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2010년 벽두 사각지대의 사람들- 왕십리뉴타운 철거지역 현장르포

계속되는 강추위 속에 왕십리의 공기는 더욱 스산하게 느껴진다. 한낮의 시간임에도 거리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서울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왕십리 철거 지역의 일년은 ‘쿵쾅’ 거리는 기계 소리만이 적막을 깨울 뿐이다.

앙상하게 철골만 남은 주택들과 문 닫은 상가, 그리고 한 땐 북적거렸을 공구상가들의 낡은 간판만이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주위엔 노랗고 파란 천막이 휘몰아치는 강풍 속에 처량하게 휘날릴 뿐이다.

붉거나 혹은 검은 글씨로 벽과 철제문을 가득 채운 문구들은 막무가내식 재개발과 철거 용역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들이 대다수였다. 연초 용산참사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외한 서울시 전역의 철거민 일년 내내 소외돼 왔다는 지적이다. 2010년의 벽두 왕십리 철거지역을 다녀왔다.



‘친구네’와 ‘평양집’은 폐허가 됐고 ‘백만불’ 가게는 문을 닫았다. ‘또치네’는 부랴부랴 짐을 싸 이사를 갔다. ‘맛나네’와 ‘돼지네’ 등 이제 남은 집은 채 절반도 되지 않는다. ‘왕십리 원조곱창’ 간판까지 내려야 할 정도니 가히 재개발의 위력은 대단하다.

지난 여름만 해도 왕십리 곱창골목의 흔적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오후 무렵이면 간이 식탁과 의자들이 도로 양쪽으로 길게 늘어섰고 여기저기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이면 손님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장터맛 나야 제격인데”

하지만 이제 손님들에게 내놓을 곱창을 준비하고 있는 집은 불과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먼저 나가 다른 곳에 가게를 얻은 집은 대부분 돈 있는 사람들이에요. 길어봤자 올 겨울이 마지막이라고 하던데 우리 주인은 아직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나봐요. 보상금이라고 받긴 하는 것 같은데 몫 좋은 자리는 월세가 두 세배는 된다고 하더군요. 할 수 있을 때까진 계속 운영한다고 하네요 ”

‘ㅁ곱창집’에서 일하는 50대 여성 강 모씨는 그래도 요즘 들어 손님이 늘었다고 한다.

“곱창골목이 없어진다고 하니 예전 단골 손님들이 혹시나 하고 들리는 경우가 많아요. 가던 집이 없어졌어도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이쪽 곱창을 마지막으로 맛봐야 한다면서….”

이 곳에서 7년째 일한다는 또 다른 종업원은 “여기처럼 오랫동안 경쟁하며 몰려있으면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각자 흩어지면 저마다 살아남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한숨을 내쉬며 “음식점, 특히 곱창은 약간 장터같은 맛이 있어야 제격”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어찌 살라고…”

곱창골목 뒤편으로 이어지는 공장골목도 거의 절반 가까이 철수가 끝난 상태였다. 소규모 금속 공장이 주를 이뤘던 곳이다. 드문드문 문을 연 상가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 곳도 유령도시같기는 마찬가지였다.

‘개발악법 속에 상공인 다 죽는다, 특별법안 제정하라’, ‘공동입주 그 날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 등의 현수막이 드문드문 보이는 가운데 상당수 셔터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남아 있던 ‘ㅎ금형’ 관계자는 “원래 금속 제품 만지는 일이 소음이나 공해가 심해 주변에서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많은 공장들이 옮기려면 적지 않은 부지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교통 불편한 시외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나간 상가들도 처음엔 반발하다가 ‘쇠귀에 경읽기’라는 생각에 지쳐 옮긴 경우가 많다. 어차피 우리야 힘도 없고, 뻔한 싸움 아닌가. 당장 생계가 힘드니 언제까지 시위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부분 가까우면서도 그나마 싼 자양동이나 창신동 쪽으로 갔다. 우리도 내년 초에 그 곳으로 갈 예정이다.”

왕십리 일부 지역의 상공인들은 연말과 연초 구청장과 만나 마지막 협상을 할 것이란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기회에 업종을 접는 경우도 없지 않다.

‘P철재’에서 일하는 30대 직원은 “원래 7명이 일했는데 모두 그만두고 지금은 사장님과 나만 남았다. 내년 설 연휴까지만 하고 문 닫는다고 해 자재 정리중이다”면서 “없는 사람들만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날이 아무리 춥다고 해도 이 곳 사람들만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공장들이 속속 문을 닫다보니 생계가 막막한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던 음식점들과 슈퍼마켓은 일찌감치 빠져나갔다. 수십 년 넘게 장사하며 유명세를 탔던 식당들의 이전 안내문이 드문드문 보였다.




‘개발보다 인간’ 문구 가득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섰다. 차도 한쪽에 소형 봉고차와 연결된 농성 천막이 보였다. 한겨울이 시작된 가운데에도 왕십리 일부 세입자들은 ‘막가파식 개발’에 항의하며 적절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 동안 원인모를 화재가 빈발하게 발생하는 등 용역업체 직원들로부터 직․간접적인 압박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분노를 표시했다.

“용산참사 이후에도 서울 곳곳의 재개발 지역에서 이상한 화재가 발생하고 불법적인 강제철거가 이뤄졌다. 그런데도 상당수 언론은 이를 외면했다. 이제 남은 건 악밖에 없다.”

이들 중 일부는 이미 이사간 사람들이다. 주인의 독촉과 어수선한 주변 상황탓에 받을 수 있는 1000만원 안팎의 주거이전비를 받지 못한 경우다.




뉴타운대책위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약자인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주거 대책도 없이 재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더구나 이 과정에서 인권이 유린됐다. 과정 전반에 대한 강제 조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어두워진 겨울하늘 밑, 철거지역 한편 크리스마스가 지났음에도 채 철거되지 않은 교회의 트리 장식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했던가. 정당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보금자리에서, 그리고 생계터전에서 쫓겨나야 하는 이들에겐 ‘개발보다 인간’이라는 구호가 더 절실하게 느껴질 뿐이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