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콩국 한 그릇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따뜻한 콩국 한 그릇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 승인 2010.02.0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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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 해고 노동자의 편지 /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

한진중공업 해고자인 김진숙(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씨가 지난 13일부터 한진중공업 영도공장 정문 앞에서 무기한 노상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한진중공업 사측은 당초 26일 전 직원의 30%에 이르는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표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가 잠정 유보한 상태다. 김진숙 씨는 김주익 한진중공업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이 목숨을 버린 2003년의 상황이 다시 일어나선 안된다며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김 씨는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단식농성을 계속할 계획이다. 단식 열흘을 넘긴 김진숙 씨가 그간의 심경을 담은 글을 <위클리서울>에 보내왔다. 다음은 김 씨의 글 전문이다.

차가 있었다면 당장 차부터 팔았을 겁니다. 땅바닥에 누워보면 세상에 경차는 없습니다. 겉보기 아무리 작은 차라도 반드시 제 무게 이상으로 지구를 울리며 지나갑니다. 오토바이는 이명박보다 더 싫습니다. 적의 동태를 수시로 감시하는 레이더처럼 텐트 안을 1초 간격으로 훑고 지나가는 헤드라이트 불빛들. 한강 철로 위에서 잠을 자본 적은 없지만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가면 이럴 거 같습니다. 저 육중하고 폭력적인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탱크 같은 저것들이 어느 순간 내 몸을 짓이기고 골을 빠개고 바퀴에 뇌수를 너덜너덜 매달고 지나갈 거 같은 환상. 아사가 아니라 그걸로 죽지 싶습니다. 로드킬. 나 좋자고 끝도 없이 쏟아내는 문명이란 건 바닥 밖엔 갈 데가 없는 목숨들에겐 살상의 폭력임을 깨우치는 시간들.

86년엔가 그 이듬해인가도 단식을 했었습니다. 그땐 천막도 몰랐습니다. 짓밟힌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다시 일어섰던 시절. 전술도 없고 전략도 없고 교섭도 없던 시절. 성명서도 없고 대책위도 없고 상급단체도 없고 지침도 없던 시절. 오로지 들끓는 분노만 시퍼런 죽창 같던 시절. 해고자 세 사람이 밟힌 그 자리에 그대로 맨바닥에 주저앉았던 행위가 먼저 생기고 단식농성이라는 개념은 그 후에도 몇 년 만에 등장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유일하게 피웠던 요령은 라면박스를 깔고 앉는 일이었습니다. 맞은 편 가게 아주머니가 갖다 주셨던. 몇 시간인가 회의를 해서 깔고 앉기로 결론 난. 그렇게 며칠을 앉아 있으니 한 사람씩 라면박스를 들고 와서 같이 앉아 같이 굶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 박창수도 있었고. 지금 제가 있는 텐트 안에는 솔직히 없는 게 없습니다.

전등에, 전기스토브에, 전기주전자에, 전기담요에, mp3에, 휴대폰 충전기에. 회사에서 전기를 끊었습니다. 순식간에 작동을 멈추는 버릴 데도 없는 쓰레기들. 20년 민주노조운동은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쓰레기들을 늘려오는. 그런 것들을 늘리기 위해 비정규직도 버리고 장애인도 버리고 노점상도 버리고 농민도 버리고 여성도 버리고 다 버리고 그런 것들만 애먼글먼 끌어안고 아이들에게 그런 것들을 더 많이 물려주기 위해 잔업하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다 들어요. 그 삼양라면 박스가 관료주의의 싹은 아니었을까. 그때 그냥 맨바닥에서 버텼어야 했던 건 아닌가. 그랬다면 천막도 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장판도 깔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진짜 싸울 사람들만 남지 않았을까. 껍데기들은 가고. 아니 아예 오지도 않고. 교육은 있어도 학습은 없는 운동. 회의는 있어도 토론은 없는 운동. 전지전능한 몇 사람이 ‘방침’을 내오고 조합원들에겐 ‘지침’이 내려올 뿐입니다. 미래가 생산되는 공정 자체가 봉쇄돼 있습니다.

사람을 키우지 않으니 할 사람이 없고, 할 사람이 없으니 하던 사람이 또 합니다. 그렇게 우린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고 스스로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3년 전부터 역사가 거꾸로 갔느니 시간이 되돌아갔느니 말들이 많았습니다. 서는 자리마다 전선이고 발 닿는 곳마다 전쟁터이고 쓰는 글마다 추모사인 일상이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을 따름이라 사실은 별 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십 몇 년 피 터져가며 살았던 게 아주 헛산 건 아니었다는 희미한 흔적은 남았습니다.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신청 10년 만에 느닷없이 내려준 명예회복과 부당해고 결정. 해고된 지 24년, 출감한 지 21년만입니다. 그게 작년 11월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 이상의 기쁨이 닥치면 실감이 별로 안 나는 모양입니다.




