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명은 기자의 북한산 훑기: 구기동→승가사→비봉→연신내

날씨가 너무 좋습니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단음절의 말 `봄`입니다. 그럴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봅니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고 설레는 건 설레는 거니 어쩌겠습니까. 토요일입니다. 날씨는 완연한 봄의 그것입니다. 산에도 봄이 왔을까, 생각해보지만 그렇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내린 폭설 때문입니다. 그래도 봄이 오는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까지 버리진 않습니다.

길을 나서는데 나른합니다. 일주일 동안 쌓인 피곤 때문인지, 복잡한 서울 도심 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따스하게 내리쪼이는 봄 햇볕 때문인지, 자꾸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옵니다. 그래도 서둘러야 합니다. 이번 산행엔 지인과 그리고 기자의 딸이 동행합니다.

지인과는 북한산 구기동 파출소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집 근처 고려대 앞에서 버스에 오릅니다. 고려대는 요즘 계속해서 축제분위기입니다. 동문회관에는 고려대 동문인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아직 걸려있습니다. 본관 앞 학교측에 의해 출교됐던 학생들이 쳐놓았던 허름한 천막은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출교된 학생들은 고려대 전체가 이명박 대통령에 환호하고 있는 지난 겨울, 그 혹독하기만 한 추위를 온 몸으로 견뎌내야 했습니다.

오전시간, 간혹 등산객들이 눈에 뜨입니다. 버스는 정릉을 거쳐 국민대-북악터널-평창동을 지납니다. 사고가 났는지 갑자기 차가 막힙니다. 오전 11시 약속인데 시간이 자꾸 늦어집니다. 딸아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귀에 MP3를 꽂은 채 음악감상에 한창입니다. 30분이나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지인을 만났습니다.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쪽에서 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 파출소 앞에서 약속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계획은 이곳에서 대남문-대동문을 거쳐 진달래능선으로 해서 4.19묘역 쪽으로 내려갈 계획이었습니다. 지인이 늦은 죄라며 코스를 바꿉니다. 승가사를 거쳐 사모바위-비봉-연신내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오릅니다. 오늘의 사진 촬영은 중학생인 딸아이가 맡기로 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를 선물로 받은 이후 사진 찍는걸 즐겨합니다. 그런데 이 풍경  셔터를 누르느라 자꾸 뒤처집니다. 할 수 없죠. 어차피 이 기사를 위해서도 사진은 찍어야 하니까요.


#승가사 약수터

계곡엔 물이 흐릅니다. 한쪽엔 약간의 눈이 남아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현장입니다. 간혹 진달래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꽃을 틔울 듯 부풀어오른 모습도 보입니다. 기자의 가슴도 부풀어오릅니다. 봄은 항상 이렇게 사람을 부풀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모양입니다. 특히 자연 속에서 만나는 봄은 더욱 그렇습니다.

15분여 오르면 갈래길이 나옵니다. 한쪽은 대남문, 다른쪽은 승가사 방향입니다. 승가사 방향으로 접어듭니다. 이곳 코스는 상당히 오랜만입니다. 가끔 하산할 때 이용하곤 했는데…. 등산로도 한적합니다. 대남문 방향은 사람들에 치여 걷기조차 힘들텐데요. 그런 면에선 다행입니다. 조금 더 걷는데 앞에서 두 남자가 내려옵니다. 딸아이는 사진을 찍느라 무심히 지나칩니다. 가만 살펴보니 낯이 익은 얼굴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양동근. 탤런트지요. 가수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인사를 건넵니다. 딸아이를 부릅니다. 사인을 부탁했습니다. 옆에 있는 매니저로 보이는 또 다른 사내가 거절합니다. 시간이 없다며…. 아무리 그렇다고 사인 한 장 해줄 시간이 없을까. 할 수 없습니다. 본인이 싫다는데야, 그리고 무엇보다 딸아이 별로 애석해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연예인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오는 게 있었으니 가는 것도 있을 겝니다.

하산객들 중에는 간혹 반팔 차림도 보입니다.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두 다 가벼운 차림인데, 기자만 유독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고 있는게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계곡엔 아직 잔설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힘이 넘칩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냥 봄이 흐르는 소리라고 해두지요. 맑았습니다. 세상 만물을 깨우는 영혼의 소리로 들렸다면 과한 것일까요??

응달쪽 겨울의 잔해들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그 또한 그들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셈이고 이제 스러져버려도 아쉽지 않겠지만요. 바람조차 불지 않습니다. 슬슬 등으로 땀이 흘러내립니다.

오랜만의 산행이라서인지 숨이 차오릅니다. 딸아이도 힘이 드는 지 사진 찍는 것까지 포기하고 그저 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지인은 벌써 저만큼 앞서 가고 있습니다. 땀은 계속해서 흐릅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겨울 산행에선 기대하기 힘든 것이지요.

약 40분 승가사가 나옵니다. 약수터도 있습니다. 딸아이 물을 마시려다 말고 흠칫 놀랍니다. 바로 앞에 쓰여져 있는 수질측정결과 때문입니다. 식수로 사용 부적합!!
구기동 시인의 마을에서 1시간 여만에 사모바위에 다다랐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서 둘 셋씩 모여 앉아 준비해 온 도시락을 까먹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사모바위는 부처바위, 장군바위라고도 부릅니다. 사각형의 웅장한 크기의 바위가 위태하게 산정상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사모바위

딸아이 사진 찍느라 바쁩니다. 가만보니 바위에 앉아있는 비둘기가 주인공입니다. 한쌍의 비둘기가 나란히 앉아 따뜻한 봄 햇살에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뒤돌아서 비봉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찰라, 어디선가 짤그락 짤그락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발원지를 찾으니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입니다. 비봉쪽에서 오는 사람들인데 아이젠을 차고 있습니다. 이 좋은 날씨에…혀를 끌끌 차다가 이내 기자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비봉 우회로는 아직도 한겨울입니다. 다행히도 양지 바른 곳은 얼었던 눈이 조금은 녹았는데, 음지 쪽은 두껍게 얼어붙은 눈들이 흙아래 숨겨진 채 빙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양극화가 진행중인 북한산의 모습입니다. 경험상, 매번 잊어버리는 경험이지만 북한산은 4월 중순까지도 얼은 눈이 녹지 않아 길이 미끄러운 곳이 많습니다.


#사모바위에 앉아 있는 비둘기





비봉 우회로도 그 대표적인 곳입니다. 조심조심, 딸아이 손을 잡고 향로봉 쪽으로 나아갑니다. 향로봉 갈래길에서 우회전. 그리고 약 5분여 더 걸으면 왼쪽으로 불광사 쪽을 거쳐 연신내로 가는 탈출로가 나옵니다. 양지바른 곳이어서인지 다행히 길은 그렇게 미끄럽지 않습니다. 왼편으로 보이는 향로봉과 족두리봉이 군데군데 잔설을 뒤집어 쓴 채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이곳은 하산코스가 상당히 깁니다. 1시간 넘게 걷다보니 딸아이 신경질이 나는 모양입니다. 다시는 오나 봐라,가 입에 붙었습니다. 배도 고프다 하고…. 간신히 불광사 시인의 마을에 도착합니다.

바로 앞 주점에 들어가 회포를 풉니다. 고생했다며 장난삼아 딸아이에게 막걸리 잔을 건넸더니 입을 대고는 한모금 쭈욱 들이킵니다. 그리고는 캬아∼. 그 아버지에 그 딸인 모양입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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