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철희의 자연에 살어리랏다> 식물도 자원이다

이른 봄, 눈 속에서 꽃을 피워 변산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봄전령 ‘변산바람꽃’. 부안사람들에게는 그 이름부터가 반갑다. 변산에서 발견되어 ‘변산바람꽃’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 부안사람들은 횡재를 한 셈이다.


#미선나무

변산바람꽃은 어찌나 일찍부터 봄을 준비하는지 변산에서는 입춘 무렵이면 벌써 꽃소식을 전하기 시작한다. 엄동설한 꽁꽁 언 땅 속에서 실낱같이 가는 줄기가 차가운 대지 위로 훈김을 내며 10∼15㎝쯤 뻗어 올라와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리고는 1주일 정도면 져버리고 다른 꽃들이 피기도 전에 결실까지를 마무리해 버린다. 변산바람꽃은 이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환희에 찬 봄을 예고하지만, 그 만남은 너무 짧아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몇 해 전 우리나라의 특산물 변산바람꽃이 일본 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적이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깜짝 놀랐었다. 어떻게 이 여린 식물이 해외까지 반출된 것일까? 하긴, 개항과 더불어 서구인들이 제일 눈독을 들인 것은 우리의 토종 식물이다. 그들은 해외 여행길에 식물학자를 대동했을 정도로 자국 외의 토종 식물에 관심을 가지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종자를 빼돌렸다. 이들은 이미 식물도 귀한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예견했던 것이다.

‘미스김 라일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47년 미 군정청 소속 식물 채집가인 미러라는 사람이 북한산 기슭에서 한국 특산종인 ‘정향나무’의 종자를 채집해 간 뒤 품종 개량을 거쳐 1954년 ‘미스김 라일락`이라고 이름도 새로 지어 붙였다. 미국에서 관상용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단숨에 장악한 미스김 라일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역수입되고 있다.

국적이 바뀐 것은 미스김 라일락뿐만이 아니다. 세계녹색혁명을 불러 온 우리나라 토종 ‘앉은뱅이밀’이 그렇고, 미선나무도 미국과 영국, 일본 등지에서 조경수로 개발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또, 1910년 한라산에서 미국으로 반출된 구상나무는 키 작은 왜성나무 등으로 품종이 개량돼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이제 이들은 품종 개량 차원을 넘어 유전자를 조작하고, 살아있는 것들에도 특허를 주는 기이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초국적 기업인 몬산토는 수백 가지의 종자 특허권을 획득한 상태라고 한다. 이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종자가 다음 해에는 싹이 트지 않도록 유전자 조작하는 ‘터미네이터 기술’, 그리고 자사의 농약을 뒤집어써야만 싹이 트도록 하는 ‘트레이터 기술’을 개발해 전 세계를 상대로 종자전쟁을 벌이고 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야기다.


#이른 봄, 눈 속에서 꽃을 피워 변산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봄전령 ‘변산바람꽃’. 부안사람들에게는 그 이름부터가 반갑다. 변산에서 발견되어 ‘변산바람꽃’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 부안사람들은 횡재를 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종자의 보고’라고 자칭하지만 실속은 없어 보인다. 1990년대 중반까지 성장을 지속하던 우리 종묘산업은 IMF를 맞아 국내 대표적인 종묘사 4곳이 이들 나라에 넘어갔고, 한국 종자 시장의 70%를 이들이 점령하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식물도 자원이다’는 재인식이 요구된다. 적벽강 어디쯤의 벼랑에서 짭조름한 바닷바람 맞으며 옹색하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길섶의 풀 한 포기라도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오늘도 내변산 어느 양지바른 골짜기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이름 모를 식물이 약용이나 식량, 혹은 관상용 등의 자원으로서의 무한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 다양성의 보고 변산반도

변산반도는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한 내변산과 해안을 끼고 도는 외변산으로 나뉜다. 내변산은 의상봉을 주봉으로 우각봉, 남옥녀봉, 덕성봉, 관음봉, 쌍선봉, 망포대, 신선대, 갑남산 등이 겹겹이 이어지고, 봉래구곡, 가마소계곡, 지포계곡 등의 계류가 서해로 흐른다.

외변산은 해식단애가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터 잡은 채석강, 적벽강 등의 암석 해안, 고사포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월포, 두포, 모항 등지의 사구지대, 그리고 계화도, 대항리, 마포, 두포, 줄포만 등지에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어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생태적으로도 매우 특이한 공간이다.

