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돈 이야기

학원 수강료를 내고 나니 형편없는 통장잔고의 소유자가 되고 말았다. 대체 그간 모아둔 돈들은 어디로 야금야금 증발해 버린 건지! 어쩔 수 없이 긴축재정모드로 돌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 수강료를 부탁하기엔 내가 다니려는 학원의 성격이 묘한 탓이었다.

평상시에도 너무나 배워보고 싶던 칵테일 주조. 그렇지만 이런 것을 배운다고 하면, 공부나 하라는 꾸지람이 돌아올 것 같아 차마 부모님께는 이런 학원을 다닐 예정이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도저히 포기할 수도 없어서, ‘박거지’가 되어버리더라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영영 배우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주간을 긴축재정 상태로 지냈다. 외식 횟수도 현저히 줄이고, 갖고 싶은 봄옷 앞에서 ‘아직 날씨가 추우니까’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발길을 돌리곤 했다.

대체 돈이 뭐기에! 모든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증권시장의 개미떼들이나, 노른자위 땅, 일주일을 버티는 힘이 되어주는 로또….

‘혹시나’ 내게도 일확천금의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심각한 사람은 심각한 대로 가벼운 사람은 가벼운 대로, 그 기회를 목을 빼고 기다린다.

대체 왜 사람들은 돈을 원할까. 그것도 ‘많은 돈’을? 아니 우선, 당장 나부터. 난 왜 돈이 좋은 걸까? 나도 돈이 좋다. 돈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당장 눈앞에 만 원짜리 하나 떨어져있다면 아니 주울 사람이 있겠느냔 말이다.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용돈 좀 부족해졌다고 당장 외식 횟수가 줄어들어버리는데, 더 말해 무엇 하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면 돈이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안 하면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오늘도 늦게까지 퇴근도 못하시고 일을 한다. 나의 아버지의 지친 안색이 돈의 무게를 반증한다. 그 어마어마한 중력 아래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부자’를 꿈꾸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연봉이 얼마인가에 상관없이 ‘모두’ 부자를 꿈꾼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땐 충분히 부자인 것 같은데, 그들 역시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어쩌면 가계부를 보며 한숨 푹 쉬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누군가는 ‘그래도 당신네들은…’ 할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보다 힘든 사람들이나, 우리 가족이나, 심지어는 이미 부자인 사람들도 모두 돈의 무게를 어깨 위에서 내려놓을 줄을 모른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도 아껴가며 돈을 번다. 또 본인이나, 자신의 자식들이 돈 쟁탈전에서 행여나 뒤쳐질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또 ‘하고 싶은 일’은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나 버리고 만다.

충분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돈의 무게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게 돈이 가진 무서운 점이다. 이 정도 있다면 충분하다는 적정선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내 주위엔 자기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도 있다. 정말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화가분도 계시고, 마술을 할 때면 행복하다는 마술사도 있다.

이미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사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정말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두라는 말이 있다. 그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다보면, 좋아하는 일이 변질 되어버리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돈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부자가 되어야 좋아하는 일이 단순한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내 일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돈에 집중한다는 거다.

돈이 쳐놓은 그물은 이렇게도 촘촘하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몇 십만 원의 학원비. 그것으로 지난 몇 주를 인내하며 지내야 했다. 몇 십만 원에 이렇게도 내 생활이 휙휙 달라지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겨우 학생인 내 경제력으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먹고 싶은 걸 다 먹을 수 있고 사고 싶은 옷 다 살 수 있는 삶을 동경해 돈을 좇는다고 가정해 보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알바를 늘리는 일이다. 한 달을 빽빽하게 일하고 나서야 놀랍게도 내 수중에 생긴 돈으론 그런 것들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학생 신분을 졸업하고 직장이 생겨 월급을 받게 된다고 달라질까? 스케일이 조금 커질 뿐, 다를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울상을 짓고 있는 내 앞 쇼윈도 안의 구두, 그 꼬리표 가격만이 차이가 있을 뿐일 거다.

그래서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이야기하셨나보다. 소유는 몸뚱이를 불려도 불려도 허기지다. 그렇지만 무소유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도 당장 주머니에 푼돈이 없으면 그나마 불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를 실천하고 사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돈을 훌훌 놓아 버릴 내공이 안 되더라도, 한 번쯤 생각은 해 볼 필요는 있다. 난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나의 꿈, 그 본질인지 아니면 돈인지.

만약 돈을 보고 있다면 이제라도 그 악독한 녀석의 손아귀에서 슬며시 발을 빼자. 너무나도 치밀한 녀석이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감사’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 본말전도라는 색안경 씌우기가 특기인 녀석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는 사람은 최대의 적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만족을 낳는다. 월급이 오를 때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바로 이 만족으로 채워진다. 채워지고도 능히 남아 넘쳐 주위 사람에게도 뻗친다.

박거지가 되어버렸지만, 배우고 싶은 걸 배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다들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돌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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