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일기 쓰기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때, 개학날이 다가오면 그동안 미뤄왔던 방학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가족의 인력을 동원하곤 했었다. 어머니는 그러게 미리미리 해둘 것이지 하며 나무라 시면서도 숙제를 도와주시곤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도움도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는 걱정덩어리가 바로 일기였다. 하루하루 미룬 것들이 모여 한 달 치가 되어있는 걸 보면서, 도대체 이런 숙제는 왜 내는 건지, 대체 학교는 내 하루하루를 왜 감시하고 싶어 하는 거냐며 툴툴 거리곤 했었다. 개학날 모인 급우들의 일기장은 같은 날짜임에도 날씨가 다 제각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아이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나보다.

내 어린 시절의 일기는 그저 ‘숙제’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참 잘했어요’는 내 일기가 내 사생활이 아님을 반증하는 또렷한 낙인이었다. 심지어, 선생님과 나 둘 사이의 공유만도 아니었던 것이 제출된 일기장은 선생님의 책상위에 가득 쌓여있어서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들춰 보기도 했었다.

하루는 전날 성교육을 받았던 것에 대한 내 의문과 느낌 따위를 적어놓았다가 짓궂은 한 남자아이로부터 ‘변태’라고 놀림 받기도 했었다. 친한 친구가 같은 반 누구를 좋아한다는 내용을 적었다가 본의 아니게 소문의 근원지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적어가지 않으면 선생님의 사랑의 매로 손바닥이 얼얼해졌으니 누가 읽더라도 무방한 것으로 칸만 채워 가는 게 전부였다. 그저 번거로운 숙제일 뿐 뭔가 그로써 얻는 게 있긴 했었는지도 조금 의문스럽다.

그랬던 내가 다시 일기를 쓰게 된 것은 수능이 끝나고 부터였다. 실은 고등학교 때 쓰던 스터디 플래너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한번 붙은 습관은 쉽게 안 없어지고, 뭔가 기록은 해야 할 것 같고 해서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의 일기장은 무엇을 했다, 뭘 해야 한다로 그저 나열되어있는 목록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조금씩 사사로운 느낌도 적게 되고, 양도 조금씩 늘어나서 지금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억지로 썼던 일기와 지금 쓰고 있는 일기가 절대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도 의무적으로 쓰고 있단 느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늦은 시간에 귀가 했을 때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기를 써야할 때는 정말 너무 귀찮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좋아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위사람들과 귀차니스트 랭킹을 매긴다면 모르긴 몰라도 상위권에 랭크되어있을 게 분명한 나로서는 사서 이런 귀찮은 기록을 계속해 나간다는 게 스스로도 매우 놀랍다. 바꾸어 말하면, 일기를 쓰는데 어떠한 메리트가 없다면 내가 절대로 이 짓을 계속하고 있진 않을 거란 얘기다.

일기를 쓰면서 느끼는 점이지만, 확실히 ‘생각을 정리한다’는 행동은 나를 다잡아준다. 머릿속에 들어있을 때는 구름처럼 뭉실뭉실했던 내 생각들이 펜을 통해 잘 정제된 한 컵의 물이 된다. 그저 막연히 ‘내가 잘하고 있는 거겠지’라고 생각해도 불안감이 쉽게 가시지 않아 주저하고 주저하다가도 일기에 난 잘하고 있는 거다 라고 쓰고 온점을 하나 찍는 순간 다 잘 될 것 같고, 또 잘 되게 만들리라는 용기가 솟는다.

매일 쓸모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남들은 다 저어만큼 앞서나가고 있는데 나 혼자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남들과 날 비교하게 되고, 또 그만큼 침울해져 그나마 있던 자신감마저 기화해 버릴 때. 그럴 때 지금껏 하루하루 쌓아온 내 일상의 기록들이 날 바르게 세워준다.

내 일기는 내 과거니까, 당연히 거기에도 남들이 가지고 있는 빛나는 스펙 따위는 존재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엔 내 나름의 치열함이 있다.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내’ 생각들이 적혀있다.

그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걸로 또 무슨 조국을 빼앗긴 것 마냥 심각하게 굴었었구나 킥킥 웃기도 하고 스스로 힘내자고 파이팅을 외쳐대는 모습에 옛날의 내가 지금의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려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내 하루하루는 절대로 쓸모없지 않은 모습이었다면서 내가 손수 적은 그 글씨들이 확실한 증거로 남겨져있다.




여기까지는 사실, 남들이 이야기하는 ‘일기의 장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생각이 때론 너무 다이내믹하기 때문에 적어두지 않으면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기의 사진을 찍는 건, 지금 이 시점의 내 아이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서다. 알게 모르게 아이는 하루하루 자라고 어느 샌가 옛날 사진을 보면 아 내 아이가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구나 체감한다.

이와 비슷하다. 심지어 ‘기억’은 아이의 성장과는 조금 달라서 140cm이었다가 150cm로 자라나는 게 아니다. 기억은 스스로 조작되고 변질되기도 한다.

기억의 조작. 영화 ‘메멘토’를 본적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기억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계속해서 조작된다.

앨리스라는 여성이 자신의 아버지를 성추행으로 고소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자신의 그 기억이 실제의 기억이 아닌 유년시절에 봤던 신문기사의 내용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어릴 적 앨리스는 그 기사를 통해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왜곡되어 실제로 그런 일을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 역시 어린 내 사진의 배경을 우리 집 마당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엄마로부터 그것이 친척집의 마당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한 적이 있다. 내 기억 속에는 그 사진을 찍기 전후의 기억이 있는데 어머니가 착각하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내 반박을 듣던 어머니께서는 친척집에서 찍은 다른 사진을 꺼내 보여주셨고 난 내 기억이 왜곡되었던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일기는 내 기억을 최대한 왜곡되지 않은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내 기억조차 믿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끔찍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 기억이 왜곡되지 않은 것이라고 확신하고 싶은 맘이 없을 순 없다.

때때로 지난 일기를 보면서 놀랄 때가 있다. 난 지금까지 계속 이러저러하게 생각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때나, 심지어는 내 생각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적도 있다. 켜켜이 쌓인 내 하루하루의 지층에서 내 스스로의 기억화석을 발굴할 때 나는 오싹해져 옴과 동시에 일기를 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는 귀찮지만 포기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일기에 대해 안 좋은 기억-예를 들자면 은사님의 애정이 담뿍 담긴 쇠자의 물리력-이 있는 사람들도 일기를 쓰는 버릇을 들이면 분명 일기쓰기의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설 연휴 직후에 쓴 글인데 게재가 다소 늦어진 점 독자님들의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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