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은 기자의 북한산 샅샅이 훑기-망월사→민초샘→다락능선→도봉산유원지

눈이 시리다. 잠시라도 더 바라보다간 망막이 녹아내리기라도 할 듯 하다. 저처럼 처절히도 붉을 수 있을까. 가는 세월…가는 가을…가는 시간…가는 순간에 온몸으로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

망월사역에서 엄홍길 기념관 앞을 지나 계곡을 따라 망월사 방향으로 오른다. 도처에는 핏빛 단풍들이 지천으로 소요를 하고 있다. 하늘도, 땅도, 그 사이의 텅 빈 공간도 저마다 벗어제낀 몸뚱아리들을 벌겋게 드러내놓고 있는 마지막 가을의 그것들.

많이 고민했다. 어느 곳으로 가야지, 좀더 진한 아쉬움의 현장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하고. 송추로 가서 여성봉-오봉 코스를 타야 하나, 의정부로 가서 의정부 시청 매표소-사패산-사패능선-포대능선-자운봉 코스를 타야 하나, 아니면 북한산 백운대를 올라볼까?? 물론 이 모든 고민은 모두 독자님들을 염두한 탓이다. 게다가 이날 산행엔 오랜지기 친구가 동행한다. 고등학교-대학교를 함께 다닌 둘도 없는 동창녀석이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후 자주 만나지 못했다. 같이 만나는 친구들과 1년에 겨우 한 번씩이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것도 대부분이 술 약속이다. 이 친구 사는 곳이 지방이보니 더더욱 그렇다. 2년 여전 어렵게 약속이 돼 한 번 산행에 동참한 일이 있다. 그 때 함께 했던  다른 친구 한 명이 이번 산행에도 참가하기로 했으나 당일 약속이 무산되고 말았다.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산에서 내려올 즈음 뒷풀이에나 합류할 수 있을 거라나. 이런…사는 게 뭔지. 둘이 단출하게 함께 하는 산행이다. 마음을 다잡고.

망월사로 결정했다. 자주 산에 다니지 않는 친구를 배려한 것도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 99% 만족할 만하다. 아쉬운 점은 오르면 오를수록 산은 가을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을을 벗어난다는 건 겨울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이다.

길이 미끄럽다. 등산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내린 낙엽의 시체들. 낙엽이 많이 쌓인 이때쯤이면 길은 마치 눈이 내린 그것 마냥 위험하다. 오르는 길에도 내려가는 길에도 통나무처럼 미끄러져 뒹구는 건장한 등산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절대 주의가 필요하다.

계곡을 따라 망월사 직전 갈래길로 향하는 길은 그나마 경사가 다소 완만하다. 시인의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등산로가 갈린다. 우회전하면 원도봉사를 거쳐 포대능선 끝 부분과 만난다. 그곳에서 좌회전 하면 도봉산 정상 방향이고, 우회전하면 사패능선을 거쳐 사패산-의정부 쪽과 만난다.

"요즘 얌체족들이 많아요. 돈 안내고 입장을 하는 가 하면, 올라가서도 쓰레기 아무데나 버리고…. 올라가서 담배 피우고 불 피워서 음식 해먹는 사람들도 있다니깐요. 그래서 쓰겠습니까. 그런 얘기 좀 많이 써주세요."

신문을 건네주자 시인의 마을 직원이 한마디 건넨 것이다. 일전에도 안면이 있던 터다.

<위클리서울> 독자님들 중엔 그런 몰지각한 분들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혹시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계도도 좀 해주시길. 기자도 실제로 산행중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야 흔하게 볼 수 있고, 날씨가 많이 쌀쌀해진 때에는 준비해온 버너로 찌개 등을 데워 먹는 사람들도 목격할 수 있었으니…. 문제는 쓰레기와 화재다. 특히 겨울철엔 곳곳서 피어오르는 불길 때문에 수십년, 수백년, 수천년에 걸쳐 간직돼온 자연이 고스란히 파괴되기도 한다.

직진해서 망월사로 오르는 길. 오르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 전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다. 단풍 때문이리라.

