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있더군요. 혹 진달래 능선에 기쁜 소식이 와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레임을 안고 하산길을 재촉했습니다. 아직 때가 이른가 봅니다. 꽃봉오리들은 잔뜩 물이 올라있는데, 조금 더 기다려야 하겠더군요.


#한껏 물을 머금은 진달래 꽃봉오리. 금방 터질 것 같죠??

 

대신 도망치는 하얀 여우를 만나는 횡재를 했습니다. 잔설이 만들어낸 것인데요, 어느 조그마한 바위 위에 하얀 털의 여우와 정말 닮은 모양을 만들어놓고 있더군요. 마치 봄이 오는 소리에 놀라 흠칫 뒤를 돌아보는 백여시 같은 모양을요. 멧돼지 대신 백여우를 만났으니 기분 따따봉입니다. 백련사 매표소에 이르니 2시간 30여분이 걸렸더군요. 천천히 걸었는데요. 다음주엔 더욱 완연한 봄소식 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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