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쪽빛물…내가 바로 김삿갓이로소이다!
푸른 쪽빛물…내가 바로 김삿갓이로소이다!
  • 승인 2008.07.0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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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김삿갓 묘역 자리한 강원도 영월 곰봉

장마가 시작됐다. 흩날리는 가랑비를 뒤로 한 채 일행은 강원도로 출발했다.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김삿갓 계곡과 미사리 계곡 사이에 솟은 곰봉(930m). 이곳의 본래 지명은 곡동천(谷洞川)이다. 또는 와석리에 있다 하여 와석계곡, 무릉도원 같다 하여 무릉계곡으로 불린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역이 발견되면서 `김삿갓 계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울을 떠날 때 약하게 내리던 보슬비는 내부순환로를 지나면서 장대비로 변해 버스 차창을 드세게 몰아쳤다.
"이 비에 등산 되겠어? 계곡 원두막에서 도시락 까먹고 막걸리나 한 사발 하다가 와야지 뭐." 일행 중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자조 섞인 탄식의 소리는 경기도 하남시를 지나면서 기우로 바뀌었다. 이곳의 하늘은 너무나 청명하여 미소 띤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집 떠난 지 어언 네 시간 여, 정확히 세 시간 사 십분 만에 곰봉 등산로 입구인 김삿갓 계곡 주차장에 도착했다.



맑은 물과 주변의 울창한 황장목은 김삿갓 계곡이 무릉계곡으로 불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 계곡은 경북 봉화군에서 발원해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지나 김삿갓 묘역으로 흘러든다. 곰봉의 산자락을 둘러보면 서남쪽 끝자락에는 방랑시인 김삿갓 묘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자락에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돌려 세운다. 교통이 좋은 장소였다면 곰봉은 아마도 서울의 도봉산이나 북한산처럼 동네북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더더욱 다행인 것은 남쪽에 그 유명한 소백산이 있기에 지금도 유유히 자연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화박물관에서 곰봉으로 오르는 길은 암릉지대. 잠깐 숨을 가다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이 일품이다. 김삿갓 묘에서 곰봉으로 오르는 길은 육산으로 하늘을 찌를 듯 나무들이 치솟아 있어 잡목에 걸리는 길이 아니다. 곰봉을 오르는 산길에는 산나물이나 더덕이 많이 자생하였는데 보는 이마다 캐가는 바람에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길이 아닌 산속으로 들어가면 지금도 산나물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서쪽 마대산과 동쪽 곰봉 사이 깊게 파인 협곡은 여름 더위를 잊기에 그만이다. 남동쪽 협곡 끝머리인 백두대간 선달산 늦은목이에서 발원한 남대천 물줄기를 옥동천으로 이어주는 계곡이다.



수림지대가 병풍처럼 줄지어 선 가운데로 흘러내리는 계곡 곳곳에는 탁족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가 즐비하다. 쉬어가기 좋은 계류마다 노송들이 그늘을 드리워 준다. 상류에는 공해를 일으키는 유해장소가 전무해서 물빛이 맑기 이를 데 없다.

맑고 풍부한 수량과 깊은 골짜기와 울창한 수림을 가진 산세를 휘감아 돌며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흐른다. 곳곳에 기암괴석과 굽이치는 계류가 보는 이로 하여금 속세를 떠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만든다.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다.

그러나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와 충북 단양군 의풍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문명의 이기와 태초의 자연 사이에서 끊임없는 고민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부문이다.

"지금 시간이 열시 사십분입니다. 정상 등반 후 내려 오셔서 점심식사를 하셔야 하는 관계로 왕복 세 시간의 비교적 짧은 코스를 선택할까 합니다. 일행 여러분들은 많이 늦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 드립니다." 

산행대장의 말을 뒤로 한 채 40여명의 가족들은 땀 흘릴 준비에 들어간다. 설레임과 동시에 얼굴에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순간이다.