먼저 육상의 생태 환경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서남해안, 전라북도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변산반도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온난다습한가 하면 내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 관계로 남방계 식물군과 북방계 식물군이 혼재되어 분포하고 있다. 문헌에 보이는 변산반도 자생 식물은 800~900종에 이른다. 허지만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1000종이 넘고, 위도까지를 포함한 부안 전체로 볼 때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종이 자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변산반도는 ‘종 다양성의 보고’이다.


#윗줄 왼쪽부터 후박나무, 꽝꽝나무, 미선나무, 미선나무 열매, 노랑붓꽃, 복수초, 변란(보춘화), 위도상사화, 붉노랑상사화, 가시연꽃, 꽃창포, 백작약, 땅나리,개족도리, 대흥란, 갯방풍, 쥐방울덩굴, 초종용, 옥녀꽃대, 자라풀


이러한 식물들 중에서 변산의 천연기념물 삼총사인 후박나무, 꽝꽝나무, 호랑가시나무는 따뜻한 제주도나 남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대성 식물인데 해안을 따라 변산반도까지 북상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충북 괴산에 자생하는 세계 1속 1종인 미선나무가 변산에도 자생한다. 변산의 미선나무 역시 천연기념물 제370호로 지정되었다.

그런가하면 변산바람꽃이 있고, 봄이면 변산의 골골마다를 노랗게 물들이는 세계적인 희귀종 노랑붓꽃이 있다. 또 세계에서 유일하게 위도에서만 자라는 위도상사화가 있고, 예부터 3변(邊) 중의 하나로 변산 사람들의 사랑을 흠뻑 받아 온 변란(邊蘭, 보춘화)은 지천으로 자란다.

그 외에도 대흥란, 땅나리, 꽃창포, 쥐방울덩굴, 백작약, 개족도리, 관중, 가시연꽃, 갯방풍, 초종용, 고려엉겅퀴, 붉노랑상사화, 병꽃나무, 옥녀꽃대, 정금나무, 모감주나무 등 환경부의 보호대상종, 국외 반출 승인 대상종,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 등이 분포한다. 이중에서 붉노랑상사화는 내소사 주변, 새재, 봉래계곡, 가마소계곡 등지에 무리지어 자생하고, 개족도리는 변산 골짜기마다 밭을 이루다시피 넓게 분포한다.

호랑이등긁기나무

이러한 식물자원 중에 호랑가시나무는 변산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부안의 공원이나 학교, 관청, 교회, 웬만한 집 정원에서 잘 가꿔진 호랑가시나무 한두 그루는 쉽게 볼 수 있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 이 나무의 북방한계선이 바로 변산반도이다. 그런 이유로 변산의 호랑가시나무는 1962년에 천연기념물 제122호(군락지: 변산면 도청리 모항)로 지정되었다.




상록의 이 나무는 키가 2∼3m까지 자라며 겉가지가 많다. 잎의 길이는 3∼5cm 정도이며 타원형 육각형으로 매끈하니 광택이 난다. 잎의 각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나있는데, 호랑이 발톱처럼 무섭게 생겨 ‘호랑범 발톱’이라고도 한다. 또한 변산에서는 ‘호랑이등긁기나무’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지리산 호랑이가 변산에 와서 이 나무에 가려운 등을 긁고 갔다고 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우유 빛이 도는 꽃은 4~5월에 피며 향기가 좋아 많은 벌, 나비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직경 5∼6mm 정도 크기의 푸른 열매를 맺어 9~10월에 붉게 익는데 이듬해 3월경까지도 선명한 채로 남아 있다. 진초록의 잎, 붉은 열매가 눈을 이고 있는 설경을 상상해 보시라. 이 나무는 은행나무처럼 자웅이주(암수가 따로 있는 나무)의 나무이기 때문에 암그루와 수그루가 만나기 전에는 열매를 못 맺는다. 기왕지사 이 나무의 붉은 열매를 감상하기 위해 심는다면 이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호랑가시나무하면 크리스마스가 먼저 떠올려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호랑가시나무 가지로 둥글게 다발을 만들어 현관 입구나 실내에 걸어 놓는다거나 크리스마스카드에 실버벨과 함께 이 나무의 잎과 열매가 디자인된다. 이처럼 호랑가시나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나무이다. 날카로운 가시가 나 있는 호랑가시나무 잎은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머리에 쓴 가시관 즉 예수의 고난을, 호랑가시나무의 붉은 열매는 가시에 찔려 흐르는 핏방울 즉 예수의 보혈을 상징한다. 이 외에도 우유 빛의 꽃은 예수의 탄생을, 나무껍질의 쓰디쓴 맛은 예수의 수난을 의미한다고 한다.

