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수다방>

다들 알다시피(라고 맘대로 가정) 음식은 세 끼 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선 스트레스와 음식은 상호작용한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 또는 굶는 것으로 푸는 사람이 있고, 요리하는 것으로 푸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우울할 때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더 우울해지지 않는가 말이다(설마 나만 그런 거야?). 많은 남자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은 바리바리 싸주신 음식, 방문했을 때 차려 주시는 뜨끈한 밥 따위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뿐이랴. 여성주의자들에게 기억되는 최초의 가족 내 차별은 으레 ‘음식’이나 ‘밥상머리’와 연결되어 있다. 왜 닭다리는 아빠랑 오빠만 먹어야 하는지, 왜 달걀노른자 넣은 당근 주스는 아빠의 전유물인지, 왜 밥 푸는 순서는 아빠-엄마-오빠-나가 아니라 아빠-오빠-나-엄마인지 등등(내가 자란 가족의 특성상 아빠-남동생-나-엄마 같은 무지막지한 경험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 때문일까?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테야를 되뇌며 자란 ‘딸’들은 가사노동, 특히 음식 만들기를 의식/무의식적으로 꺼리는 일이 많다.

나 역시 불과 2, 3년 전까지 음식 만들기는 평생 나랑 상관없는 일일 줄로만 알았으니까. 내 ‘밥’을 따로 챙겨주는 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호기롭게’ 살 수 있었던 건, 식당이 있었고, 돈도 있었고, 이도 저도 안 내키면 굶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한데 3년쯤 전, 부모님 댁에 갔을 때다. 어머니가 식혜 한 잔을 주시며 “식혜가 먹고 싶어서 어젯밤에 했다”고 하신다. 순간 머리에서 종이 댕댕 울렸다. 어머니는 뭔가 잡숫고 싶을 때, 굳이 슈퍼에서 ㅇㅇ식혜 캔을 사실 필요가 없는 거였다. 서른 즈음에 맛본 어머니의 식혜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상당히 ‘멋진’ 일이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

요즘 나는 하루에 두 개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닌다. 반찬? 가끔 내키면 인터넷에서 발견한 두부 스테이크 같은 것도 하고, 김치 부침개도 하고, 오징어채나 멸치도 볶는다(며칠 전에 한 잔멸치 볶음은 내가 했지만 정말 맛있었다!).

작년에 몇 달 동안 집에 있을 때는 온갖 볶음밥과 우동, 스파게티 등의 한 그릇 요리를 해 먹는 데 맛을 들였다. 하지 않을 때는 엄청난 장벽으로 느껴졌던 것이 막상 해 보니까 생각만큼 엄청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해진 요리법(레시피)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다’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일단 볶는다’ 정신을 갖추면, ‘요리’ 아닌 일상음식은 보기보다 어렵지 않다(물론 ‘맛’은 별개의 문제다, 흠흠;).

어쨌든 덕분에 내가 할 줄 아는 건 거창한 요리가 아니라 ‘생존 요리’, 즉 몇 가지 밑반찬과 각종 볶음 같은 것들이다. 맛 내기 어려운 데다 상하기 쉬운 나물은 사양, 도시락반찬으로 싸 오기 힘든 국 종류는, 미역국이나 김치찌개도 잘 못 끓인다.
그런데 요즘 도시락을 나눠 먹을 때 매번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처음 몇 번은, “이거 니가 한 거야?” 좀 익숙해지면 “이것‘도’ 니가 한 거야?” 그렇다고 하면 어김없는 감탄사. “와∼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해?” 뭐랄까, 이건 마치 내가 짠 스웨터를 입었을 때나 내가 만든 장신구를 걸쳤을 때 마주치는 반응과 흡사한 구석이 있다.

처음 몇 번은 일일이 답해주고, 만들어 보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요리법을 알려달라면 알려주었다. 그러나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 같은 말 여러 번 듣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 되풀이되는 저 질문이 얼마나 극심한 스트레스일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러나 이 ‘듣기 좋은 꽃노래’는 내게 여성주의자와 음식 만들기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왜 그들은 나를 ‘대단하다’고 하는 것일까? 바쁜 와중에 음식까지 만든다고? 하기 어려워 보이는 고추장아찌나 달걀말이를 해 온다고? 글쎄? 과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당신, ‘엄마’가 해 주시는 음식을 보고 먹을 때마다 “엄마 대단하다” 내지는 “이거 엄마가 직접 한 거야?”라고 물어보시나요? 아니면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한테 저런 유의 질문을 던지시나요?

아마 아닐 거다. 왜냐하면, ‘엄마’나 ‘식당 아줌마’는 원래 ‘음식 만드는 사람’이니까. 바야흐로 ‘대단하다’는 감탄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여성주의자는 ‘음식 안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마땅한 음식은 김치참치볶음이나 달걀 프라이 정도여야만 한다!

여성주의자들은 가사노동을 비롯한 돌봄노동이 여성에게만 전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성인이라면 성별을 불문하고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은 제 손으로 해야 하고(물론 이 말은 한편으로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언니는 몸이 불편해서 ‘아직까지’ 어머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는데, 그럼 그 언니는 ‘성인’이 아닌가?), 필요할 경우 성평등하게 나누어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여성주의자님, 가사노동을 ‘폄하’하지는 않지만 ‘내’가 할 수는 없는, 하고 싶지는 않은 일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리고 그것을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라도) (‘젊은’) 여성주의자라는 ‘집단’의 특성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문제는 음식 만들기가 ‘여성’이라는 집단에게만 강요되는 것이지 음식 자체에 있지 않다는 걸, 일상에서는 잊고 살지 않나요?

오해는 말라. 나는 ‘요리’가 제도교육에 포함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음식 만들기는 참을성과 배려, 주의력, 집중력, 균형감각, 심지어 멀티태스킹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전인교육’이지만, ‘모두’가 음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런데 제발, 음식 안 해 먹는 걸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이런 저런 질문은 생략하고, 맛있으면 그냥 먹기나 해 달라. 최소한 ‘이것도 니가 한 거냐, 대단하다’는 둥,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은 삼가 달라. 아 물론, 짜다 달다 시다 쓰다 등등, 맛에 대한 코멘트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다음 번에 같은 음식을 할 때 도움이 될 테니까, 불끈!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따우`(필명) <이 글은 한국여성민우회(womenlik.or.kr) 홈페이지 칼럼란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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