출근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아닙니다. 쌍용차투쟁을 ‘보고’ 나선 투쟁이란 말 함부로 쓰면 안되겠습니다. 출근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혼자. 맨몸으로. 다시. 시작하자. 다른 건 진심이었지만 ‘혼자’는 영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진심이 아닌 바람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 첫날,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해고예고를 받아놓은 하청활동가가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열 명 정도가 함께 나와 같이 뿌리고 있었습니다. 홀홀단신인 제 눈에는 그 열 명이 무적의 강철대오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다 뿌리고 가는데 제 유인물은 거의 그대로 남았습니다. 하필이면 비가 내렸습니다. 비에 젖은 유인물은 참 무거웠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박성호 동지가 옆에 서주었습니다. 박창수 위원장, 김주익 지회장, 곽재규 동지를 제 손으로 묻으며 쌓은 장례 내공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라 이 친구 없이는 열사들 장례 못 치릅니다. 장례전문가를 배출해 낸 한진노조의 역사. “그러다 짤리면 어쩔라구. 낼부터 나오지 마.” 입안에서 뱅뱅 도는 그 말을 아직도 못했습니다. 3일 정도 지나자 경비들이 노조 출입을 막았습니다. “조합원이 노조에 가는데 왜 막노”라는 제 항의에 그들은 신기하게도 24년 전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요.” 세월은 영락없는 그 세월인데 저만 중늙은이가 되어 그 세월 앞에 홀로 마주섰습니다. 과거가 지속되는 걸 인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하지도 못한 저는 과거로부터도 미래로부터도 고립됐습니다.

07시. 신관 앞에 피켓을 들고 서면 아직 어둡습니다.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근버스는 그 시간이면 들어옵니다. 24년 간 공장을 지켜오면서 위원장의 장례를 두 번이나 치르고 동료의 장례마저 치러야 했던 기가 막힌 아저씨들이 그 통근버스에서 내립니다. 정리해고 방침이 발표되면서 아저씨들의 불안한 눈빛이 제 눈엔 보입니다. 열에 여덟은 하청노동자들입니다. 정규직이었다가 하청이 된 아저씨들도 많습니다. 이미 하청노동자들은 1000명 가까이 잘려 식당이 헐빈하고 통근버스가 텅텅 비었다는 소문이 괴담처럼 떠돕니다. 마산에서 오는 통근버스에는 네 명이 내립니다. 출근시위를 처음 시작했던 50여일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눈에 띌 만큼 숫자가 줄었습니다. 그 아저씨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쌍용차 동지들, 하이닉스 동지들, 콜텍 동지들, 기륭동지들, KTX 동지들, 이랜드 동지들. 그 외에 이름을 들먹이는 데만도 A4 용지 세 바닥이 훌쩍 넘어 갈, 정리해고 투쟁을 하면서 제가 만났던 수많은 동지들. 죄송합니다. 다 아는 것처럼, 다 겪은 것처럼 세치 혓바닥을 놀렸지만 사실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그것 또한 저한텐 일상이었으니까. “차라리 죽여라.” “해고는 살인이다.” 이런 구호 솔직히 너무 적나라하다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 텐트 입구엔 “해고는 연쇄살인이다”가 붙어있습니다. 누군가 피 묻은 손으로 심장을 꺼내 징 박힌 신발로 자근자근 밟으면 이렇게 아플까요. 어디로 사라지는 지 알 수도 없고 어느 날부턴가는 훌쩍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아저씨들. 그걸 아침마다 확인하는 일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현장에 돌아가 아저씨들은 족구하고 저는 심판보고, 햇볕 따신 날은 선각공장 앞에 안전화 벗고 언 발을 나란히 내놓고 녹이는 꿈을 단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한번 목구멍에 쇳가루 먼지 벗겨내는 날. 강 씨 아저씨의 그 구성진 노랫가락을 다시 들어보는 일을 단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습니다. “숙에이~” 부르시던 허 씨 아저씨의 목소리를 꿈에서도 듣곤 했습니다. 제가 철판에 두 다리가 깔려 병원에 오래도록 입원해 있을 때 번갈아 죽을 끓여 주전자에 담아오시던 아저씨들. 미안해 어쩔 줄 모르던 제게 “낸쥬 씨븐 쏘주나 한잔 받아주라이” 하시던 그 약속이 술 광고만 봐도 생각이 났습니다. 눈알에 박힌 용접불똥을 종이를 뾰족하게 접어 빼내는 방법을 일러주시던 아저씨들. 좁은 탱크 안에 들어갈 땐 발을 밀어 넣고 동시에 어깨를 같이 넣어야 쏙 빠진다는 걸 알려주시던 김 씨 아저씨. 사다리가 없는 블록에 오를 땐 두 팔로 철판을 짚고 동시에 몸을 띄워야 한다는 걸 시범과 함께 보여주시던 박 씨 아저씨. 그때 제겐 무엇보다 절실했던 생존의 정보들이었습니다. 버스안내양 시절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릴 땐 오른발이 먼저 땅에 닿아야 바퀴 밑에 안 깔린다는 정보만큼이나.

