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술 그리고 아세트알데히드

아세트알데히드(CH3CHO).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 올 것만 같은 이 화학물질의 이름은, 나의 절친한 친구들에겐, 여느 다른 화학식과는 달리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친구들은 화학에는 재능도, 흥미도 없는 평범한 문과생이다. 반면 난 문과생 주제에 사회탐구보다 과학에 훨씬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과학 성적도 꽤나 좋은 편이라 1학년 때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내가 당연히 이과로 진학할 것이라 생각했단다. 2학년 때 문과 반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이 내게 ‘넌 여기 왜있냐’고 물어 올 정도였으니까.

사회탐구 점수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단순암기를 못한다는 것은 내게 큰 약점이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적으로 암기를 잘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내 사회과 성적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3학년으로 진학하여 형편없었던 성적의 근현대사와는 이별을 고하고 사회문화, 한국지리와 만나게 되었다. 한국지리 선생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셔서 그런지 수업시간에도(좀 졸긴 했지만)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사회문화는 암기보다는 이해 위주라 그런지 정말 쉬웠다.

무엇보다 3학년 때는 과학을 공부했다. 어떤 문과생도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내신 관리를 위해 버릴 수도,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공부하여 시험만 치르는 정도로 준비하고 마는 실정이었다. 과학 선생님들께서도 이를 알고 계시기에, 문과에서의 과학시험은 교양시험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도, 나는 과학을 배우는 것이 너무 좋았다. 3학년 때의 내신 성적은 2학년 때만큼의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쭉쭉 올라갔다. 성적 향상으로 자습실을 월반하고(성적에 따라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 차등적으로 자습실이 정해졌다) 못하는 과목을 붙잡고 있느라 생기는 압박도 없어지니, 나의 고3시절은 생각보다 그렇게 무리 없이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과학이 싫어 문과에 온 건데 이놈의 과학은 끈질기게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며 하소연하던 친구도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쓸데없는 과학’ 과목에 이렇게도 시간투자를 해야 하냐며 짜증을 냈고, 그 중 일부는 공부를 해도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난 문과 과학수업이 본격적이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오히려 조금 아쉬워하고 있었지만, 대세가 이런지라 차마 입 밖으로 내질 못했다.

어쨌거나 나는 수업시간과 시험기간 중 몇 시간만 투자하면 월등하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눈치를 주는 이도 없었지만 괜히 혼자 입단속을 하곤 했다. 열심히 노력한 나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는데,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좋은 성적을 받는 아이들이 이유 없이 얼마나 얄미운지 2학년 때의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문과 과학 수업의 단점을 열거하는 나의 친구들에게 과학을 배워서 너무 좋다는 둥의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을 때, 친했던 몇몇과 만났다. 뽀송뽀송한 새내기인 주제에 이젠 더 이상 고등학생, 어린애가 아니라며 우린 당연하다는 듯 술집으로 갔다. 그런 치기어린 마음에서 기인한 건지 술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속도가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빨랐다. 주량으로 그렇게 곤란을 겪어 본 적이 없던 나기에 속도에 제지를 가할 생각조차 않고 깔깔대며 잘도 놀았던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놀았을까, 우린 모두 과하게 취했다. 엄마의 계속되는 호출에 집에 돌아가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술자리에서는 눈곱만큼도 취한 티를 안내던 내가 택시에서 급작스럽게 정신줄을 놓고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단다. 집에 와서 무슨 술을 이렇게 먹었냐며 술 취한 정신에도 꿇어앉아 한바탕 혼구멍이 난 후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어머니의 해장국으로 달래며 한 번 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전날 택시를 타고부터의 기억이 흐릿했다.

그리고 며칠 전, 실로 오랜만에 그때의 친구들을 만났다. 이젠 우리도 몸 생각할 나이라며 하하 웃으며 술집 대신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친구의 자취집에 모였다. 아까 했던 농담이 무색하게 자취방에 놀러갈 땐 역시 술이 빠지면 안 된다며 양손에 짤그랑 짤그랑대며 말이다. 한 두 잔 마셨을까, 술을 조금만 마셔도 유독 얼굴이 붉어지는 친구를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문득 생각이 나서,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은 술 해독능력이 떨어진다는 거라던데…”하고 말했다. 책에서 봤던가. 알코올이 흡수되면 간에서 분해되어 아세트알데히드가 된다. 아세트알데히드는 독소다. 숙취의 원인도 바로 이놈. 이 독성물질을 파괴하기 위해 간에서 분해효소를 만들어 낸다. 아세트알데히드는 이 효소에 의해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된다. 몸이 이놈을 빨리 분해하질 못하면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돌게 되는 것이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란 아세트알데히드를 빨리 분해하는 사람이다. 얼굴이 쉽게 붉어지고 빨리 취하는 사람들은 이런 분해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면 된다.

천상 문과인 이 여자들에게 이런 복잡한 소리를 지껄인다면 이들의 괴로운 표정과 다운된 분위기를 수습해야 할 터였다. 이런 이야기는 나 같은 괴짜 문과생에게나 흥미로운 내용일 테니까. 그래서 자체 심의상 짜증날만한 이야기는 다 편집하고 이야기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 또 그 얘기야?”라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응? 내가 전에도 이런 얘기를 했던가?

“그 왜 아세트알데히든가 뭔가. 니가 전에 열을 내면서 설명했잖아.”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세트알데히드의 이름은 나를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걸 내가 이들에게 열을 내면서 설명하다니?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설명한다고 좋아할 리도 없을 텐데? 이마에 주렁주렁 매단 물음표들 중 하나를 입 밖으로 꺼냈다.

“내가 언제?”

“왜 그때 1학년 막 되었을 때, 우리 막 술 엄청 마신 날 있잖아.”

내 기억에서 흐릿해져버린 그 택시 안에서 그랬단다. 얼굴 색 조차 변하지 않고 말투나 행동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아서 취한 줄은 몰랐는데, 자기들한테 그런 ‘이상한 것’을 열 내면서 설명하기에 ‘아, 얘 혹시 취했나’ 했단다.

내친 김에 콩나물에 들어 있는 아스파라긴산이 숙취해소에 좋은 이유도 설명했단다. 정말 듣기 싫었지만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마치 지금까지 참았다는 듯 쉴 새 없이 그런 이야기들을 설명해 줬다고 한다.

아마 술 때문에 내 자체 심의 시스템이 일시 정지 되었었나보다. 내 기억에 없는 나의 행태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그것도 그런 추태(?)를…머리가 띵~해왔다.

그렇지만 마치 남의 얘기를 듣는 듯 계속 듣고 있자니 택시 안에서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던 박 강사의 모습이 너무 웃겼다. 곤란한 듯 짜증나는 얘기를 계속 듣고 있었을 친구들의 표정이 그림 그리듯 상상이 되었다.

“진짜, 내가 화학을 젤 싫어하는데도 아세트알데히드는 아직도 못 잊는 거 봐라. 완전 지긋지긋하게 들었어.”

모두 깔깔 거리면서 웃었다.

부끄럽지만 왠지 사뭇 유쾌하여 나도 함께 웃었다.

“니들이 얼마나 무지하면 내가 술 먹고 그런 주사를 부리겠냐.ㅋㅋ”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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