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어떤 느낌이야?” “모르겠어요!”
“이 시는 어떤 느낌이야?” “모르겠어요!”
  • 승인 2010.10.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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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두가지 이야기

이야기 하나: 꼽등이 그리고…

종종 어떤 대상에 대한 오해가 진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에서 ‘미신’이 존재하고 있다. 당연한 ‘진실’로 여겨지는 부분들은 그것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을 품을 시도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진실성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대표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능의 ‘10퍼센트’만 사용한다는 믿음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 나 역시 많은 책에서 당연하다는 듯 이 명제를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명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이론들, ‘잠자는 90퍼센트의 뇌를 깨워준다는’ 다양한 상품들을 통해서 ‘당연하게도’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명제는 ‘참 일 수밖에 없다’고 믿어왔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아마 많은 분들이 믿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도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로 아인슈타인이 그 말을 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모두가 인정하는 괴짜 천재가 아닌가. 흰머리를 산발하고 혀를 내민 그의 사진만 봐도 모두들 상대성이론의 괴짜 천재가 바로 그임을 알아본다. 괴짜인데다가 천재인 그는, 뉴턴의 뽀글머리나 장영실의 수염 등이 갖지 못한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라면, ‘당연히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능의 10퍼센트만 사용한다는 이 말이 아인슈타인의 말이라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으며, 이는 실제로 어떠한 상품을 광고하기 위한 잡지에서 아인슈타인의 사진을 이 문구와 함께 싣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인다는 의견이 있다. 많은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 사람들은 활동할 때 뇌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러한 연구결과가 ‘10퍼센트 미신(신화) 깨기’라는 이름으로 근간의 오해를 부수려 했으나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진실로 믿고 있다. 한번 정착된 오해는 바꾸기가 그만큼 힘든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미신들이 존재한다. 우유는 완전식품이며, 특히 뼈에 도움이 되는 식품이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은 우유가 칼슘 흡수율이 매우 떨어지며 오히려 많이 섭취할 경우 체내의 철분이 부족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 시금치에 다른 채소들에 비해 많은 철분이 함유되어 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논문에서 소수점을 잘못 찍어 실제의 철분양보다 10배 많게 표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로 믿고 있는 ‘사실’들 중에는 뒤통수를 치는 미신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얼마 전에 ‘꼽등이’가 온갖 포털사이트 검색어를 휩쓴 일이 있었다. 시작은 꼽등이를 귀뚜라미로 착각하여 집에 잡아온 꼬마의 질문(귀뚜라미는 뭐 먹나요? 제가 잡은 귀뚜라미는 황금색인데 종류가 뭔가요? 황금색이 예뻐서 이름은 노을이라고 지었어요)이 웹에 올라온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 일이 일파만파 퍼져 꼽등이가 사실은 엄청난 해충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해충박멸회사조차 꼽등이는 포기할 정도로, 위험하고 박멸이 힘든 해충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번식력이 뛰어나고 온갖 박테리아 세균이 득실득실한데다가 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잡으려는 사람에게 뛰어들기 때문에 바퀴가 그냥 커피라면 꼽등이는 TOP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마귀나 귀뚜라미류에 잘 기생하는 ‘연가시’라는 기생생물이 꼽등이에게 기생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 죽은 사체에서 연가시가 기어나와 꿈틀거리는 흉측한 모습을 보게 될 수 있으니 꼽등이를 때려잡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는 꼽등이를 밟아죽였다가는 이 기생생물 연가시가 피부를 통해 사람에게 침투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런 소문들을 접한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해충 ‘꼽등이’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었고 이 공포심이 관심으로 바뀌어 꼽등이를 인기 검색어 1위에 까지 올려놓게 되었다. 이 괴상한 꼽등이의 인기는 ‘꼽등이 팬클럽’, ‘꼽등이송’, ‘꼽등이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꼽등이에 대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얼마 전 공중파 방송국에서 꼽등이에 대한 뉴스를 다룬 적이 있다. 꼽등이는 사실 인체나 가축에 무해하다는 것이다. 꼽등이만큼은 두 손 두 발 들었다고 알려진 해충박멸회사에서도 ‘꼽등이는 출입문 하단 틈새나 벽면, 배관 등의 틈새를 통해 침입하기 때문에 이러한 틈새를 잘 막는 것으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으므로 서비스 되지 않는 것일 뿐, 꼽등이 박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님’을 밝혔다.



꼽등이가 ‘해충’이 아니라는 사실은(물론 외형적인 모습이 흉측하지만) 많은 누리꾼들을 경악케 했지만, 한번 뇌리에 박힌 생각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전, 같은 과 선배의 반지층 자취방에 ‘그들’이 출몰했다. 아무리 그들에 대한 많은 루머가 사실이 아니더라고 해도 그들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고. 바퀴벌레 한 마리와 수줍게 대면하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고 했다. 뭔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절망이었다고 한다. 아, 우리 집마저 그들의 마수가 뻗쳤구나, 난 이제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해 정작, ‘아 이 생물체는 해충이 아니니까 괜찮아’라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분명 “에 뭐야, 꼽등이 무서운 게 아니래”하며 실망(어쩐지 꼽등이가 무적의 해충이라는 점에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아니라니까 괜스레 실망스러워하셨음)하셨었는데도 말이다. 지금도 포털사이트에 ‘꼽등이’를 검색하면 무시무시한 괴소문을 접할 수 있다. 오해가 진실로 둔갑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리고 한번 진실로 둔갑한 미신은 바로잡는데 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도 나는 동생에게 우유를 권하고, 엄마는 내 빈혈을 걱정하시며 시금치를 무치고, 내 선배는 한낱 벌레에 벌벌 떨고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 둘: 시는 노래

