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길 이야기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내가 초등학교 때 유행했던 지오디(G.O.D)의 노래 ‘길’이다. 물어봤더니 내가 가르치는 중학생 아이는 이 노래를 알지도 못한다. 녀석이 ‘선생님, 세대 차이 나요’ 하며 키들키들 웃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얼마나 오래된 노래인지 가늠해 본다. 2001년에 발매되었으니 까마득한 옛날이다. 내가 알고 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당연히 다들 알거라 생각해 버렸나보다.

어쨌거나, 뜬금없이 입에 붙은 이 노래가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새어나가는 며칠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는 몰랐는데, 가사가 제법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지 않은가. 후크송이 난무하는 요즘에는 오히려 이렇게 묵은 노래가 신선하기도 하다. 꽤 좋은 노래인데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좀 아쉽다.

지나간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나는 루이스 캐럴의 그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특유의 정신없는, 그야말로 ‘이상한’ 세계도 독특하고 창의적인 캐릭터도, 논리 없는 말장난들도 굉장히 좋다.

괴상하고 두서없는 그의 이야기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이다. 따뜻하고 몽실몽실한 꿈은 못되지만, 그렇다고 악몽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그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절로 유쾌해져 버린다.

지금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팀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역시 꽤 재미있게 봤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영화지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다소 불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 원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나는 내 취향이 조금은 마이너였다는 사실 보다, 내 생각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유명한, 그리고 심지어 어렵지도 않은 소설을 읽지 않았음에 놀랐다.

어쨌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 속에는 ‘체셔 고양이’가 등장한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체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실은 이 유명한 이야기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설명을 좀 더 붙이자면, 체셔 고양이는 항상 히죽히죽 웃고 있는 고양이로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뜬금없이 나타나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고양이답게 이상한 고양이다.

갑자기 지오디의 노래를 이야기 하다 말고 앨리스니 체셔 고양이니 떠든 것도 사실 이 둘에 묘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오디의 노래는 내 인생의 ‘길’이 과연 바른 길인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누구나 하는 고민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진 지나온 길들을 보면서 ‘내가 과연 옳은가’, ‘이대로도 괜찮은가’를 갈등한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사람도, 심지어는 남들이 봤을 땐 지극히 평범하고 안정된 길을 걷는 것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안타까운 일은 누구도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적으로 내 길은 내가 결정해야 하고 또한 그 책임도 내가 짊어져야한다.

그러나, 체셔 고양이는 길을 잃은 앨리스의 질문에 대답해준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고양이답게 절대 친절하지도, 그리고 쓸모 있지도 않은 대답이다.




“이제부터 내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좀 가르쳐주겠니?” 앨리스가 물었다.

“그건 전적으로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고양이가 대답했다.

“난 어디든 괜찮은데….” 앨리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길로 가든 상관없어.” 고양이가 말했다.

“어디든 다다르기만 한다면….” 앨리스가 설명하듯 덧붙였다.

“물론, 그럴 수 있고말고, 닿을 때까지 걷기만 한다면….” 고양이가 대답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어느 길이든 도착하기 마련이니 네가 가고 싶은 길로 가면 될 뿐이라는 고양이의 대답은 길을 잃고 목적지조차 없는 앨리스에게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사실 이 이상으로 실질적 도움이 되는 대답도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수능을 치는 그 순간까지 전국 각지의 나와 같은 학년들은 수치화된 점수로 순위가 매겨져서 일렬로 쭉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 기다란 한 줄의 몇 번째인지, 그것으로 평가되고 재어졌다. 내 주위 친구가 두 걸음 나아가면 나는 그의 두 걸음만큼 순위에서 밀려버리고,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다가는 그 행렬에서 끝을 향해 쭉쭉 떨어져버린다.

간혹 그 행렬을 박차고 나가는 친구들은, ‘문제아’라고 낙인찍히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기에 힘들더라도 그 라인 안에서 눈치를 기르며 한 걸음이라도 더 앞서는데 열중하는 것이 바로 우리, ‘수험생’의 미덕이었다.

그러한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지금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지루하고 끔찍했던 레이스가 대입이라는 관문 앞에서 그 끝을 맞이하고, 새로운 레이스 선상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레이스 역시 지금까지처럼 한 줄 달리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갈고 닦은 ‘눈치’의 미덕을 십분 발휘해, 남들이 앞선 두 걸음에 절망에 빠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누구는 자격증이 몇 개라는데, 누구는 어디에 유학을 다녀왔다는데 나는 뭔가!

어느 순간, 내가 견제하던 타인들이 달리는 레이스라인이, 내가 달리는 레이스 라인과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저마다 자신의 길을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길을 내가 정한다는 것은 자의를 배제하고 정해진 레이스라인을 따라 달리는, 그저 ‘속도’만이 평가요소였을 때 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마치 이상한 나라에서 길을 잃은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현명한 고양이의 대답은 역시, “어느 길이든 상관없어”다. 다행이지 않은가. 자칫 혼란에 빠져버릴 수도 있었는데….

내 고민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대답까지, 이렇게 중요한 이야길 내게 해준 것이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대중가요와 괴상한 소설이라니.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 지나간 노래나 쓸모없어 보이는 동화 따위를 눈여겨보는 게 절대 손해 보는 짓이 아닌 것이다.

모든 길은 사실 다 옳다.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전전 긍긍하지 말자. 실패한 인생조차도 정말 실패한 인생은 없으니까.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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