약 40여분 계곡을 따라 흐드러질 정도로 불타오르는 단풍과 호흡하며 발걸음을 옮기면 나오는 세갈래길. 오른쪽은 망월사를 거쳐 포대능선으로 올라가는 길. 기자는 민초샘 방향으로 좌회전. 오랜만에 산에 오르는 친구를 배려한 때문이다. 이곳서부턴 급경사길이 이어진다. 친구의 입에서 연신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낙엽 조심해서 밟고 한눈 팔지 마라! 재수씨 청상과부 만들어 나한테 책임지라 하지 말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고…. 이마에선 줄줄줄 흘러내리는 땀. 날씨는 쌀쌀한데도 온몸이 땀 투성이다. 기분 썩 괜찮다. 어디 가서 이렇듯 땀을 흘려보겠는가. 배출되는 땀만큼 스트레스도 훌훌 날아가는 느낌이다.

"힘은 드는 데 진짜 상쾌하다."
"것봐, 그렇다고 했잖아. 자주 좀 다니라고…." 으쓱해진 기자 한마디 내뱉는다.

어라? 그런데 풍광이 바뀌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린 단풍. 빈자리엔 말라 비틀어진 잎들만 한 두 개씩 눈에 뜨일 뿐…. 완연히 겨울산의 처참한 몸뚱아리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하긴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럴만도 하지.

약 30여분 숨이 턱턱 막히는 거친 급경사길의 돌계단을 마치 스님이 수행을 하듯 딛고 또 딛고 한발 한발 오르다보면 능선 바로 아래 은밀한 곳에 자리한 샘. 바로 민초(民草)샘이다.

"어휴, 살았다!" 친구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민초샘은 바위 틈새로 한 두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물이 고여 만들어진 샘이기 때문에 물량이 아주 적다. 조그마한 생수병으로 한 두 개 뜨면 없어져 버릴 정도. 때문에 물을 마시면서도 조심스럽기 그지 없다. 그만큼 물맛은 꿀맛.

거기서 20-30여미터를 오르면 포대능선과 만난다. 우회전 하면 사패능선을 거쳐 사패산으로 향하게 되고, 좌회전 하면 만장봉-자운봉 등 도봉산 주봉들과 조우한다. 그곳서 친구에게 묻는다. 또 한번의 지극한 배려다.

"여기서, 정상 쪽으로 갈래…다락능선으로 갈래." 물론 알 턱이 없는 친구다. "그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당근이다.

잠시 망설이다 결정한다. 다시 민초샘 방향으로 내려온다. 부근에 탈출로가 있다. 다락능선으로 향하는 사잇길이다. 독자님들에겐 이전에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 길을 아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래서 한적하고 조용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온통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차려 입은 산악회 사람들이 줄지어 길을 가로막고 있다.

약 20여분 암벽길을 걸으면 다락능선과 조우한다. 이곳, 참 좋다. 바로 남쪽으론 도봉산 주봉들의 웅장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반대쪽으론 망월사를 비롯 포대능선의 산그리매가 넓은 품으로 밀려온다. 주봉이 바로 옆으로 보이는 바위 위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을 편다. 친구는 맨 손이다. 그럴 줄 알았다. 미리 알고 넉넉하게 준비한 터이다. 망월사 역 근처에서 사 온 막걸리도 곁들인다. 친구 입에서 "캬∼"소리 나온다. 죽인단다. 김치제육볶음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지 모르겠단다. 당연한 얘기다. 막걸리 두 병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사라져버린다. 전화가 걸려온다. 산 아래서 조우하기로 한 벗이다. 시간을 정한다.

내려간다. 한동안 사라졌던 단풍들이 다시 본연의 모습을 찾기 시작한다. 단풍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진한 내음을 풍긴다. 이제 이마저도 떨어져 내리고 말겠지. 마지막 가을바람에 흩어져 날리고 말겠지. 가을이 간다. 휑한 바람이 가슴에 사무친다. 벗이 있어 다행이다. 그나마 벗이 기다리고 있어 다행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만나는 벗들과 진하게 알콜을 들이키며 가는 세월을 탓해봐야 겠다. 가을이다. 아직은….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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