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대북 쌀 지원 유보에 흔들리는 남북관계

남북관계가 흔들리고 있다. 2.13 합의 이후 불어오던 훈풍이 다시 차갑게 식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고 남북열차가 56년만에 다시 시험 운행됐지만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지고 있다. 근저엔 쌀 지원 문제가 깔려 있다. 북한은 현재 극도의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관련 일각에선 북핵 문제와 쌀 지원 등을 연계시키려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꼬집는다. 이전까지 북핵 문제와 쌀 지원 등 인도적 지원 문제를 `병행·발전`시키는 전략을 취해왔던 우리 정부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는 것이다. 당장 29일부터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장관급회담도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주>


원래 한국 정부는 이달말부터 북한에 대한 40만t의 쌀을 지원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태도를 바꾸었다. 2.13 합의에 따른 후속조치 이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쌀 지원을 유보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물론 배후엔 미국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 식량 문제 1995년 이래 최악

현재 북한의 식량 문제는 1995년 이래 최악의 상태라는 국제사회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북한 정부가 최근 식량생산을 극대화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구조적인 식량난은 피할 수 없다.”
지난 26일 <미국의소리방송(VOA)>과의 인터뷰에서 유엔 산하 세계식량기구(WFP) 평양사무소 장 피에르 드 마저리 소장이 밝힌 것이다.
드 마저리 소장은 “세계식량기구 WFP 외부의 식량원조가 없을 경우, 올해 북한의 소외계층은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할 것”이라며 “현재 북한 정부는 농업생산량을 극대화 하기 위한 노력을 매우 강력히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농지 부족과 낙후된 농업환경 때문에 자체적으로 필요한 식량의 80% 정도 밖에 생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과 올해 2년 연속 외부로부터의 식량 지원과 수입이 매우 부족하다”며 “현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북한의 소외 지역과 계층을 중심으로 심각한 식량난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WFP는 당초 2006년부터 2년 동안 북한에 15만t의 식량을 공급할 계획이었으나 외부의 지원의 크게 줄어들어 필요 예산의 23%만을 확보한 상황”이라며 “이는 WFP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기 시작한 199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따라서 당초 북한주민 중 가장 소외된 190만명을 지원할 계획이었으나, 현재는 70만명에게만 식량을 지원하고 있다”며 “특히 지원국가가 없어서 6월에는 이 숫자가 30만명으로 줄어들며 되며, 이는 임산부나 가난한 학생들에게 지원되던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특히 4월부터 9월까지는 전통적으로 식량난이 심각한 시기인데, 외부지원까지 줄어드는 상황에서 특히 소외지역을 중심으로 심각한 식량난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한국의 대북지원단체 ‘좋은벗들’의 이사장인 법륜 스님도“북한 정부는 기아사태를 막기 위해 비상식량인 2호미까지 풀고 있는 상황”이라며 “오는 9월 가을걷이 이전에 심각한 기아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한국의 대량 원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외부에서 식량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돌면서 주민들이 비축했던 식량을 시장에 내놨고, 또 최근에 북한 정부가 비상식량인 2호미까지 풀면서 최근까지 급격한 기아사태는 보고되지 않고 있다”며 “그러나 북한이 ‘식량 100만t이 부족하다고 시인했다’는 것은 북한 정부의 생리상 그 이상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WFP의 대북한 식량원조를 위해 가장 많은 지원을 했던 나라는 미국과 한국, 일본이었으나 이들 나라는 현재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최근 40만t 의 대북 쌀 차관을 결정했지만 아직 지원 시기를 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지난 2월 6자회담에서의 핵 합의 이후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핵 폐쇄 대가로 식량 지원을 직접 언급했지만, 북한의 핵 폐쇄 이행이 늦춰지면서 지원도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남북관계 차질 불가피

남북관계에도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보인다. 당장 29일부터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21차 남북장관급회담이 문제다.
회담에서 정부는 2.13합의 후속조치가 이행된다면 쌀 지원은 곧바로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북한에 강조한 뒤 철도 부분개통과 군사적 긴장완화 등 현안을 적극 논의할 계획이다. 아울러 장관급회담이 남북 간 정례적 만남 중에서는 최고위급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다소 실무적으로 진행됐던 회담의 위상을 격에 맞게 끌어올린다는 복안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하지만 북한이 남한의 의도에 그렇게 순순히 따를지는 미지수다. 바로 쌀 지원 문제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비슷한 전례가 있었다.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열린 제19차 장관급회담이었다.
당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문제 삼아 남한은 쌀 지원과 비료 추가 지원을 유보했다. 북한은 이에 강력 반발했다. 결국 회담은 공전만 거듭다가 예정된 일정보다 하루 일찍 종료됐고 이후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었다.
정부내에서는 아직까지 이번 장관급 회담에 대해 낙관하고 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쌀 차관과 장관급회담은 별개의 사안으로 영향이 없을 것"이라며 "쌀 지원에 합의해 차관계약서까지 교환한 지금과 작년 장관급회담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북한이 회담 자체를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장관급 회담 참석 의사를 밝힌 게 이런 전망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회담장에선 북한의 태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북한은 이전부터 쌀 지원 문제를 핵 문제와 연계시키는 남한의 태도를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해 온 점이 그렇다.

