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명은 기자의 서울인근산 샅샅이훑기-용마산-아차산편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아파하는 사람이나 어떤 일에서 쓴 잔을 마시고 상심한 사람들은 공동묘지 산책이 위안이 될 지도 모른다.

어떤 무덤에나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허름하고 세상에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역사는 있는 법이다.

하물며 역사의 기록에 자취를 뚜렷이 남긴 사람의 무덤에 있어서는 달리 말해 무엇 할까.
시름을 잊는 곳, 망우리(忘憂里). 그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건원릉 자리에 자신의 능 터를 정하고 돌아오다 이곳에서 “이제 시름을 잊겠다(於斯吾憂忘矣)”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건원릉에 모신 뒤 한시름 놓았다고 한 데서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망우리는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의 시름을 잊게 해 준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된 셈이다. 공동묘지가 죽은 자만을 위한 공간이기 보다는 그들을 기리는 산 자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공간이어야 함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망우산에서 내려다본 한강.

오늘 등산은 바로 서울 중랑구 망우1동 ‘망우리공원’(기자는 망우산이라고도 부른다)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은 한때는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렸던 곳이다. 이곳에는 만해 한용운, 어린이운동가인 소파 방정환, 화가 이중섭, 우두로 유명한 지석영, 동아일보 주필과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장덕수, 제헌국회의원이며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 등 유명 인사가 잠들어 있다.

주변 땅을 합치면 거의 60만 평에 달하는 녹지공간으로 요즘은 묘지 보다는 말 그대로 공원으로서 더 충실한 기능을 한다. 망우리공원은 서울의 숨은 보석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산책 코스는 최고로 꼽을 만하다. 한껏 우거진 숲과 운치 있는 산책로,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까지……. 망우리공원에는 산 중턱을 깎아내 만든 작은 순환도로가 나 있다. 입구의 관리사무소에서 시작해 공원을 한 바퀴 도는 4.8㎞의 산책 코스이다. 십리길인 셈인데, 묘지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어디든지 울창하게 나무가 우거지고 굽이굽이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한강줄기와의 숨바꼭질을 즐기는 곳. 이 길에는 ‘사색의 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봄에는 벚꽃이 활짝 피고 아름드리나무가 곧잘 눈에 띄는 잘 다듬어진 숲길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간혹 눈에 띄는 묘지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케 하는 까닭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동락천 약수터 등 약수터와 벤치, 정자 등의 시설도 잘 되어 있다.

1933년 하필이면 조선 왕조의 능들이 밀집한 동구릉 자락에 공동묘지를 잡은 일제의 행패가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백운산에서 발원한 한북정맥(漢北正脈)이 한강을 만나며 스러지는 언저리에 자리한 이 무덤들은 요즘 기준으로 하자면 참으로 명당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기자는 망우리공원 입구 순환산책로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었다. 30여분을 시멘트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운동하는 이들과 심심치 않게 만난다. 묘지가 공원화되면서 이 곳은 지역 주민들의 훌륭한 운동장으로 산책코스로, 등산로로 기능을 다하고 있다.

30여분 걸으면 동락천 약수터와 만난다. 인골을 사무쳐 나온 물로 갈증을 씻고 다시 도로를 따라 10여분 걸으면 팔각정 바로 좌측에 갈래길이 나온다. 좌회전. 용마산행 길이다.

산책로같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약 30여미터 진행하면 나타나는 갈래길에서 우측길로 접어들면 등산로가 묘지 사이 사이를 가로질러 나타나고 좌회전하면 묘지가 있는 능선을 우회하는 길이다. 우회길에는 몇몇개의 약수터도 있다.

15분여를 더 걷다보면 용마산 접경 지대에 이른다. 우측으로 용마폭포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이전엔 그곳에서 막걸리를 팔기도 했다.


#용마산 오르는 길에 내려다본 흰다리 마을. 작가 박완서씨가 이곳에 산다.

아직 이른 계절 벌써 1000원짜리 `아이스케키`를 파는 장수가 나와 있다. 직진. 이제 본격적인 용마산 등반이 시작되는 셈이다. 바로 급경사다. 얼마전까진 그저 바위들로 이뤄진 경사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야 했는데 지난해 정비공사를 하면서 나무계단이 만들어졌다. 왠지 편할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리에 밀려오는 피곤만 더 가중되고….

오르는 중간 왼편을 내려다보면 작가 박완서씨 등이 사는 흰다리마을(또는 한다리마을)이 산자락 언저리 계곡 사이에 보인다. 조용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마을이다. 군데군데 희끗희끗 한 게 꽃이 피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4월도 이제 코앞이다.

약 15분여를 헉헉 거리며 오르면 헬기장이 나온다. 처음 온 사람들은 이곳을 정상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상은 여기서도 20여분 더 가야 한다. 헬기장엔 싸온 도시락 등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개나리 꽃이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봄 기운을 만끽할만큼은 피어있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휴일이라서인가. 그러고보니 이 산은 올때마다 이렇게 사람들이 붐볐다. 낮은 산인데도 구경할 거리가 많고 등산하기에도 그럭저럭 괜찮아서일게다.


#용마산 능선의 돌탑.

10분여를 더 걸으면 두 번째 헬기장이 나온다. 바로 왼편으론 아차산 정상이 보인다. 앞은 용마산 정상. 정상까지 가려면 10여분을 더 걸어야 한다. 기자는 아차산을 가기 위해 좌회전한다. 내리막길이다. 이곳에도 등산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황사 때문인지 시야가 그리 밝지는 않다. 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세갈래 길이 나온다.


#헬기장에서 본 아차산 정상.

우회전하면 계곡을 따라 광장동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직진한다. 로프가 매어진 급경사를 10여분 오르면 아차산 정상이 나온다. 사실 정상은 정상인데 썩 그럴싸한 기분이 느껴지는 건 아니다. 이곳은 고구려 유적발굴지다. 다른 산의 정상들과는 달리 넓고 평평하다. 양쪽으로 발굴한 고구려 군사요새터가 있고 가운데로 길이 나있다. 곳곳에 유적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눈에 뜨인다.


#고구려 군사 요새로 쓰였다는 유적지.

이제부터는 거의 산책로 같은 길이 이어진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을 20여분 걷다보면 시야가 확트이는 지점과 만난다. 바로 앞으론 한강이 굽이쳐 흐르고 그 강 너머엔 강동구 명일동 일대의 아파트촌락이 이마를 찌푸리게 한다. 오늘의 최종목적지다. 바로 아래에 절이 있는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여기까지 총 2시간 10분여가 소요됐다.


#황사가 끼어 다소 뿌연 모습이지만 굽이쳐 흐르는 한강은 그래도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기에 충분하다.

거대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팔당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한강속으로 시선을 빠뜨린다. 답답했던 속이 휑하니 뚫리는 느낌이다. 날씨가 좋을 땐 이곳에 자리를 깔고 오수를 즐기는 등산객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시원한 강바람이 산들산들 얼굴을 간지럽힌다. 약간은 차지만 그럭저럭 봄내음을 싣고 있다. 도시락을 꺼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는다. 신선놀음이다. 바로 곁에 막걸리를 파는 상인이 있지만 참기로 한다. 황사만 아니면 기분 캡일텐데….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 그대로다. 물론 여기서 진행하던 방향대로 계속 진행하면 광장동 쪽으로 빠질 수 있다. 용마산 정상은 밟지 못했지만 그래도 3개의 산을 정복한 뿌듯한 산행이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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