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에 젖고, 물안개에 젖고, 막걸리 향에 젖고…
가을비에 젖고, 물안개에 젖고, 막걸리 향에 젖고…
  • 승인 2007.10.1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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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정명은 기자의 서울 인근산 샅샅이 훑기-북한산편

비가 내린다. 여름 지독하게도 쫓아다녔던 그 비가 또 내린다. 지금은 10월이고 가을이다. 그래서일까, 여름에 내렸던 그 비와는 다른 느낌이다. 스산하다. 빗줄기가, 빗소리가 가슴에 사무친다. 싱숭생숭해진다.

접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싱숭생숭해진 마음 때문이다. 이럴 땐 떠나야 한다. 원래 계획은 산악회 멤버들과의 장거리 산행. 취소했다. 비 때문이다. 대신 다른 코스를 택했다. 이날 산행에 동참할 멤버도 단 한 명으로 줄었다. 그가 원했고, 내가 원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 게다. 마음 스산하게 만드는 가을비 때문이었을 게다.
 
"간단하게 타고, 인수재에서 막걸리나 마십시다…."

그렇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연휴의 고즈넉함. 처음 산악회 멤버들과 장거리 산행을 계획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연휴 첫날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다음날 쉬면 될 일이다. 여유백배다.

적지 않은 비가 내리는데 굳이 나선 것도 똑같은 이유가 작용한 탓이다. 게다가 가을이다. 가을비다. 그런데 간단하게 타고 막걸리나 먹는다? 그렇다. 오늘은 산행이 무리가 아니다. 무리하게 막걸리를 마실 계획인 것이다. 게다가 유일한 동행 역시 상당한 주당이다.

구기동에서 만나기로 한다. 집을 나서는데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좋다, 까짓 거…이왕 내리는 거 계속해서 내려다오!!

버스를 타고 구기동으로 향한다. 가방 안엔 제육볶음이 포함된 도시락이 들어 있다. 장거리 산행에 대비했던 것이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버스 안은 한가롭다. 구기동에서 내린다. 구기파출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이다. 그래도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대단한 현대인들이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훨씬 굵어졌다. 우산을 펴든다. 미리 도착해 기다리던 일행과 만난다. 유쾌하다. 

구기동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계곡가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어느 음식점에서 아는 얼굴이 튀어나온다. "일로와,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 광화문에서 보신탕집을 운영했던 아주머니다. 신문사를 옮긴 이후로 첫 대면이다. 몇 년 된 것 같다. 보신탕집 있던 곳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이곳에 음식점을 내게 됐다는 얘긴 전에 전해들은 바 있다. 그래도 그렇지, 우산까지 쓰고 가는데 어떻게 알아봤을까. 사람의 인연이란…. 커피 대신 생수를 한모금 받아 마신다. 다음에 들르기로 하고 길을 재촉한다. 

오늘의 코스는 지극히 평범하다. 북한산에 처음 오는 이들이 가장 애용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구기동 매표소에서 대남문을 거쳐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그리고 진달래능선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 끝에 오늘의 메인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막걸리집 `인수재`다. 등산에만 소요되는 시간 2시간 30분. 메인 이벤트 시간은? 글쎄…올시다.

빗줄기는 여전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내려준다. 바위가 미끄럽다. 천천히 천천히 오른다. 안경에 자꾸 습기가 낀다. 닦아도 별 소용 없다. 결국 벗어 주머니에 넣는다. 나무가, 바위가, 산이 몽롱하게 다가온다. 계곡에서 피어나는 물안개도 그렇다. 쉬었다 가려 해도 쉴 곳이 없다. 대충 우산을 쓴 채 바위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는 게 고작이다.

