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정명은 기자의 서울 인근산 샅샅이 훑기-도봉산

한껏 물이 올랐다. 금방이라도 진분홍색 양물을 터트릴 태세다. 몸을 비틀어댄다. 춘기(春氣) 때문이다. 기자의 몸도 다락능선의 진달래 마냥 뒤틀린다. 아지랑이 아롱아롱 피어오르는 춘삼월 마지막의 도봉산이다.


정신이 혼미하다. 그놈의 햇살 때문이다. 너무도 강한 유혹에 꼭지가 돌아버릴 지경이다. 나서야 한다. 떠나야 한다. 혼자서라면 또 어떠리. 그런데 아니다. 산행약속이 잡혀 있다. 몇 년 전부터 함께 산행에 동참하는 지인들중 셋이다.

토요일, 오전 10시. 도봉산역 앞 횡단보도 건너편. 대충 이렇게 정했다. 오전 10시.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다음날 산행을 한다는 생각에 금요일 술을 퍼댔다. 한편으론 걱정됐다. 내일 아침 약속 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 있을까. 기우였다. 겨우내 닫아놓았던 창가의 커튼은 여전히 닫혀져있다. 누군가, 뭔가 얼굴을 간질였다. 그리고 가슴을 거쳐 배꼽 아래로 점차 손길을 움직였다. 사타구니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다가 문득 눈을 떴다. 망할 놈의 햇살…염병할 놈의 날씨…오사할 놈의 봄!

전철을 탔다. 한산하기도, 다소 부산하기도 하다. 짙은 선팅을 한 전철 유리창도 저 망할 놈의 봄햇살을 가리진 못한다. 북쪽으로 갈수록 전철안은 부산해진다. 봄 구경 나선 등산객들 덕분이다. 도화색 감도는 얼굴들. 저러다 무슨 사고라도 일어나고 말지. 여성 등산객이 포함된 일행들이 부럽다. 우려스럽다.

여기는 도봉산역입니다. 안다. 도봉산역인거…. 창밖으로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의 주봉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9시58분. 정확하다. 도화색 얼굴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온다. 저 좁고 길다란 김밥처럼 생긴 전철안에 어떻게 저 많은 얼굴들이 한꺼번에 담겨 있었을까, 의아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발 디딜 틈이 없다. 횡단보도도 접근이 어렵다. 한번 신호를 놓친  뒤에야 간신히 건넜다. 아직 일행들은 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다. 전화를 걸어본다. 한 명은 도봉산역 도착, 한 명은 창동역 지나는 중, 마지막 한 명은 신이문역이다. 오전 10시 약속, 신이문역이 했다. 집이 인천에서도 서쪽으로 끝이다. 산행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날 과감하게 10시를 부르짖었다. 혓바닥이 약간 꼬인 상태로 느껴졌다. 까짓거 기다리면 되지, 라는 아량은 순전히 이 망할 놈의 햇살과 염병할 놈의 날씨, 오사할 놈의 봄 때문이다.

정확히 10시 22분 신이문역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등산로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신이문역 입에서 술 냄새가 폴폴 난다. 신이문역, 막걸리와 김밥과 족발과 물과…그리고 오뎅 몇꼬치를 사 문다.


#등산로 입구 도봉산 유원지

시인의 마을을 통과한다. 사방엔 산수유 천지다. 등산객 천지다. 전에는 못봤던 풍경이다. 간사한 인간의 눈이다. 다락능선으로 코스를 잡는다. 이곳도 번잡하긴 마찬가지다. 포기하고 천천히 천천히 오를 수밖에. 오랜만의 만남이라 이런저런 얘기들 분주하게 오간다. 의미있는 얘기도, 의미없는 얘기도 있다. 까짓거 신경 쓸 일 아니다.

봄은 더욱 강해진다. 머리가, 얼굴이, 목덜미가, 가슴이, 등이 축축해진다.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여성 등산객들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며칠전 온몸으로 봄비를 받아낸 진달래는 한껏 부풀어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토해낼 듯 하다. 이미 피어난 것도 있다. 앗, 진달래꽃이다! 라고 짖었다간 도봉산 오리알이다. 이미 몇 번 경험한 것처럼 헛기침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치는 게 장땡이다.


