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이 마지막 힘을 쓰고 있다
할미꽃이 마지막 힘을 쓰고 있다
  • 승인 2007.05.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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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할미꽃과 건너가는 길목

할미꽃이 마지막 힘을 쓰고 있다. 하얀 솜털로 무장한 채로 가는 봄을 잡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이미 꽃이 지고 저만큼 멀리 걸어가고 있는 것도 있다. 하얀 수염을 바람에 날리면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꽃은 친구들의 그런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5월로 넘어가는 것을 막무가내로 거부하고 있다.



‘아직은 봄이야. 화려한 시절이라고.’

할미꽃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듯 하다. 작은 언덕 위에서(전북 완주군) 보랏빛을 잃지 않고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할미꽃의 모습에서 왠지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때가 되면 넘어가야 하고 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건너가야 하는 것이 순리다.

오늘은 5월 1일이다. 4월에서 5월로 건너가는 길목이다. 4월의 화려함에 미련을 둘 이유는 없다. 당당하게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은 민망하다. 꽃의 모습을 훌훌 털어버리고 씨앗을 날리기 위하여 준비를 마친 할미꽃씨들의 모습이 더욱 더 눈부시게 아름답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그 것이 무엇이든 집착하고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 꼴불견이 된다. 아까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생명이 다하면 찬란한 보석조차도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결국 모든 것이 공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조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위적인 행위로 본질을 변형시키는 것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 당장의 순간은 변화로 인해 착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본디의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가식은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말기 때문이다.

순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일조차도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속되어서도 안 되고 목적지조차도 거추장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게 되고 그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할미꽃을 바라보면서 건너가는 길목을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 순간이 바로 건너가는 길목이다. 단지 그 것을 의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인식하지 않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어느 순간에 의미를 부여해놓고는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삶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등바등 잡고 있어보았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건너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넘어가는 것이 좋다. 5월이 되면 또다른 5월의 찬란함이 기다리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인가. 걱정이나 근심은 기우일 뿐이다. 세월은 어차피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은 행복의 뿌리이다. 순리대로 살아야 즐거워질 수 있다. 할미꽃이 흔들리고 있다.

꽃과 품격

“야 ! 곱다.”

마음을 잡아버린다. 꽃은 물론 모두가 예쁘다. 주변의 이파리에 우뚝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색깔이 무엇이든 돋보인다. 그래서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고 흥겹게 만드는 것이다. 이름모를 풀꽃은 하얀 색깔이다. 초록 바탕에 하얀 꽃이 아름답다. 그런데 마음을 흔드는 품격이 있다. 다른 꽃과는 차별이 된다.



주변의 대부분의 꽃들은 모두 다 하얀 색깔이다. 그 것만으로도 벌 나비를 유혹하는 데에는 부족하였던 모양이다. 하얀 꽃 색깔에 빨간 색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잡아버린 시선을 아예 놓아주질 않는다. 하얀 꽃에 빨간 점이 찍혀 있으니, 품격이 달라 보인다. 꽃에서 배어나는 은은함이 고귀함을 느끼게 한다.

전북 완주군의 자그만 언덕. 연록으로 옷을 갈아 입고 있는 주변의 풍광은 여느 농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눈에 띄는 것이 없는 평범함이 편안함을 준다. 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독특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마음 안으로 특별하게 들어오는 꽃이 있으니,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꽃을 보면서 품격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꽃이니 좋은 것이고, 그 것으로 우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끼는 감정은 분명 다르다. 같은 꽃이라도 차별화가 된다. 차별의 아둔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열을 나누는 차별이 아니다. 품격은 경쟁이 아니다. 자성을 높이는 향기인 것이다.

품격.

겉모습이 화려해서 품격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꽃은 그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드러난 부분을 통해서 품위가 달라진다면, 모든 것이 개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품격을 높이는 방법은 바로 그 사람을 품위 있게 대접해주어야 한다. 존중해주고 배려해주게 되면 상대방도 나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이다.