숨이 차오른다. 깔딱고개다. 고개 머리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다. 대부분 단체로 온 사람들이다. 뒤쳐진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오른다. 문수사 갈래길이 나온다. 계단 쪽으로 접어든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바람까지 휘몰아친다. 우산이 자꾸 뒤집히려고 한다. 부여잡는다. 희뿌연 물안개 사이로 웅장한 대남문의 지붕이 들어온다. 대남문 아래 공터엔 우산을 쓴 채 자리에 주저앉아 식사를 하는 이들도 있다. 지붕 아래 망루로 올라가니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분다. 싸온 도시락을 없애야 하는데, 이곳도 발디딜 틈이 없다. 포기.

다시 길을 나선다. 도시락은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없애기로 한다. 대성문을 거쳐, 보국문 쪽으로 가는 능선길은 한적하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보현봉과 칼바위능선 등은 짙은 물안개에 가려 거의 보이질 않는다. 거세게 불어닥치는 바람 틈새로 아주 잠깐씩만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카메라를 꺼내 순간포착을 하려는데 쉽지 않다. 간신히 한 두 컷 건졌다. 마음에 들진 않는다.

대동문에 이른다. 이곳에선 어떻게든 도시락을 없애야 한다. 망루로 올라간다. 예상했지만 인산인해다. 하는 수 없지…. 한쪽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도시락을 편다. 빗물이 들이친다. 하는 수 없지…. 그래도 밥 맛은 기가 막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 동행 가방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알코올이다. 조그마한 병 두 개에 위스키를 담아왔다. 이런 날씨엔 제격이다. 한모금 들이키니 식도가 타들어가는 느낌이다. 으슬으슬했던 몸이 풀려온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 마지막 코스다. 진달래능선에서 바라보는 주봉 일대는 가히 환상이다. 카메라로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미끌미끌한 암릉길을 조심조심 내려간다. 기분이 좋다.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다. 콧노래가 나온다. 어디선가 진한 막걸리의 누룩 냄새가 풍겨오는 듯 하다. 인수재가 가까워오고 있는 것이다.

대동문에서 한시간, 드디어 인수재에 도착한다. 인수재는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 내려서는데 손님들이 많이 없다. 중년의 남자 일행들만 한쪽 귀퉁이에서 숯불에 갈매기살을 굽고 있다. 냄새가 그윽하다. 인수재는 막걸리집이다. 막걸리에 갈매기살이라, 왠지 부조화다. 인수재는 두부집이다. 그것도 수십년째 이 일을 해온 할머니가 직접 만드는 것이다. 막걸리도 마찬가지다. 막걸리엔 두부다. 할머니의 아들, 그러니까 기자에게 형님으로 불리는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물으니 아들을 낳았단다. 그래서 따로 산 아래 동네에 집을 얻어 왔다 갔다 하는데 그곳에 내려간 것이란다. 그 형님 이순(耳順)이 다 된 나이다. 대단한 형님이다.

마당가 탁자에 앉는다. 비는 여전히 내린다. 탁자 위에 비닐 지붕을 씌워놨다. 막걸리를 시킨다. 한 사발에 2000원씩 한다. 두부도 200. 순두부도 곁들인다. 향연이 시작됐다. 비 때문인지 막걸리에서 풍기는 누룩향이 더욱 진하다. 마당에 떨어진 빗물이 파문을 일으킨다. 머리 위에 쳐놓은 비닐 위에 떨어진 빗방울 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막걸리 사발은 이내 다시 채워진다.

어둠이 깔린다. 가을이 젖는다. 가을비에 젖는다. 막걸리에 젖는다. 몇사발을 비웠는지, 어떻게 산에서 내려왔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었고,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동행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어렴풋이 꿰어 맞춰본 기억으론 약 7∼8사발의 막걸리를 마신 것 같고, 비틀거리며 산에서 내려오다 인수재 형님과 마주친 것 같고, 4.19탑 앞에서 택시를 탄 것 같고, 그렇게 집에 온 것 같긴 한데…. 참고로 인수재 막걸리는 두 사발 이상 마시면 대부분 취한다.

까짓거 뭐 상관할 거 없다. 가을이니까…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으니까….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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