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명은 기자의 서울인근산 샅샅이 훑기-북한산

♬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낙엽이 지네, 루루루루∼가을이 가네 ♬


토요일 신문사 일이 다소 늦게 끝났습니다. 잠깐 망설이다 이내 용기를 냈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또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될 것만 같았습니다. 지난주 산행 때 분위기가 그랬거든요. 일주일 정도면 단풍들도 모두 떨어져 사그라들고 말 것 같은 불안감…. 마지막 단풍을 기억하자, 마지막 가을을 느껴보자. 그래서 독자님들에게 마지막 가을산의 처절함을 전해드리자.

서둘러야 했습니다. 짧아진 해 탓입니다. 사무실에서 나선 시간이 늦은 2시 반경. 어디로 갈지 망설일 이유도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야 합니다. 동료 한 명과 함께였습니다. "이거, 후레시라도 준비해가야 하는 것 아닌가?" 동료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후레시까지 준비할 엄두는 나지 않더군요. 무작정 버스에 올랐습니다. 정릉 청수장행 버스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생수를 사고 부리나케 산입구쪽으로 향합니다. 올라가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고 울긋불긋 단풍보다 더 요란한 등산복을 입은 하산객들만 가득합니다. 이미 한잔씩들 걸친 때문인지, 아니면 빨간 단풍색깔이 물든 때문인지 얼굴이 울긋불긋합니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해가 지면 마지막 단풍을, 마지막 가을을 카메라에, 가슴에 담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하긴 정릉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이 코스가 가을단풍 구경하기엔 썩 괜찮은 곳이긴 합니다. 보국문 방향을 향해 오릅니다. 사진도 찍습니다. 아래쪽인데도 일주일 전과는 많이 달라져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래쪽은 붉은 노랑 단풍 천지였는데요.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발씩 다가오는 동장군의 위세에 미리 놀라 겁을 집어 먹은 탓인지 간혹 한번씩만 그 화려했던 자취를 간신히 보여줄 뿐입니다. 그나마 사진을 찍는데 색깔도 제대로 나오질 않습니다. 퇴색된 것이지요. 나머지 단풍들도 떨어져 뒹구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잔인한 등산화 굽이 그들의 몸을 산산이 찢어놓을 것입니다. 약간의 신음만을 내지르다가 그들은 다시 자연 속으로 동화되겠지요.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니깐요. 그래서 연초록의 잎으로 삐죽이 솟아올라 시야를 간질이다 녹음을 이루고 다시 황금색 찬란한 몸뚱아리로 행려들을 즐겁게 해줄 것입니다. 자연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중간 즈음부터는 아예 단풍 구경하기가 힘이 듭니다. 모두다 떨어져 내린 것이지요. 간혹 한두잎 퇴색된 잎들만 메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애처로움을 자아냅니다. 바람 한 줄기 불면 그들 역시 힘 없이 떨어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이 계절의 풍광입니다. 가슴속으로 쾡한 바람 사무치게 하는 마지막 가을의 풍광….

오릅니다. 날씨는 쌀쌀한데 이마에선 땀이 흐릅니다. 겨드랑이가 미끈거립니다. 걸음을 서두른 탓입니다. 잠시라도 쉴라 치면 으슬으슬 한기가 듭니다. 자칫하다간 감기 걸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쉬지 않고 주욱 걸어올라갑니다.

토요일 간혹 이곳에 올 때마다 꼭 마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 한 사람이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약간은 늙어보이는 외모에 발에 의족을 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인사를 건넨 적도 있습니다. 순전히 언급한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말로 인사를 건네자 활짝 웃으며 역시 우리 말로 답을 해오더군요. 참,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몇 년전까지만 해도 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건네는 일이 많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가끔 그 때 일이 생각나 "조심하십시오!"라고 먼저 말을 건네도 들은 채 만 채 하고 그냥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일까요?

어쨌든 몸조차 성치 않은 그 늙은 외국인은 반갑게 응답을 해 옵니다. 이날도 그를 만났습니다. 덥수룩한 수염이 이전 보다 한층 더 자란 것 같더군요. 그래서 또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받았습니다. 지팡이를 집은 채로 힘차게 걸어 내려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깔딱고개를 간신히 기어올라 보국문에 도착하니 시인의 마을이 있는 입구에서 약 50여분이 소요됐습니다. 중간 약수터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있지 않았구요. 산성 곁으로 능선길을 따라 대동문으로 향합니다. 능선길의 나무들은 완전히 한겨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긴 이쪽이야 일주일 전, 아니 그 전부터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북쪽 고양시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폐부 깊숙이 파고듭니다. 뒹구는 낙엽이 소요를 일으킵니다. 이가 시립니다. 가슴이 시려옵니다.

벌써 해는 서서히 기울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해도 처량해 보이기만 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대동문에도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서서히 어둠이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옷깃을 여밉니다. 걸음을 재촉합니다. 내려가는 길, 온통 낙엽 천지입니다. 미끄럽습니다. 동료에게 조심하라고 타이릅니다. 기자가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공허한 웃음이 새어나옵니다.

진달래능선에서 통일연구원 쪽으로 꺾습니다. 조금 더 빨리 내려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쪽 길은 계단이 많습니다. 코스가 짧은 만큼 경사가 급한 탓입니다. 인적도 거의 없습니다. 간혹 검붉은 색의 단풍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별로 감흥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갈래길에서 30여분 대동교가 나옵니다. 언저리에 음식점들이 즐비합니다. 계곡도 있습니다. 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아니 흐르는 물이 보이지 않는 것일 겁니다.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 있으니까요. 훤히 불을 밝힌 음식점들에선 시끌벅적 사람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시인의 마을을 지나 4.19탑 방향으로 내려옵니다. 허름한 술집으로 잦아듭니다. 막걸리 한 사발이 간절합니다. 시계를 보니 산에서 머문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입니다. 젊은 주인아주머니가 두부김치에 청송막걸리를 내옵니다. 바로 옆 텃밭에서 무공해로 재배했다는 배추겉절이도 덤으로 줍니다. 막걸리가 술술 넘어갑니다. 가을이 넘어갑니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마지막 가을밤입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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