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내, 당신의 누이"
"당신의 아내, 당신의 누이"
  • 승인 2008.03.0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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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 여성들의 수다방>

모 방송국에서 작년에 하던(올해도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여성 관련 캠페인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남자 상사가 부하 여직원을 몹시 성차별적으로 대하지요(구체적인 내용은 잊었습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니 자신의 딸이, 부하 여직원과 같은 일을 겪고 온 것이었습니다. 퍼뜩 무엇인가를 깨닫는 남자. 이어지는 자막, “당신의 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어쩌구 저쩌구.

어떤 사람들은 성차별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아내,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딸, 당신의 여동생... 등등 가족관계를 빗대어 설명합니다. 실제로 청소년 성폭력 가해자 교육을 나가는 어떤 이는, 교육생들이 “여자는 강간당하고 싶어 한다”에 “그렇다”고 답했다가 말을 바꾸어 “어머니는 강간당하고 싶어 한다”라는 말을 들이밀면 화들짝 놀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전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 저런 전략이 먹히나 봅니다.

그런데 저는 오래 전부터 저런 말이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내 ‘가족’이라 안 된다면, 가족이 아닌 여성은 성폭력이나 성차별을 당해도 괜찮은가요? 누구의 어머니도 딸도, 여동생도 아닌 사람은 어떡해야 하나요? 그리고 ‘가족’이면 모든 게 다 괜찮은 걸까요? 그럼 성차별주의자가 ‘당신의 아버지, 아들, 남동생, 오빠’라고 생각해 보라는 말에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 걸까요? 지난달에 성추행 선고유예 판결이 난 최 아무개 의원의 딸은 피해자에게 최 의원의 사죄글을 전달했다고 하지요. 이런 행위는 ‘가족의 이름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또, 이 같은 논리는 똑같은 반대논리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군 가산점에 부활에 대해서는 ‘네 아들, 네 오빠, 네 남동생이라고 생각해 보라’는 말들이 쏟아집니다. 가족 논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 대응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섬뜩한 것은 ‘당신의...’라는 수사입니다. ‘당신의...’는 여성을 대상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주로 성차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남성에게 말해지지요. 즉, 성차별이나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은 ‘한 남성의 아내, 한 남성의 딸, 한 남성의 여동생...’이 되는 겁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이는 이제는 일부 법률과 신문기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부녀자(婦女子)-누군가의 아내나 딸’의 연장선상이지요. ‘부녀자’는, 여성이 사회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남성과의 관계를 거쳐야만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여성이 ‘부녀자’로 불린다는 것은 ‘여성’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어떤 권리나 차별철폐를 주장할 수 없으며, 그것은 남성의 그늘 아래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래도 ‘여러분의 누이’라는 수사를 사용하고 싶으신가요?

‘가족’ 비유가 때로는 (현실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이 비유는 어느 순간 비유한 당사자를 해치는 부메랑이 될지도 모릅니다. 2007년 대한민국, 여성에게 아직 ‘시민권’은 요원한 것일까요? 저는 이제 누군가의 아내나 딸, 어머니 대신 한 사람의 여성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따우`(필명)<이 글은 한국여성민우회 홈페이지(www.womenlink.or.kr) 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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