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 섞인 돌담장과 어우러진 미로 같은 마을 골목길

길의 주인이 길이었던 기억이 이제는 아득하다. 더 이상은 길의 주인은 길 자체도 사람도 아니다. 현대 물질문명의 총아 자동차에게, 자동차가 점령한 도로에게 우월한 지위를 내주고 `길`은 숨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아니라면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습성이 어느덧 형성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길은 차가 다니는 도로로 변하고 도로의 끊임없는 확장-연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뿐이 아니다. 굽은 도로는 교통사고를 유발한다 하여 도로를 펴는 성형수술에 온 대한민국이 몰두하고 있는 실정이다.

2차선, 4차선, 8차선으로 확장돼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에 사람을 위한 여백은 없다. 사람들이 편안한 보행을 즐길 수 있는 장소는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만 남아있게 됐다. 그 길들은 구도심의 이면도로나 동네 골목길이다.

하지만 요즘 도시의 골목길도 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좁은 도로는 거의 없다. 자가용 시대에 차가 다니지 못한다면 쓸모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도시 골목길은 차가 다니고 차가 주차돼 있는 주차공간으로 변했다. 또한 소방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골목길의 폭도 넓어지고 있는 추세다. 소방도로가 뚫리면서 도시 골목길의 운치는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시골의 골목길인 고샅길도 마찬가지이다. 마을 안길도 어김없이 차 한대가 지나갈 폭은 된다. 다만 포장이 아스팔트인지, 시멘트인지의 차이점이 존재할 뿐. 그래도 시골의 고샅길은 차의 주차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폭이 좁은 탓에 차가 주차해 있으면 차가 다닐 수 없고 사람들의 보행도 불편하기에 그러하다.

전북 정읍시 고부에 가면 고부 들머리에 입석리가 있다. 고부의 상징 두승산 자락 바로 아래 자리한 입석리에는 한 마을 같은 두 마을이 있다. 처음 가 본 사람이라면 한 마을로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마을 어귀의 표지석을 보면 그곳에 예천, 입석 두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읍 시내에서 고부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두승산이 서있는데 두승산으로 들어가려면 거쳐가는 곳이 입석리의 두 마을이다.

입석리 마을이 인상적인 것은 미로처럼 이어진 고샅길이다. 예천, 입석 두 마을은 미로같은 골목길로 한마을처럼 연결돼 있다. 입석리 고샅길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도시골목길과는 달리 길게 쭉쭉 뻗어가다 다른 길과 만나 합쳐지거나 산길이나 큰 도로로 흘러가는 개방형 길이다.

황토와 돌이 자의적인 비율로 섞여 빚어진 돌담장이 입석리 골목길의 운치를 더해준다. 원래 입석리는 돌담 마을이었음을 곳곳에 서 있는 돌담장으로 알 수 있다. 돌 담장이 무너지면 시멘트 담장을 해서 막았거나 무너진 채로 그대로 놔둔 것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돌담들은 검은 기와를 이고 있어 과거 이 마을이 누렸을 풍요로운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

입석리 고샅길이 아름다운 이유는 길 옆에 도열한 돌담장 말고 하나 더 있다. 마을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길이 만들어내는 길고도 우아한 곡선이다.
자동차를 위한 거대도로의 냉정하고 기계적인 직선에 익숙해진 눈에 그 규칙성 없는 `구불구불함`은 새로운 세계의 미학으로 다가온다. 과거의 미학이 현대적 미학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입석리 고샅길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닌 미학적 의미를 부여받아 동시대성을 획득한다.

입석리는 두승산 자락이 평지와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 지라 마을 자체가 경사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하여 마을을 쏜살같이 내달리는 길들도 위에서 아래로 내뻗거나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다.

경사가 있는 길이라 길은 이차가 아닌 삼차 방정식으로 풀이되는 공간을 형성한다.
두 마을 합쳐 250여세대가 산다는 입석리 전체를 아우르는 끝도 모를 미로. 마을 전체를 감싸고 휘돌아 가는 길이 사거리, 삼거리  골목길의 꼭지점을 만나면 어김없이 길은 마을 안쪽으로 내달린다.

마을의 깊은 속살을 향해 질주하는 길은 거대하지만 날렵한 아마존의 아나콘다가 아니다. 장맛비로 얼떨결에 방죽가로 밀려 나온 실뱀처럼 가늘지만 굼뜨게 사라진다. 마을로 들어간 길은 오이며 가지며 깨가 정갈하게 심어진 채마밭을 만나 소멸되기도 하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봉숭아무리를 보고 놀라기도 한다. 담장 아래 깔린 채송화무리와 연애하다 다르게 달려왔던 길들과 조우한다. 두승산으로 들어간 길도 있고 마을 앞을 달리는 도로에 투항한 길도 있다.

입석리 고샅길이 아름다운 것은 마을안을 굽이치다 담장을 만나 꺾어질 때 형성하는 곡선미이다. 마을 고샅길의 곡선미가 유난히 입석리에서 아름다운 이유는 마을길에 차가 없다는 점이다. 차가 길의 곡선이 그려내는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다. 간혹 차가 다니는 경우는 있으나 길에 차가 주차돼 길을 점령하는 일은 없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도로 폭 때문에 모두 차를 자기 집안에 들어놓거나 마을 화관의 공터에 주차한다는 것이었다. 길은 차가 지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머무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하여 입석리 고샅길의 주인은 차가 아니라 길 자체였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사람들`이 주인이었다.

해가 설핏 기울고 두승산의 산자락이 길게 늘어질 때 입석리에 가보자. 그 미로 같은 마을 고샅길을 거닐면서 길가에 깃든 집들의 사연을 살펴보자. 당당했던 기와집은 스러져가고 겉모습은 허술해도 알뜰하게 손질된 채마를 거느린 집이 있다.

굳이 집에 얽힌 사연을 물을 필요는 없다. 상상으로 복원하는 즐거움을 누리자. 입석리 고샅길은 정확한 고증보다는 상상이 제멋대로 나래를 펴는 길이기에…. 황성희 기자 redhann@yahoo.co.kr <황성희님은 정읍통문 기자입니다.>

   
▲ 구부러지니 더욱 아름답다. 이 순간 길의 곡선은 현대적 미학을 획득한다. 우리는 도로의 무자비한 직선에 충분히 시달렸다.


▲ 황토 섞인 돌담장이 있어 아름다운 고부 입석리 고샅길


▲ 쏜살같이 마을로 내닫는 고샅길!!!


▲ 길 위에서 만난 폐가. 사연은 묻지 마세요. 상상으로 복원해보세요. 입석리 고샅길 위에서는 모두가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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