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연재> 고홍석 교수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일기-둘째날

`Weekly서울`이 연재하고 있는 `쉼표 찾기`는 오랜 학교생활과 사회활동 후 안식년을 가졌던 전북대 농공학과 고홍석 교수가 전북 진안군 산내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보고 느낀 점들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고 교수는 2004년 3월 전북 전주시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이 한적한 산내마을로 부인과 함께 이사를 갔다. 고 교수의 블로그에도 게재된 이 글들은 각박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아주 좋은 `쉼표` 찾기가 될 것이다. 고 교수는 `Weekly서울`의 연재 요청에 처음엔 "이런 글을 무슨…"이라고 거절하다가 결국은 허락했다. 고 교수는 <쉼표 찾기>를 통해 산내마을에서의 생활과 사회를 보는 시각을 적절히 섞어 독자들에게 들려드리고 있다. `Weekly서울`은 고 교수가 부인과 함께 산내마을로 이사를 가기 직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쓴 모든 글과 사진들을 순서대로 거르지 않고 연재해 왔다. 지난호부터는 특집으로 고홍석 교수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일기를 연재하고 있다. 고 교수는 부인 그리고 다른 일행들과 함께 지난 10월 11일부터 22일까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다녀왔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둘째날(2007년 10월 12일) 

오전 10시 40분 방콕 공항에서 네팔 카트만두행 타이항공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비행기 안은 등산화에 배낭을 맨 트레커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아내와 나는 좌석 번호가 B, C인데 창문 옆 A 좌석에 네팔 여성이 타고 있습니다. 체격도 크고(이럴 때 적합한 표현은 `풍만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입니다. 게다가 행동이 거침이 없어서 아내 좌석까지 발을 내민다던가, 기내에서 제공하는 음료수(주류까지 포함하여)를 서슴없이 요구하여 마시더니 자주 화장실을 다니며 자고 있는 우리 내외를 깨운다던가, 또렷하지 않은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등, 여간 신경을 거슬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에서 짜증을 부리면 나만 손해이니 그저 꾹 참는 것이 상책입니다.

네팔 공항은 검사가 까다롭다고 강철원 대장이 동료들에게 주의를 줍니다. 액체로 된 화장품을 비롯하여 라이터까지 소위 테러성 물품으로 오인될만한 것들은 모두 압수를 한다고 합니다. 담배를 피우는 정 교수의 라이터가 항상 문제시되었지만 검색하는 사람보다도 더 뛰어나게 감추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검색하는 사람이 유럽인으로부터 등산용 다용도 칼을 압수하고 입꼬리가 귀까지 걸려있는 모습을 보면서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2년전의 중국 따구냥 트레킹에서 계획되었습니다. 동료 교수님의 사모님이신 공 여사와 내가 금년이 회갑이어서, 회갑 기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가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를 나누다가 결국 현실화된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회갑이라면 늙음, 은퇴를 의미하였는데 요즘에는 회갑연조차도 공개적으로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60대 초반은 노인 취급까지도 해주지 않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살아온 시간보다는 남은 시간이 적은, 그러니까 세월의 대차대조표가 한쪽으로 기운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하니 지난 시간에 대한 깊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고, 남은 시간에 대한 마음가짐 또한 다그쳐 보는 그런 분기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분기점에서 안나푸르나, 풍요의 여신을 만나고 간다고 생각하니 행복하기 그지 없습니다. 


▲  카트만두 공항 도착

네팔 현지 시각(3시간 15분 시차)으로 오후 2시경 카트만두에 도착합니다. 자그마한 공항입니다. 비자 발급을 현지에서 받는데, 그 과정 또한 근대적입니다. 그저 비자 발급 비용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문명과 문화의 발전이라는 것이 세련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사람들은 그 세련에 묶여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느리게, 더디게, 어수룩하게 살아가는 후진국에 가면 그들의 문화와 문명의 뒤떨어짐(이 또한 정확하지 않지만)에 조소를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그때서야 겨우 자신이 묶여 살아온 질곡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정제되고 세련되게 살아온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그들의 무질서가 탁하게 느껴지지만 그 무질서 속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음을 깨닫고 흠칫 놀라게 됩니다. 저 역시 네팔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그 의미를 그저 손톱만큼 알 수 있었습니다.