#도봉산 유원지의 산수유

신이문역 의외로 잘 오른다. 매일 매일이 술자리라며 푸념이더니, 엄살이었나 보다. 요즘 운동 좀 하나 보지? 질투다. 그냥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필드 나가는 거지…. 입 다문다. 질투다. 다른 일행이 끼어든다. 국내 모 공사의 일본지사장을 하다 귀국한지 1년 된 친구다. 일본 있을 때 골프 좀 쳐봤다고 했다. 한국에선 힘들단다. 두 골프가 얘기를 이어간다. 또다른 일행 한 명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골프하곤 담쌓았다. 그저 산이 전부다. 기자와 가장 자주 산에 오르는 일행이기도 하다.

#오르는 길에 본 도심

시야가 트인다. 아담하면서도 웅장한 포물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대능선이다. 그 아랫녘에 산사가 깃들어 있다. 망월사다. 예쁘다. 멋지다. 짙은 갈색은 점차 연한 녹색으로 바뀌고 있다. 변화가 눈에 뜨인다.


#저 멀리 망월사가 보인다

사진을 찍는 사이 일행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숨이 차오른다. 다리가 후들거려오기 시작한다. 나도 필드 좀 나가볼까나….




#도봉산 주봉들

어느 순간 커다란 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갈래길이다. 앞서갔던 일행들이 기자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대장은 기자다. 당연히 코스 안내도 도맡아야 한다. 절벽 등반로를 피해 민초샘쪽으로 꺾는다. 배고프다는 소리가 곡소리처럼 들려온다. 신이문역이다. 아침 못먹었다는 소리도 덧붙인다. 못들은 채 그냥 진행한다. 산밖에 모르는 일행, 앞으로 치고 나간다. 나머진 천천히 간다. 힘이 들어서다. 민초샘 근처에 밥 먹을 만한 근사한 장소가 있다. 절벽 밑 갈래길에서 10여분 걸린다. 날 샜다. 산밖에 모르는 일행 덕분이다. 근사한 장소 지나친지 오래다. 원래 민초샘에서 망월사역 방향으로 하산하려던 계획이 물거품되는 순간이다. 손전화를 걸어본다. 다행히 연결이 된다. 민초샘을 한참 지나 능선에 있단다. 돌아오랬더니 싫단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일행중 제일 나이 많다. 우리가 올라간다.


#도심


#포대능선에서 본 주봉

포대능선이다. 오랜만이다. 반대쪽은 송추, 북쪽으론 사패산 정상이 희미하게 다가온다. 산밖에 모르는 일행, 사패산까지 가잔다. 단연코 NO! 신이문역을 들이댄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필드 약발인지 신이문역도 괜찮단다. 결국 자수한다. 내가 힘들어 안되겠다….

능선 바위 위에 점심상이 차려졌다. 아래서 사온 좁쌀동동주로 건배! 동동주는 자기가 샴페인인 줄 아는 모양이다. 뚜껑을 여는데 활화산처럼 터져 등산복에 하얀 재앙을 입혀댄다.

다시 출바알. 오르락 내리락 결코 간단하지 않은 포대능선이다. 중간에 망월사 방향 탈출로가 있다. 5분여 하산하면 망월사. 참 높은 곳에 있는 절이다. 망월사에서 약수로 간단히 목을 축인다. 멀리 보이는 주봉들이 환상이다. 날씨는 점차 쌀쌀해진다. 걸음을 서두른다.




#망월사

1시간 여 뒤. 망월사역 인근 주점에 잦아든다. 왕년에 영화배우를 했다는 예순 일곱의 여주인이 반쯤은 욕설이 섞인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일행을 맞는다. 이 여주인, 그러고 보니 상대 나이가 많건 적건 무조건 반말에 욕설이다. 욕설의 강도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래도 밉진 않다. 음식 맛 기가 막히다. 직접 담았다는 동동주의 걸쭉하면서 개운한 맛도 일품이다. 술동이는 금새 바닥을 보이고, 금새 다시 채워지고, 바닥을 보이고, 채워지고, 해는 기울어가고, 배는 불러오고…. 봄날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고….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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