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정명은 기자의 서울인근산 샅샅이 훑기

밤이도다
봄이도다

밤만도 애닯은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일제시대 거센 제국주의 폭압 하의 암울한 현실을 노래한 시인 김억의 `봄날은 간다`란 시 구절이다.

김억이 노래한 것처럼 꽃은 떨어지고 님은 탄식한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그래서 마시고 또 마셨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등산(登山)이 아니고 등주(登酒)였던 셈이다. 마시는 내내 탄식했다. FTA 장막에 가려버린 암울한 오늘의 밤을…미국의 앞잡이로 나선 현정권의 군화발 아래 무참히 짓밟히다 쫓겨난 평택 대추리 노인들의 삶을…. 깊은 생각 아득이는데 부는 바람에 이름 모를 새만 슬피 울고 있었다.


#정릉 청수장 오르는 길의 아파트옆 계곡 풍경

지난 토요일. 2주만에 다시 나선 북한산행의 여정이다. 예정에 없이 늦은 시간 일을 마친 뒤 어디서 한 잔 걸칠까 궁리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떠난 산행길이라 동행은 한 명뿐이었다. 어차피 마실 술이라면 이 복잡한 속세보단 그래도 꽃 피고 새 지저귀는 산 속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린 결론. 때문에 몸에 지닌 것이라곤 달랑 카메라 한 대. 어디로 갈까, 망설일 것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산이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 여름이라 해는 길어졌지만 산행보단 주행(酒行)이 더 큰 목적이었기에 단거리, 그것도 초단거리 산행 코스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정릉에서 출발, 보국문 쪽으로 오르다, 다리를 지나서 우회전, 칼바위능선 못미친 곳까지 오른 뒤 갈래길에서 아카데미하우스로 하산. 예상 소요시간은 약 1시간30분. 북한산 산성주능선도 밟아보지 않는, 기자의 등산 역사상 초유의 색다른 경험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 많은 동행도 얼씨구나 박수를 치고….


#정릉계곡 입구의 풍경

정릉매표소. 2주전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풍광이 펼쳐져 있다. 산벚꽃들이 매표소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폭의 수채화(사실 그 어떤 수채화보다도 더 화려했다. 적절한 용어를 찾지 못하는 무지를 탄식하며)를 보는 듯 눈이 부시다. 그 아래 조그만 가게 앞 공터에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아름다운 정릉계곡의 봄풍경

이미 시계는 늦은 3시를 넘긴 상태. 오르는 이는 보이지 않고 전부 내려오는 이들 뿐이다. "이 시간에도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네"라는 어느 아주머니의 얘기에 허헛한 웃음이 배어나온다. 정릉 계곡은 꽃물이 힘차게 흘러내린다. 며칠 전 내린 비에 떨어진 꽃잎까지 가세, 색다른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천천히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꽃구경에 정신을 놓는다. 사진도 찍고…. 급할 것 없다. 깔딱고개도 어렵지 않게 오르고 2주전 소개해 드렸던 아까시나무 몸통의 할아버지 수염에도 다시 한 번 눈인사를 하고…. 보국문 방향으로 오르다 맨 마지막 마주치는 다리를 건넌 뒤 우회전한다. 칼바위능선 가는 길이다. 한적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백발의 외국인이 혼자 등산을 왔는지 하산하고 있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니 "예, 수고 많으십니다" 유창한 우리 말이 쏟아져 나온다. 복받은 사람이다. 이 멋진 북한산의 풍광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게….




#계곡 물을 따라 떠나가는 봄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입고 있던 조끼를 벗는다. 등산로가 오솔길 같이 정겹다. 진달래꽃들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즈려밟고 오른다.
정릉 등산로 입구에서 한시간, 드디어 칼바위능선 아래 갈래길이 나온다. 몇몇의 등산객들이 진달래꽃 속에 파묻혀 쉬고 있다. 일행에게 칼바위능선 한 번 타볼까, 했더니 사래질을 한다. 빨리 내려가서 막걸리 먹어야지, 란 답이 돌아온다. 다른 등산객들이 웃는다. 진달래꽃이 웃는다. 그래서 내려간다. 아카데미하우스 방향이다.
 

약 30여분 아카데미하우스 바로 못미친 산중에 주막이 있다. 몇차례 소개해드렸던 4.19묘지 위 산속의 인수재와는 또 많이 다른 분위기다. 이전 누군가의 별장으로 쓰였다가 폐기처분된 낡은 집을 주막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문을 여는 날보다 닫고 있는 날이 많다. 여긴 막걸리를 직접 만들어 팔지도, 두부를 직접 만들지도 않는다. 안주는 도토리묵과 부추전이 전부다. 여기서 한 잔을 걸칠까, 잠시 망설이다 이내 주막 마당으로 들어선다. 순전히 주변 나무들에 활짝 피어난 봄의 흔적들 때문이다. 주막은 영 아니올시다인데, 주변 풍광이 말그대로 쥑여준다. 꽃들에 취해 있다보니 부추전과 막걸리가 나온다. 한잔 씩을 따라 단숨에 비워낸다. "카야∼"소리가 뒤를 따른다. 주흥의 시작이다. 이름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흥겹다. 꿩의 울음소리도 이따금 들려온다. "저게 장끼 소리 맞지?" "아마 그럴걸…."

술잔이 비워진다. 막걸리 병이 쌓여간다. 이야기가 쌓여간다. 한미 FTA가, 수입재개된 미국산 쇠고기가, 쫓겨난 평택 대추리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안주거리로 탁자에 오른다. 봄기운에, 술기운에 한껏 달아오르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는다. 대신 목소리가 커진다.


#아카데미하우스 부근

사방이 어둑해질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몇 개의 막걸리통이 비워졌는지 모른다.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산을 나선다. 아카데미하우스 주변도 온통 봄꽃 천지다. 얼마전 기념일을 맞아 대선후보를 비롯 숱한 위정자들과의 원하지 않는 조우를 감내해야 했던 4.19 민주묘지 입구의 한 조그마한 술집으로 잦아든다. 다시 술병이 쌓인다. 그렇게 이어진 술 자리는 장장 9시간 동안 계속됐다. 봄날은 또 그렇게 가고 있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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