카트만두 공항에 `네팔에서 한국 맛을 느낄 수 있는` 빌라 에베레스트 레스토랑 사장(네팔의 한국통으로 유력인사)이 마중을 나와서 목에 흰색의 스카프(목도리라고 해야하나?)를 한 채 환영 인사를 건넵니다. 박영석 대장을 비롯한 한국 원정대들이 모두 이 빌라 에베레스트를 거점으로 히말리야를 등반하였고, 우리 팀의 가이드를 맡고 있는 강철원 대장과도 막역한 사이입니다. 빌라 에베레스트에 도착하여 냉면(카트만두에서 만두가 아니라 한국식 냉면을 먹을 수 있다는 이 행복!)으로 요기하였습니다. 


▲  빌라 에베레스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냉면


▲  배추김치와 깍두기

포터 중에 한국어를 잘하는 네팔인이 있어서 그와 함께 카트만두의 힌두교 유적지와 원숭이 사원, 그리고 우리네 재래 시장과 비슷한 타멜 거리를 관광했습니다. 보통 트레킹에서 관광은 산행을 마친 후에 하는 것이 상례인데, 대부분 산행을 마치고 관광을 하게 되면 피곤하기도 하고 산행에서 보았던 자연 경관보다는 관광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들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강철원 대장이 산행 전에 미리 관광프로그램을 배치하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보여 줍니다. 그러한 세심한 배려가 그동안의 해외 원정 산행에서 신뢰를 가지고 함께 할 수 있었던 계기입니다.
 

▲  타멜 거리


▲  힌두교 사원에서 마주친 사람들. 왼쪽 중간에 제 사진의 모델이 있다.(이 사진은 아내가 컴팩트 카메라로 찍은 것)


▲  내가 찍은 사진




▲  아내가 찍은 두 쌍의 연인들과 머리를 감싸고 있는 외톨이 사진. 아래 내가 찍은 사진과는 비슷한 장면이면서도 다르다.


▲ 아내와 내가 찍은 사진의 시차를 확인할 수 있다. 내 사진에서는 머리를 숙였던 외톨이가 머리를 들고 있다.

여느 시장에서와 같이 타멜 거리는 장사치들과 유럽을 비롯한 각국의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흥정이 오가고, 그 흥정도 마치 60년대 남대문 시장에서 바가지 씌우는 장사꾼과 그에 맞서 어떻게든 물건값을 에누리하려는 관광객들과의 숨막히는 혈전입니다. 이런 광경이 어쩌면 유기체처럼 살아있음이 번득거리는 것 같아서 여간 흥미롭지 않습니다. 카메라를 들쳐매고 이곳 저곳을 슈팅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를 슈팅하는 그 맛은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포획하는 느낌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  원숭이 사원


▲  카트만두 시내 전경

마침 카트만두는 다사인(Dashain) 축제기간입니다. 이 축제는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신성한 힌두 축제로서 여신 Durga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마치 서양의 크리스마스처럼 가족들이 모여서 선물을 나누고 새 옷을 입고 음식을 나누는, 특히 양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고 가족들이 배불리 먹는 그런 날입니다. 이 축제기간 동안 네팔 곳곳의 양들이 모두 카트만두로 모이고, 저마다 가정에서는 양들을 잡아서 목을 치고 배를 가르는 의식을 한답니다. 가난해서 양을 살 수 없는 가정은 오이에 성냥개비를 4개 마치 양의 다리처럼 꽂고서 오이의 머리를 가르고 배를 가르는 의식이라도 한다고 하니, 그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될 것입니다. 원숭이 사원에서 카트만두 시내를 구경하고, 저녁식사는 네팔의 전통음식점에서 전통춤까지 공연하면서 먹었습니다.


▲  이번 트레킹의 세 여인


▲  네팔 전통음식점에서 전통춤을 추는 두 남녀 무희

배불리 먹고 호텔에 돌아오니, 내일부터 시작되는 트레킹의 기대와 두려움이 다가옵니다. 고산에서는 천천히 걷고, 물을 많이 마시고, 체온을 충분히 유지하기 위해서 쉴 때는 반드시 모자를 쓰고, 자연과 동화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가져온 짐에서 산행에 필요한 짐만을 카고백과 배낭에 정리하고 일찍 잠을 청하였습니다. 안나푸르나, 풍요의 여신을 꿈 속에서 만났으면 하는 바램으로….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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