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 여성들의 수다방>

민우회 모람세상 안엔 ‘여성주의 문화산책 놀러와’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제 생각엔 ‘놀러와’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은데요 ‘놀러와’서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누며 그림을 보며 음악을 들으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어제 본 영화는 원작 소설과 혹은 그 원작으로 만든 뮤지컬을 본 소감을 나누는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여성주의’에도 ‘문화산책’에도 방점이 찍혀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이 제목은 서로가 평등하게 연결되어 있어 서로를 종속시키지 않는다는 생각도 합니다. 특히 개모음으로 시작해 개모음으로 끝나는 제목은 부드럽고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느낌을 전달해 밝은 느낌이 듭니다. 좋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하려는 얘기는 제가 좀 불편하게 느끼는 좀 투정 섞인 이야기입니다. 좀 편하다기 보다는 불편한 느낌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놀러 왔는데 잔뜩 짜증 섞인 친구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라디오를 켭니다. 안 그럴 때도 있지만 거의 그렇습니다. 주로 케이비에스 ‘클래식에프엠’-예전엔 1라디오라고 했는데 얼마 전부터 이렇게 부른답니다-을 듣는데 오전 9시부터 ‘FM가정음악’이 방송됩니다. 이 프로그램 안에 진행자의 이름을 딴 ‘○○○의 마티나타, 아침의 노래’란 꼭지가 있습니다. 진행자의 설명을 빌리자면 ‘시대를 불꽃처럼 산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꼭지입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 동안 한 명의 여성에 대한 이력과 삶을 살펴보는데 참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위인’들이 남성에 치우쳐 왔기 때문에 균형 잡힌 시각을 줄 수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꼭지, 계속 듣다 보니 하나의 범주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부분이 제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다음은 이 꼭지에서 지난 3월 초부터 6월 중순까지 나온 여성들입니다.

에비타 에바 페론, 베아트릭스 포터, 마사 스튜어트, 마리아 몬테소리, 고정희, 비비안 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프리다 칼로, 조앤 롤링,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메리 퀸트, 텐진 빠모, 시몬 보봐르, 최승희, 수녀 엘로이즈, 그레이스 켈리입니다.

위의 여성들을 잘 모르지만 방송을 들으면서 또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면 매우 훌륭한 여성들입니다. 때로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 반기를 들었다 좌절하기도 했지만 개인의 삶에 있어서 또는 지배 질서에 대항하며 멋지고 훌륭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왕비가 되어 지배체제에 포함된 사람도 2명이나 있지만. 그러나 저는 이 꼭지의 선정에 대해 불편한 느낌이 드는데 그건 우리 안의 ‘옥시덴탈리즘’이랄까 ‘식민주의’라고 해야 할까라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위 여성들 가운데 제가 아는 한에선 에비타 에바 페론, 프리다 칼로, 고정희, 최승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럽과 미국의 백인 여성들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특징적인 범주들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주류 백인 여성들이 월등히 많다는 것입니다. ‘백인 여성들이 월등하게 시대를 불꽃처럼 산다는 거야 뭐야’ 라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돕니다. ‘어째서 한국의, 일본의, 베트남의, 방글라데시의, 짐바브웨, 케냐, 브라질의, 칠레의 여성들은 나오지 않는가? 그 나라 여성들은 별로 불꽃처럼 살지 않나?’ 라는 불만이 입안에 가득 고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제가 좀 우습기도 하지만 좀처럼 불편한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왜 백인들의 성공담이 주류로 인식되고 백인들이 월등히 많은 비중을 차지해야 하나요?

물론 성공한 백인 여성들의 성공담이 훨씬 한국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백인 여성들의 자료도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수월하게 자료를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뭐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닌데 자료 발굴의 수고까지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교보문고 양 입구에 가면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가들의 얼굴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다 훌륭한 작가들이지요. 그러나 거의 대부분 유럽 백인 남성들입니다. 여성 작가와 동양 작가도 몇 있지만. 이건 백인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주류 지배 질서와 권력에 대한 한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세계 문학에서도 권력 있는 사람들은 백인 남성들이니까요. 이런 현상을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성들의 주류적 성공담에 대해서도 이 라디오 프로의 이 꼭지는 백인 남성들 대신에 백인 여성들을 숭고한 삶의 모델로 선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멋지게 자기 삶을 개척해 가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상으로서. 이 라디오 프로는 여기에 부합하는 것도 같습니다.

유럽 백인들의 사고를 주류로 생각하고 바라 볼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인종의 문화와 역사를 소외시킵니다. 그게 때로는 심각한 차별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은근한 무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근대화(서구화)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한국 사회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기 쉬어집니다. 이제 직접적인 지배와 무력으로 지탱하는 식민주의는 거의 끝났지만 식민주의자들이 남긴 잔해는 오래도록 남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좀 비약이 심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좀 길지만 여기 한편의 글을 인용하면서 마칩니다.

『200년 전, 남아공 케이프타운 인근에 사끼 바트만(Saartje Baartman)이라는 흑인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백인 여성에 비해 엉덩이가 컸다.
그녀를 본 영국인 윌리엄(William Dunlop)은 큰 돈을 벌게 해 주겠다며 그녀를 꼬드겨 유럽으로 데리고 갔다.
런던,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그녀의 엉덩이와 성기를 보여주는 인종 전시가 열렸고, 그 전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끼 바트만이라는 이름은 백인식 이름인 사라 바트만(Sara Baatman)으로 바뀌었다.
5년 동안 이어진 전시와 사창가를 거쳐 1815년 1월 1일 새벽에 사라 바트만은 프랑스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시신은 프랑스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에게 양도되어 “인간이 멈추고 동물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내는 연구에 사용되었다.
이후 사라 바트만의 뇌와 성기는 병에 담긴 채로 186년 동안 프랑스의 인류학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2002년 5월, 남아공 정부는 프랑스 정부와 7년 간의 협상 끝에 사라 바트만의 유해를 고국으로 가져와 고향 강가에 묻었다.』한국여성민우회 회원 `체리향기`<이 글은 한국여성민우회(womenlink.or.kr) 홈페이지 칼럼란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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