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을 넘긴 나이…언제나 은퇴하지 않은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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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7.2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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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한국액션영화의 선구자' 정창화 감독

제11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의 장편부분 심사위원장으로 고국인 한국을 찾은 `한국 액션영화의 선구자` 정창화 감독을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만나 보았다. 정창화라는 이름은 젊은 세대들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일수도 있다. 1930, 1940년대 한국 영화의 거목이었던 최인규 감독의 문하생으로 40년대 말 영화계에 입문한 후 53년 <최후의 유혹>으로 감독 데뷔, 한국영화계에 액션영화라는 장르를 개척해준 선구자였다. 한국 영화계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점 역할을 해주었고, 한국 영화계에서 거장으로 칭해지는 임권택 감독이 유일하게 `사부`로 받드는 스승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50여편의 대부분의 작품이 액션영화로 한우물을 판 고집스러운 장인(masterpiece)이다.

정 감독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해외로 진출한 감독으로 60년대에 무협영화로 전성기를 이뤘던 홍콩의 대표영화사 쇼브라더스에 스카웃되어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새로운 무협형식의 권격영화인 <죽음의 다섯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으로 73년 3월 미국에서 개봉,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미국의 `쿠엔틴 타린티노` 감독은 <죽음의 다섯손가락>을 인생의 10편의 영화 중 하나로 꼽으며 `킬빌`에서 <죽음의 다섯손가락>에 대한 오마쥬를 전하기도 해 화제를 모았었다. 영화의 성공과 더불어 액션영화의 마스터피스로 떠오른 그는 신생영화사였던 골든 하베스트로 자리를 옮겨 그만의 논스톱 액션을 선보이며 홍콩액션 영화의 전형을 세우기도 했다. 77년 <파계>를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정창화 감독은 영화사를 설립하고 활동하다 87년 은퇴해 현재까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인터뷰가 약속된 시간 정창화 감독의 숙소인 호텔로 향하면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 1928년생이니 80을 넘긴 나이의 외모로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 정정한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개막식에서도 밝혔듯 11년 만에 부천영화제에 오시게 됐다. 부천에서 거의 매년 쇼브라더스 특별전이 열렸었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언젠가는 감독님도 뵐수 있으리라 바랬었다. 부천은 처음 방문하셨는데 2003년에 부산에서 감독님의 특별전도 열렸었는데 두 영화제에 대한 느낌과 심사하시면서 느끼셨던 점은 어떠셨는지.

"우선 심사하면서 느낀 점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외국사람이라 문화적, 시각적 차이가 많이 느껴졌다. 9개국 10편의 작품이 내가 생각하는 거랑, 미구권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랑 문화적 차이가 느껴졌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좁혀 갔다. 부산영화제는 아시아에서 가장 기반이 튼튼하고 영화제측에서 매년 초청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참여하고 있다. (영화제 주최측에)바래는 점과 개선점을 많이 얘기해주고 그들도 내 의견을 많이 참작해 준다. 부산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런 게 중요하다. 해외게스트들도 좋아하고 입지적으로도 해운대를 중심으로 짧은 역사임에도 칸이나 다른 큰 규모의 영화제를 많이 따라가고 있다.
부천은 11년만에 처음 방문이다. 너무 늦지 않게 초청해줘 고맙다. 국내영화제는 많지만 부천은 개인적으로 꼭 있어야 할 영화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영화계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단편들을 중점적으로 육성해야한다. 이번에 심사하면서 그런 점을 느꼈다. 영화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뒷받침이 돼서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도 주목해야 한다.
한상준 집행위원장부터 젊은 스탭들까지 패기를 보면 흐뭇하고 언제든 뒷받침 해주고 싶다.세계 영화제 속에 우뚝 설 수 있도록 성원과 관심 기대한다."

-`한국액션 영화의 선구자`라고 불리신다. 왜 `액션영화`를 선택하게 되셨나?

"당시(50~60년대)에는 액션영화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일본영화의 영향으로 멜로드라마와 홈 드라마에 치었다. 대사가 많고 지루한 영화들이 대부분이었고, 미국 대작영화들은 템포가 빠르고 관객들의 정서에도 맞았다. 한국영화는 고사직전였다. 액션영화 감독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여러가지를 연구하고 공부한 끝에 미국영화와는 똑같은 제작여건이 안되어 한국적 액션 영화를 고려하게 됐다. 템포와 몽타주가 스피드하고 메시지도 있으면서 탄탄한 구성으로 관객들이 원하는 게 뭔지 새로운 걸 추구했고 성공할 수 있었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 이어 만든 <지평선>은 독립군이 만주벌판에서 독립을 찾기 위해 목숨걸고 싸우는 얘기인데 그 속에는 로망도 있고, 조국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등 새로운 방향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이 히트하면서 전 아시아 전역에서 수입하고 성공적이었는데 당시 제작자들이 실수를 해서 필름 원본을 내보내 분실, 훼손이 됐다. 내 작품들은 대부분 그런 작품들이 많아 보존이 안됐다."

