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만남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편지라는 것을 썼다. 게다가 남자친구에게 쓰는 편지. 친구들이 들으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신영이 네가?’하며 반문해 올 지도. 친구들은 날 더러 ‘시크(쿨하고 냉소적인)’하다고 한다.

여자들이 모이면 대화의 꽃은 주로 남자친구, 혹은 심남이(=관심남. 아직 연인사이는 아니나 호감과 관심이 가는 남자) 이야기이다. 얘기는 듣지만 내 얘기는 그다지 하지 않는 내 태도 때문에 친구들이 시크하네 뭐네 하는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팜므파탈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니, 오해를 사도 단단히 샀다.

편지를 쓰는 박신영을 친구들이 알게 되면 내 오명도 한 방에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좀 아닐 것 같다. 내가 쓴 편지가, 구절구절 사랑이 묻어나는 러브레터가 아닌 까닭이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것도 내 생각보다 급작스럽게. 이런 뉘앙스로 우리 이야길 적고 있는 걸 오빠가 알게 된다면 매우 억울해 할 것이 틀림없다. 난 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 두자는 말은 내 입에서 나왔다. 우리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느니 하는 이야기는 오빠와 나만의 문제이고, 밝혀둘 것은 내가 그만두자는 말을 하는 그때, 내 태도가 분명 그렇게 훌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발적으로, 혹은 어떤 여인들처럼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따위의 이유로 입에 담기에 이별은 너무도 무거운 말이다.

나로 인해 급작스럽게 맞이하게 된 이별은 그런 의미로 급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생각했던 일이고 내 속에서는 이미 확정된 일이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이별의 일시보다 훨씬 이르게 찾아왔을 뿐이다. 내 예상과는 달리 그것은 너무 빨리 도마 위로 올라왔다. 훌륭하지 못했다는 나의 태도란, 이것을 오빠에게 납득시키려 하지 않고 그냥 끝맺으려 했던 것이다. 오빠는 그야말로 ‘기가 막혀’ 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라던가. 내가 워낙 철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가장 가까웠던 사이였다가 그저 얼굴만 아는 지인보다 못하게 되는 건 항상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내 아는 어떤 분은 누굴 만나고 사귀든 결혼하지 못하면 그건 실패한 연애라고 말했다. 그분과 열 올리면서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그를 떠올릴 때의 나의 기분이 어떤가에 따라서 그게 성공 ‘했던’ 연애일 수도 있는 거고 실패 ‘했던’ 연애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게 내 생각이다.

옛일임에도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사람이라던가,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다문 입술에서 미소가 삐져나오게 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했던 것이 분명하다. 실패했던 연애는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사람을 대체 왜 만났지 하는 후회감과 일말의 분노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면, 아마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내 말에 그분은 ‘네가 어려서 모른다’고 하셨지만. 어린 나보다 3년 더 오래 사신 그 분께서는 그 3년 동안 뭔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는가 보다 하며 별 소득 없이 화제를 돌렸었다.

그분과 그런 이야기를 한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난 12개월을 더 살았지만 아직까지 내 생각은 큰 변화가 없다. 눈곱만큼도 성장을 안 한 걸 수도.

게다가 심지어 나의 이런 생각은 한 층 더 굳어졌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진다.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다.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진다. 감히 세 살 어린 내가 한마디 하자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인데, 헤어지면 실패라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인다. 누굴 어떻게 만나느냐, 그리고 얼마나 그 만남을 지속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평생 그 만남을 지속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생의 많은 가치 있는 만남들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떤 이가 내게 다가와 보배가 되어준다면, 그와 헤어지고도 내 맘에 그 보배는 남겨두어야 한다. 가끔 그 영롱한 빛에 심신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 많은 보배들을 지닌 사람은, 사람이 보배인 줄을 안다.

그래서 나는 만남만큼 이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인 사이라는 것은 우정보다 더 미묘한 것 같아, 헤어지고 나면 다시 만나기가 어려워진다. 일종의 불문율이다. 헤어진 전 연인을 다시 만나거나, 만나길 바라는 건 미련이 남았다는 뜻 밖에 안 된다.

사람은 보내도 만남을 남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멀리 떨어진 친구마냥, 먼저 졸업한 선배마냥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헤어져도 실패가 아니라는 내 주장이 그 분의 눈에 어린 얘기로 들렸던 걸지도.

그렇지만, 아주 못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이 더 중요한 거다. 그 순간이 끔찍해진다면 정말로 실패했던 연애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까지 철도 없고 마냥 이기적이라 남을 배려하는 것도 서툴고 뭔가 뚜렷하게 아는 것도 없는 내가 오빠와의 이별을 너무 끔찍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난 일로 편지를 쓰는 게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오빠에게 내가 실패한 사람이고 싶진 않아 펜을 들게 되었다. 꽤나 장문의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보냈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그렇지만 말하지 않았던, 입 밖으로 내어 우리 관계에 좋을 게 없던 생각과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사정들을 다 전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마무리했다. 편지라는 게 말과 달라서 한번 읽는다고 그게 흩어져 버리질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우려를 감수하고 쓰는 것이었다.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굉장히 화가 났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해하게 되었다고. 원수지간으로 마무리 짓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다. 성공한 연애이길 바란다. 나에게도 오빠에게도. 더는 연인사이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겐 보배로운 사람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설 연휴 직후에 쓴 글인데 게재가 다소 늦어진 점 독자님들의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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