산행의 출발점은 이곳에서 민박과 매점을 겸하고 있는 `이정상회`를 지나 `김삿갓 청기와 식당`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나타나는 오르막 오솔길이다. 폭 2미터도 채 안되는 좁은 길 양쪽에는 소나무와 떡갈나무들이 빼곡이 둘러싸여 숲으로 지붕을 만들고 있다. 마치 크게 선심 써서 길이나마 남겨 둔 것처럼….

한 명 씩 줄지어 올라가니 선두와 나머지 일행의 간격은 크게 차이가 난다. 도중에 하산하는 이들에겐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핑계감이다.



20여분 올라가니 이름 모를 묘 3기가 있다. 이곳을 지나 10여 분을 더 가면 김삿갓 묘역 1.3km라는 푯말이 나온다. 우리들이 출발한 후 여기까지 온 거리이기도 하다.

조그마한 바위에 걸터앉아 물 한 모금 삼키면서 잠시 쉬어본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머리에 떠올리며….

삿갓 하나 눌러쓰고 평생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방랑시인 김삿갓. 가는 곳마다 전설적인 일화를 남긴 인물이지만 그의 집터와 묘소가 영월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삿갓 일가가 숨어살던 집터와 묘소가 영월에서 발견된 것은 1982년 10월이다. 본명 김병연(金炳淵, 1807~1863).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 불리었다. 아버지는 김안근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을 했다. 그 이듬해 조정에 의해 홍경래의 난이 수습된 후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당시 민중시인으로 불리면서 서민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는 57세로 전남 화순군 동북땅에서 객사하여 차남인 익균이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양지바른 곳에 그의 외로웠던 육신을 모셨다 한다.


#삿갓을 쓴 현대판 김삿갓과 일행들 한컷

周遊天下皆歡迎주유천하개환영/ 興國興家勢不輕흥국흥가세불경/ 去復還來來復去거복환래래복거/ 生能死捨死能生생능사사사능생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어디서나 환영받으니/ 나라와 집안을 흥성케 하여 그 세력이 가볍지 않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는 또 가니/ 살리고 죽이는 것도 마음대로 하네-김삿갓의 시조 `돈(錢)`-)

속설에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였으니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죽게 만드는 것이 돈이라고 생각한 방랑시인의 그 당시 생각이나, 오늘날의 금전 만능시대의 생각이 일치하니 그 위력이 대단한 것이 돈이다.

斜陽叩立兩柴扉사양고립양시비/ 三被主人手却揮삼피주인수각휘/ 杜字亦知風俗薄두자역지풍속박/ 隔林啼送佛如歸격림제송불여귀(해질 무렵 남의 집 문을 두드리니/ 주인놈은 손을 휘저으며 나를 쫓는구나/ 두견새도 야박한 인심을 알았음인지/ 돌아가라고 숲에서 울며 나를 달래네-김삿갓 시조 `문전박대`-)

해 저문 저녁 장안사 아래 어느 초가집에서 하룻밤 유숙을 하고자 대문을 두드리니 주인은 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손을 저으며 문전박대를 한다. 이에 김삿갓은 세상인심의 야박함을 시로써 달래고 바위 모퉁이 암굴에서 하룻밤 이슬을 피하였다
구구절절 감칠맛 나는 김삿갓의 시를 떠올리면 그 누군들 막걸리 한 사발 유혹을 벗어나겠는가.

정상 방면으로 10분 거리인 855m봉 사면을 지나 30분 가면 10m 높이 선바위가 나타난다.



선바위를 휘도는 왼쪽 길로 돌아 울퉁불퉁 바윗길로 20분을 더 오르면 곰처럼 생긴 바위가  나타난다. 곰봉이다. 정상에서는 동으로 태백산, 남으로는 선달산과 소백산 형제봉이 하늘 금을 이룬다. 서쪽 김삿갓 계곡인 곡골 건너로는 마대산이 마주 보인다. 빠질 수 없는 정상주(酒) 간단히 한 잔 하고 시간상 남릉을 타고 왔던 길 다시 내려간다.

김삿갓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푸른 쪽빛 물이 내려 보이는 원두막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먹는 점심과 동동주 한 사발은…내가 바로 김삿갓이오. 전광훈 선임기자 jkh414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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