(정창화 감독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햇빛 쏟아지는 벌판>, <지평선>, <순간은 영원히>는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다. 정 감독이 연출한 53편의 영화 중 우리나라에 프린트가 남아 있는 영화는 단 14편이다.)

"그 후에는 청춘물과 액션영화를 접목했다. 젊은이들의 방황과 사랑을 담았었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관객들이 좋아하고 새로운 걸 매 작품마다 시도했다. 똑같은걸 하긴 싫었다. <노다지>란 작품은 일을 하고 싶은데 일이 없던 60년대의 현실을 담아 냈다. 허망한 꿈과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회적 이면의 현실을 새롭게 담아내고 싶었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버마를 무대로 젊은 학도의 방황과 주체의식을 되찾아 가는 얘기고, <순간을 영원히>는 본격적인 첩보영화로 보통의 세트에서 찍지 않고 리얼한 묘사를 위해 홍콩에서 경찰의 허락 하에 몰래카메라를 시도해 총격전을 담아냈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은 놀라는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냈고, 조용한 거리에서 배우들의 클로즈업 장면은 따로 찍어 연결 시켰다."

-한국에서 활동하시다가 홍콩으로 가게된 계기가 있는지. 감독님은 늘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시는 선구자이셨다. 감독님의 창작욕은 어디서 나오는지.

"67년 쇼 브라더스의 대표였던 란란쇼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쇼 브라더스에는 무협영화는 많았으나 현대액션 영화는 없었다. 할리우드 버금가는 스튜디오를 갖고 있고, 1200여개의 극장배급망을 갖추고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맘에 들어 전속 계약을 하게 됐다.

(당시 장철, 이한상, 호금전이라는 걸출한 무협과 멜로의 대표감독을 거느리고 있던 쇼브라더스의 대표인 란란쇼는 정창화 감독과 5년간의 전속계약을 맺는다. 좋은 조건에서 자신의 창작욕을 펼칠 야심을 갖고 정창화 감독은 홍콩으로 떠나게 된다.)

"항상 꿈을 갖고 있다. 지금도 그 꿈은 간직하고 있어 늘 희망을 갖고 산다. 그런 부분은 중요하다. 남들보다 꿈과 정신력 면에서 모든 게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얼마 전에 홍콩에서 감독 제의가 온 적이 있는데 진부한 소재라 거절했다.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면 컴백 안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요새는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다큐멘터리에도 관심이 있어 아프카니스탄에 전쟁에 희생된 아이들, 고통받는 아이들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고픈 소망도 있다. `그 미소 속에는 눈물 자욱이 있다`라는 제목도 정해놨었다. 가족들은 물론 후배들이 위험하다고 반대해서 보류하고 있다. 이번에 저예산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배워서 참고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거장으로 불리는 임권택 감독이 감독님을 유일한 `스승`으로 인정하고 있다. 당시 임권택 감독은 어땠었나.

"56년 <장화홍련전>을 할 때 제작자인 임 사장이 젊은 청년 둘을 데리고 왔는데 두명 중 한명이 임권택이었지. 이미 스태프가 구성돼 있어서 소도구 담당을 시켰었는데 당시엔 영세해서 진행도 보고 그랬다. 몇작품을 같이 하게 됐는데 58년 <비련의 섬>을 찍을 때 조감독 자리가 비어 조감독으로 기용했다. 당시에는 새벽 4시면 통행금지가 풀리는데 5시면 현장에 나와서 준비 다해놓고 기다리고 있더라. 소도구 할 때 터 조감독이 하는 역할을 눈여겨 보고 조감독이 하는 일을 다 알고 있었다. 유심히 보고 `키울 만한 친구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환경이 어려웠었는데 `책을 많이 보고, 그렇게 해서 성공하라`고 격려해 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임권택 감독은 `인간승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꿈을 갖고 이겨낸 것이다."



-감독님께서 예전에 "액션영화는 어른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시켜주는 판타지"라고 말씀 하셨었는데 그 말씀이 이번에 심사위원으로 오신 부천영화제와 딱 어울리는 말씀 같다.