현대시 둘, 고전시가 하나. 숙제로 내준 문제를 풀이해주기에 앞서 이렇게 질문한다. “이 시는 어떤 느낌이야?” 갸웃갸웃, 대답 없이 내 눈치만 살피고 있는 아이. “아니 아니, 내 눈치 보지 말고 니 생각이 어떠냐고.” 이대로 버틴대도 내가 질문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이자 눈동자에 불안감이 차곡차곡 쌓인다. 괜찮아, 정답 같은 것 없어 생각한대로 말해봐, 달래 봐도 한일자로 다물어진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질 않는다. 죄 없는 손가락만 꼼지락 꼼지락. 재촉하듯 응? 응? 물어오는 내 시선에 힘겹게 입을 열어 쥐어짜내듯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한다. “모르겠어요.”
이상한 일이다. 분명 다섯 문제 중에 네 문제나 맞췄는데도 불구하고 ‘시가 어떤 느낌이냐’는 내 간단한 질문에 ‘어째서 답이 4번인지 설명해 보라’는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보다 더 주눅이 들어있다. 고3을 앞에 앉혀두고 시는 마음으로 느끼는 거라느니 일장연설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수업은 진행을 하지만 영 남는 입맛이 씁쓸하다.
“문제에서 파악했던 정보를 염두에 두고, 구조적으로 읽으라고 그랬지?” “네.”
수업이 진행되자 아이의 눈에서 불안감이 점차 사라진다. 이게 아닌데 싶기도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글쓰기 혹은 시 감상 시간도 아니고 엄연히 ‘언어시험’을 위한 수업인데 시험에도 안 나오는 것들을 가르칠 수는 없다. 뭔가 열심히 받아쓰는 아이를 바라보며 문득, “뭘 그렇게 쓰는 거야?” 하고 좀 들여다보았더니, 내 말을 복사라도 한 듯 옮겨 적어 놨다. 난 필기위주로 수업하진 않는다. 물론 손으로 쓰며 익히는 방법이 그저 눈으로 익히는 것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지만, 시어에 밑줄치고 의미 따위를 적고 있는 것이 과연 시를 공부하는 것인가 싶기 때문이다. 대개는 긍정적인 느낌과 부정적인 느낌, 이런 식으로 잡아가는 것 정도 말고는 딱히 많은 필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가 왜요? 란 표정을 담고 나를 쳐다본다.



“이런 건 적을 필요 없어. 그냥 이미지를 떠올려봐. 화자가 이런 시어를 써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의 느낌이 어떤 건지.”
다시 한 번 갸웃갸웃. 필기는 조금 자제하고 시를 집중해서 읽는 데에 더 신경 쓰라는 내 부연설명에야, 알겠다고 대답한다.
수업은 계속 진행된다. 필기를 자제하라는 말이 명령과 같이 들렸는지, 필기를 하고 싶은데 참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연신, ‘이것도 쓰면 안 돼요?’라고 물어온다. 그 질문에 머리가 띵 해온다.
“혹시 시를 써 본적 있니? 동시든 뭐든.” “백일장 시간에 쓴 거 말곤 없어요.” “백일장 시간에는 뭘 썼는데?” “그냥요. 대충 적고 자습했어요.”
아아, 나도 알고 있다. 백일장이면 하루 종일 글을 쓸 시간을 준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글을 쓰는 아이는 거의 없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원고지가득 노랫말을 적어놓고 제출한 아이들의 얼굴이 송글송글 떠오른다. 당장 나만해도, 고민 없이 후다닥 적어 제출하고 남는 시간에 엎드려 자거나, 혹은 공부를 하거나 했었으니까. 그렇지만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시를 한번쯤 써볼 필요가 있다. 누가 시킨다고 쓰는 시가 아니라, 정말로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스스로 쓰는 그런. 물론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분하게도 내가 쓴 시들은 하나같이 졸속하여 어디 내다놓기 부끄러운 것들뿐이다. 그렇지만, 시를 몇 번 적고 나면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어째서 이러한 단어를 골랐을까, 왜 이렇게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 노래를 했을까하는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나와는 뭔가 레벨이 다른 것 같은 시인들의 시에 진정으로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시를 계속 공부해왔던 학생들에게 시를 읽어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공부하라’는 것과 다를바 없는 말이다. 왜, 어디어디 밑줄치고 뭐라고 뭐라고 적어라 하는 식의 ‘공부’ 말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문학을 읽을 때 ‘느낌’이라는 것은 아예 배제되어있다. 간혹 선택지에서 어떠한 느낌인지를 물을 때 빼곤 말이다. 그나마 객관식, 오지선다의 문제에서 머리에 번호표를 붙이고 내가 ‘맞는 거게 틀린 거게?’ 까불대는 선택지는, ‘느낌이 어떠하다’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과연 ‘느낌이 이게 맞는 걸까’만 확인하게 한다. 정말로 문학작품이 전하는 느낌이 어떤 건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정말 없다시피 하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느낌 없이 문학을 읽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문학을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한 문제를 풀면 100점이 나올 것 같지만, 어떤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한 문제에서 6~70정도의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제를 푸는데에 필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 된다. 애초부터 문학을 감상하는 건 배운 적이 없는 학생들에게 ‘느낌’ 운운하며 그냥 느껴! 라고 말한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그냥 느끼라고 한다는 푸념밖에 들을 수가 없다. 느낌 역시 ‘받아 적어’야만 하는 아이의 모습이 영 맘이 아프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면, 맘에 드는 시집을 찾아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시는 노래다. 나도 이 간단한 사실을 수능이 끝나고서야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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