쌀 지원 유보 미국의 뜻?

이런 가운데 북한에 대한 쌀 지원 유보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이란 보도가 나와 주목을 끈다. <한겨레>는 이는 노 대통령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2·13 합의 직후 한 ‘약속’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에 따르면 이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한 정부의 외교안보 소식통은 27일 “노 대통령은 지난 22일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열린 관련 부처 장관급회의에 참석해 ‘북한이 2·13 합의 초기조처를 이행할 때까지 쌀 차관 제공을 유보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20일 열린 장관급회의에서 쌀 차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자, 이틀 뒤 다시 소집된 회의를 직접 주재해 이런 지침을 내렸다고 전해졌다. 이에 따라 23일 열린 장관급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는 쌀 차관 문제를 따로 논의하지 않았다.



다른 소식통은 “노 대통령은 2·13 합의 직후 부시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6자 회담 합의사항 이행과 남북관계 진전의 속도를 맞춰달라는 부시 대통령의 요청을 양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피비에스>(PBS)와 한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3억달러 규모의 대북한 지원계획이 있으나, 북한이 미국을 포함해 5자와 맺은 합의들을 존중할 때까지 집행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확고히 견지했다”며 “내 친구 노 대통령한테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톰 케이시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24일 정례브리핑 때 ‘북한에 쌀을 보내지 말라고 한국에 요청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쌀 차관 제공과 2·13합의 이행은 별개 문제”라며, 미국 정부의 그간 행보 및 속내와 전혀 다른 원칙론을 밝혔다.

늦어지는 2.13 합의 이행, 북한 책임인가
 
당연히 정부 방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가장 큰 핵심인‘2·13 합의’ 이행 지연의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도 그렇다. 이는 사실상 북한이 아니라 미국의 태도와 더 관계가 깊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바로 미국이 2.13 합의 이후 30일 안에 해결해주기로 한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한 자금 문제다. 북한은 이 문제가 해결되면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의 북한 방문을 초청하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아직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책임을 거론하며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비디에이 문제 해결의 책임이 기본적으로 미국 쪽에 있기 때문이다.
당장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5일 “북한은 ‘2·13 합의’를 지키겠다고 하고 있는데 우리가 쌀을 안 주면 북한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6일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서도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이 안 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 상황이다. 북한이 만약 안 한다고 하면 6.15남북 공동선언의 약속 위반"이라면서 "정상회담은 8.15를 넘기면 어려워진다"며 8.15 이전 개최 필요성을 거듭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남북 문제에 있어서 미국과 잘 협의해서 해야 하지만,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인 만큼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해야 한다"고도 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도 "9.19 합의 때는 한미, 남북, 한중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능동적으로 회담을 끌고 갔었다. 남북이 열려있어야 6자회담에서 열려 있을 수 있다"며 "쌀을 6자회담과 연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시민단체들도 정부의 조속한 대북 쌀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상임대표 백낙청)는 27일 "최근 정부는 북측의 2.13합의 불이행을 이유로 북에 대한 쌀 지원을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정부가 남북이 합의한 기한 안에 북에 대한 식량 지원 절차를 예정대로 진행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6.15남측위는 "우여곡절 끝에 남북관계가 복원돼 남북철도의 시험 운행 등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방면의 교류협력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이번 결정이 또 다른 악순환의 고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이어 "북에 대한 식량 지원은 인도주의 차원의 결정이기 때문에 국내외의 정치 사안과 연계되어 활용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며 "2.13합의 이행 지연도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자금 송금 문제가 아직껏 해결되지 않고 있는 정황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6.15남측위는 "남북관계의 현안에 대해 특정 외국이 월권적 발언을 해가며 우리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입김을 행사하려는 듯 보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며 "남북관계는 긴 호흡을 갖고 일관된 의지를 관철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순애 기자 leesa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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