"67년 홍콩으로 건너가 액션영화로 꿈을 실현했다. 작품 안에는 주제와 인간의 철학적 메시지가 담아 어느 때든지, 어느 세대이든지 머릿속에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죽음의 다섯손가락

-쇼 브라더스 시절 당대 내로다하는 호금전, 장철 등과는 어떻게 지내셨나?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없으셨는지.

"호금전은 공통된 점이 많아 가까이 지냈었다. 그는 학자 타입이면서 영화 속에는 시가 흐르는 감독이었다. 장철은 무협액션 영화지만 피가 낭자하는 타입이라 나와는 친하지 못했다.
다 라이벌 의식도 있어 내가 이방인이라 경쟁도 하고 강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더 노력했다. 하루 3시간 자면서 쇼 브라더스의 영화들을 다 찾아보면서 무술과 무협을 보여줄 수 있었다(<아랑계곡>이란 작품에서). 무술과 무협은 다 보여주었기에 중국은 역사가 긴 나라니 신비한 이야기를 찾았는데 내가 외국인이라 더 눈에 잘 띠었다.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더 재밌게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완성한 <죽음의 다섯손가락>이 경쟁 끝에 미국 워너브라더스가 배급권을 따내 미국 대작들을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비록 홍콩영화지만 한국인으로 1위를 차지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아시아권에서 세계시장 문호개방의 계기가 됐고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천년마녀>는 구라파 시장에 첫 진출을 이뤄낸 작품이기도 하다. 후배들도 (한국영화가) 사양길이다 생각말고 소재의 빈곤에서 벗어나 좀 더 새로움을 추구하여 도전적인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쇼 브라더스 시절 왕우, 강대위, 적룡(추룡)과는 어떻게 지내셨나?

"왕우는 현대적인 액션이 끝나는 시점에 대만으로 가버려 기회가 없었고, 적룡과 강대위는 장철 감독이 붙잡고 있어 기회가 없었다. 성룡은 그땐어리기도 했고, 너무 장난치는걸 좋아해 나한테 혼나기도 했다."

 
#죽음의 다섯손가락

-<죽음의 다섯손가락>의 성공으로 아시아 영화의 세계진출과 더불어 이소룡의 미국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소룡과는 교류가 있으셨나?

"<죽음의 다섯손가락> 성공으로 워너 브라더스에서 감독직 제의가 들어왔는데 당시에는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있었다. 결국 같은 아시아권에서 활동을 선택했다. 이소룡은 미국에서의 성공 이후 무술 연기의 매너리즘 에 빠졌었는데 어느날 연락이 와서 만나자 했다. 나름대로 한계와 고민에 빠진 그가 `정감독님과 함께 영화를 만든다면 <죽음의 다섯손가락>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다음 작품을 위해 매일 만나 기획하던 중 사망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죽음의 다섯손가락> 성공 이후 쇼 브라더스 사장인 란란쇼의 두번째 부인이 제작 총책임자로 오면서 제작비 절감을 이유로 영화의 의상과 칼의 길이를 줄여놨더라. 영화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거지. 의상과 칼을 들고 가 그 앞에 던지고 `혼자 다 해 먹어라. 나는 코미디 감독이 아니다`라고 소리치고 쇼 브라더스를 떠났다. 당시 내 행동은 홍콩에서는 전설적인 얘기로 전해진다. 그 누구도 제작자 앞에서 그렇게 행동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주목하는 후배 감독으로 박찬욱 감독과 류승완 감독을 꼽으셨는데 후배감독들이나 한국영화에 대한 느낌은 어떠신가?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내 회고전에 류승완 감독이 찾아왔더라. 선배로서 후배의 작품과 노력에 애정이 간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유능한 감독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적중했다. <올드보이>로 칸에서 상도 탔고. 둘 뿐 아니라 유능한 감독이 많아서 앞으로도 기대하고 있다."

인터뷰를 했다기 보다는 거장이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를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이 조금 더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더 묻 싶은 질문도 많았지만 시간을 너무 빼앗는게 죄송스러워 아쉽지만 흥미진진했던 정창화 감독과 인터뷰를 끝냈다.
한국 영화와 한국 액션영화의 선구자로서 항상 새로운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액션을 개척해낸 이 시대의 진정한 장인 정창화 감독. 시간과 문화의 경계를 작품으로 공식화된 틀을 깨며 `영화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믿으며 80을 넘은 나이에도 지금도 영화 연출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언제나 은퇴하지 않는 현역이다. 부천=박병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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