흔히 상대방을 가르치려 한다. 의식적이 아니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일이 많다. 이렇게 상대방을 대하게 되면 품격을 높일 수 없다. 가르치는 행위는 지식을 전수하는 일이고 그 것을 통해 상대방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심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방이 이에 동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을 품위 있게 대해 준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식이 아니라 진실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 것에 대한 판단은 상대방의 몫이다. 보여주는 사람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게 되면 상대방과 공유하게 되고 이는 결국 나 자신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된다.


꽃에 찍한 빨간 점을 바라보면서 품격을 생각하게 된다. 의지로 품위를 높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상대방을 격조 높게 대해주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품격이 상향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꽃이 깨우쳐 주는 삶의 지혜에 고개를 끄덕인다. 꽃이 가슴에 와 별이 된다.

라일락 향

“고운 향이네.”
어디에서 나는 향일까. 코끝을 자극하는 은은함에 주변을 둘러본다. 햇살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눈이 부셔 바라보지 못할 정도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지만,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해님보다 우뚝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고 있다.



“아 ! 바로 라일락 향이로구나.”

연보라로 송알송알 맺혀 있는 탐스런 꽃송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언제 그렇게 피어났을까. 바쁜 일상에 매달리다 보니, 꽃이 피어난 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았어도 실망하지 않고 시나브로 피워낸 것이다. 사람들이 무심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고 그윽한 향을 뿜어내고 있다.

아파트 앞 화단(전북 전주시 삼천동)에는 라일락꽃뿐만 아니라 많은 꽃들이 피워나 있다. 동백은 이제 시들어가고 있고 모과 꽃은 수줍어 붉은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다. 봄이 무르익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니,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알 수가 없다. 가는 봄을 잡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봄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고 있을 때에는 알아채지 못한 어리석음이 선명해진다. 이제 멀어져가고 있으니 잡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을 보고 허허로워진다. 아둔함과 욕심이 합쳐지는 이기심이 싫어진다. 넉넉하게 뿜어내는 라일락 향이 탐진치를 조금씩 떼어낸다. 우주에 넘치는 향에는 그리움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움.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게 되면 열정보다는 그리움이 더 많아진다. 꽃 향은 지난 세월의 일들을 고스란히 되살려놓는다. 생활에 밀려 밀쳐두고 있던 추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난다. 기억의 편린들이 그리움의 강에 적시게 되면 모두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황홀하였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가슴이 에이던 아픔까지도 무지개 색깔로 단장이 된다.

기뻤던 일은 그 것대로의 색깔을 가지고 있고 슬펐던 일은 그 것대로의 독특함을 간직하고 있다.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그 무게 또한 같다. 그 경중을 나눌 수가 없다. 모두 다 가치가 있고 다 빛난다.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쌓여서 구축된 것이 바로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움 중에는 기다림도 있다. 기다림에는 아픔과 행복이 공존하고 있어서 우뚝하다. 기다림에는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동반한다. 만약 기다림에 고통이 없다면 기다림은 그렇게 돋보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슬픔이 내재해 있기에 돌아다보면 절실해지는 것이다.

아픔과 고뇌가 밀물되게 되면 자연 사랑의 마음이 깊어진다. 치솟는 분노가 시나브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변해진다.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그렇다면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용서함으로서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리움의 바다에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라일락 향에는 이 모든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슬픔과 고통이 공존하는 기다림을 포함하여 모든 추억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를 우리는 그리움이라 한다. 라일락 향에 젖어 서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윽한 향에 취하여 인생을 음미하는 즐거움은 참으로 크다.

라일락 향 <춘성>

흔들리는 바람에
춤을 추는 맑은 향

진한 고뇌 슬픈 영혼
은은하게 위무하는

연보라
아름다운 빛
파도 되는 그리움

향에 취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햇살도 눈부시고 세상이 우뚝하다. 라일락 꽃 아래에서 나만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진다. 에이는 아픔을 극복하고 모두를 용서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 짧은 인생에서 헛된 욕심을 버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가고 싶다. 

<정기상님은 전북 전주시 대덕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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