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방> 명예남성과 알파 걸 그리고 무임승차자-2회

성(sex/gender/sexuality)의 개념을 분화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여성운동의 흐름은 sex로부터 gender를 분리시키는 싸움(sex 개념에 부착된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여성을 사회적 구성물로 위치 짓는 과정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여성의 운명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임을 재설정하고 sex로부터 젠더를 분리해 가는 과정<“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시몬느 드 보봐르, 1949>이었던 것이다.)에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었으며, 다소 성과가 눈에 보이고 있음을 인정하려는 순간 sexuality라는 것에 휘말려 이론적 논쟁에서는 적어도 딜레마를 겪고 있다. what is a woman?이나 who is a woman?에 적절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말이다.

이미 ‘여성’이라는 정체성, 혹은 범주는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새로운 여성, 여성정체성은 얼마든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발견’될 수 있다. 현모양처로, 커리어우먼으로, 슈퍼우먼으로, 아줌마로, 명예남성으로 알파걸로, 여성주의운동가로, 또 다른 그 무엇으로도. 즉 이러한 ‘발견’된 여성들은 여성주의적이냐, 아니냐, 여성정체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적어도 아니라는 것이다. 계급, 민족, 인종적 위치, 개인이 가진 인적자원, 장애인/비장애인, sexuality의 다양한 층위 등의 차원을 고려한 수위에서의 여성 경험, 정체성이라는 것은‘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아우르기에 턱없이 한계적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이라고 복수화한다고 해서 또 간단히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머릿속은 혼돈상태니까. 여전히 남성이 잘 못하면 저 사람(개인)은 왜 그럴까라고 하지만 여성이 잘못하면 “여자(전체)들은 왜그럴까, 여자(전체)들이란…”이라고 하듯이? 


#알파걸을 소재한 한 CF장면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현존하는 이상한 구분으로서의 여성/남성만이 존재하는 상황 하에서는 명예남성이라도 개인의 맥락 밖의 ‘여성적 역할’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고, 알파걸이라도 대학문 밖에 웅크리고 있는 성차별의 현실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란 것을…. 게다가 수업시간에 주눅 든 채로 수줍게 고개 숙인 남학생들은 알고 보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지금 아무리 날고뛰어도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게 여자니까….

남자 69.8%, 여자 47.1%(2007.2. 통계청 고용동향)로 고용률은 20%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고, 남자 구성비가 높은 직군은 `고위임직원 및 관리자` 89.3%, `기능원 및 관련 기능종사자` 83.6%, `장치, 기계조작 및 조립종사자` 79.8% 등이며 여성 구성비가 높은 직군은 `서비스 종사자` 63.2%(2005인구주택총조사)로 여전히 고위직에서의 여성 비율은 현저히 낮다. 여전히 이러한 수치들은 수치 이상의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49)는 권력이 남자들의 손 안에 있는 한 남자와 여자의 싸움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동등한 파트너로 이해하는 상황이 오지 않고는 계속 될 것이라 하였다. 그것을 ‘가부장제’라 이름 붙이건, ‘성불평등’이라 이름 붙이건, 그 무엇이라 붙이건 간에 논쟁과 공격과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그 동안 만큼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이 남자들의 손 안에 있다고 보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남자들과의 공모 또는 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여자와 남자는 절대적으로 동등한 파트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여자와 남자는 생물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여성성, 남성성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공존해 오면서 여자들은 다양한 입장(standpoint)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 왔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화해를 목표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성 내부의 차이에 대해 소통하고 여성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여성들 간의 화해에 더 큰 함의를 두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여성이 여성을 적(敵)으로 만들도록 길들이는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들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시끄러운 불협화음으로 가시화시켰고, 남성과는 화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여성들끼리는 화해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용해왔다. 

그것의 정치적 효과로 남녀 간의 오해(?)와 이로 인한 ‘영원한’ 싸움은 지난하지만 끝나지 않을지 모르며, 여성들은 서로 연대할 줄 모르고 서로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거나 적으로 생각하거나 여성들도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녀 간의 차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성도 그 차별의 벽을 넘어서고 나면 자신은 그렇게 열등한 여성이 더 이상 아니며 그렇게 열등한 여성들과 같은 부류에 자신을 더 이상 끼워 넣지는 않는 것이다. 여성이 더 이상 차별받지 않는다고 확언하는 사람들(여성 포함)과 그에 상응하는 가시화된 물증들을 성평등이 도래한 양 제시하는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성차별의 역사적 수혜자와 일치하는 경향이 있음을 간과하지는 말 것을 당부한다. 이것이 여성들이 적이 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로미오(필명)<이 글은 한국여성민우회(womenlink.or.kr) 홈페이지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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