호랑가시나무를 영어로 ‘holly’라고 한다. 그래서 유럽의 호랑가시나무는 ‘English holly`, 미국의 호랑가시나무는 ‘American holly’, 우리나라 호랑가시나무는 ‘Chinese holly’라고 하는데 이 나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술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호랑가시나무의 가시를 악마가 무서워한다고 하여 마구간이나 집 주변에 걸어두면 병마가 물러간다고 여겼으며, 영국에서는 이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니면 사나운 맹수나 미친개를 멀리할 수 있고, 위험한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호랑가시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값비싸게 매매되었다고 한다.


#호랑가시나무(천연기념물 제122호)


우리나라는 2월 영등날이나 유행병이 심하게 돌 때 정어리의 머리에 이 나무를 꿰어 문지방에 걸어 놓고 액운을 쫓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귀신에게 너도 잘못 들어오면 정어리처럼 눈이 가시에 꿰인다는 경고이리라. 가시가 사납게 난 음나무 가지를 문지방에 걸어 놓고 잡귀를 쫓는 호남 지방의 풍습과 유사하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음력 새해 축제 때 사원과 공회당 장식에 이용해 액막이 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호랑가시나무는 약재로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호랑가시나무는 묘아자(猫兒刺), 구골목(狗骨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묘아자는 가시가 나 있는 이 나무의 잎이 고양이 발톱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고, 구골목은 나무줄기가 개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이 나무는 골절, 골다공증, 류머티스 관절염 등 뼈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신장과 간장을 튼튼하게 하고 기(氣)와 혈(血)을 보해주며 풍(風)과 습(濕)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골프장 대신 식물원을…

변산이 속한 부안군은 지난 해 변산반도의 노른자 땅인 변산면 마포리, 도청리 일대에 18홀 규모의 골프장을 조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부안은 새만금사업으로 인해 3분의 1에 가까운 해안선을 잃었다. 해창산, 배메산, 석불산 등은 새만금방조제에 제 살점 다 내주고 흉한 몰골로 서 있다. 이 중에서 해창산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계화산 등 나머지 산들도 새만금 내부개발에 언제 제 살점 뜯길지 몰라 떨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골프장을 조성하겠다니, 이래저래 변산반도는 생채기 투성이가 될 운명에 놓여 있다.

물론 ‘골프장이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이지만, 지역 경제 발전을 어느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런데 환경 파괴는 차치하고라도 가진 자들 몇몇이 골프채 휘두르고 간다고 해서 지역 경제가 살아나느냐는 것이다. 골프장 과잉으로 적자 운영에 처한 곳이 많다는 점을 이 사업의 기획자들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바디재에서 본 변산의 아침, 들독거리는 운해에 잠겨있고, 멀리로는 변산 제일봉인 의상봉이 서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변산반도는 북방계 식물의 남방한계선이자 남방계 식물의 북방한계선으로 식물 자원의 보고이다. 뿐만 아니라 해양 생태계 또한 종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곳으로 골프장 예정지에서 불과 10여km 동선에 대항리, 마포, 궁항, 두포, 모항, 줄포만으로 이어지는 갯벌이 아직 건강한 채로 남아 있다. 전국적으로 볼 때 육상 생태계와 갯벌 생태계가 이처럼 잘 연계된 곳은 흔치 않다.

이러한 변산반도 만의 생태적 특성을 살려 골프장 대신 식물원을 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철새 한 마리, 들꽃 한 송이를 보기 위해 수백 킬로의 거리도 마다않고 찾아 나서는 시대이다. 한 곳에서 육상 생태계와 해양 생태계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곳이라면 찾는 이들은 더 많을 것이다. 더욱이나 꽃이라고는 없는 무채색의 계절, 특히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여행 시즌에 해넘이가 아름다운 겨울바다와 호랑가시나무 열매로 붉디붉게 채색된 변산은 더욱 매혹적일 것이다.

<허철희님은 자연생태활동가로 `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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