2003년도에 강 씨 아저씨, 허 씨 아저씨가 잘렸습니다. 김 씨 아저씨, 박 씨 아저씨마저 자르겠다는 이때.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동원’할 조직도 없고 ‘지침’을 내릴 권력도 없는 제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조합원들을 지키겠다고 싸우다 같은 날 두 명의 장례를 함께 치른 게 6년 전인데, 더 크고 더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저들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요. 명단 발표되면 끝인데, 그러고 나면 우리끼리 싸우고, 죽고, 열사정신 계승하자고 결의를 ‘내오고’, 장례 치르고, 울고불고, 추모사 쓰고. 쌍차에서 6명이 죽은 게 언제라고.

요즘은 뉴스도 안 보고 인터넷도 못하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입을 댈 기력도 없구요. 저는 국민파도 아니고 벽제파도 아니고 중앙파도 아니고 현장파도 아니니 잘 아는 후보도 없습니다. 다만, 대장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현장은 무너지는 걸까요.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린 번번이 패배하는 걸까요. 민주노총이 왜 외면당하고 욕먹는지 우리만 모릅니다. 추한 소문일수록 당사자만 모르듯이. 욕하면 국민파의 음모라 하고 현장파의 작태라 하면 됩니다. 다 같이 욕먹을 땐 조중동의 악랄한 왜곡선전 때문이라고 하면 됩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욕이 배따고 들어오나 이런 말도 논리가 됩니다. 욕이 배따고 들어와야 치유가 된다는 걸 우리끼리만 모릅니다.

위원장선거에다 지자체선거까지 앞두고 있으니 후보들이 앞 다투어 ‘방문’하시겠지요. 이슈도 있고 표도 되는 사업장이니까. 다만, ‘발언’ 하려고 오진 마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간곡히. 발언 기회 확보되면 이 투쟁에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핏대 세우곤 또 다른 사업장으로 가시겠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가셔서 똑같은 ‘발언’을 하실테구요. 저도 그랬거든요.

어떤 위원장은 하루에만 목숨 세 번 거는 것도 봤습니다. 가는 데마다. 민주노총을 정말로 바로 세우고 싶다면 그리고 진심으로 비정규직의 현실이 아프다면 결의를 했던 그 자리에 눌러앉으세요. 그 자리에서 비정규직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잘리는지 눈으로 직접 보십시오. 자료는 그만 보시고. 정규직은 그나마 싸울 조직이라도 있고 연대할 상급단체라도 있습니다. 뉴스에라도 나오고 신문에 한 줄이라도 나옵니다. 비정규직들은 어쩌면 좋을까요. 한진에서만 1000명 가까이가 잘렸고, 소문으로 떠도는 앞으로 잘릴 4000명의 목숨들을 도대체 어째야 할까요. 그 답을 가져오시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후보님들을 추대했던 조직들과 함께 실천할 방안들을 다만 한 가지라도 마련해 오십시오.

한 시간에도 수 만대의 차가 골을 흔들고 생애를 흔들며 지나다니는 길가에 쳐놓은, 잠시도 쉬지 않고 펄럭이는 작은 텐트에 누워서야 비로소 51년의 삶과 그 절반을 차지하는 운동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난 어떻게 살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 삶을 꿈꾸다 여기까지 와서 혼자 누워있는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여기 혼자 누워 굶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길바닥에 나앉아 굶는 이것밖엔 할 게 없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그래도 거창한 꿈을 품었습니다. 민주노총이 당장 천막을 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단위노조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한진중공업 앞에서 태종대까지 천막이 늘어설 것이고 그럼 이길 것이다…사람이 안 죽고도 이길 것이다…. 김주익도 그런 마음으로 홀로 크레인위에 올랐겠지요. 엿새를 이러고 있어보니 김주익은 우리가 죽였습디다. 내가…. 그럼에도 저는 따뜻한 콩국 한 그릇이 너무 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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