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쁜 놈이야” 해도 내 신념대로 살아가는 게 맞을까?
“너 나쁜 놈이야” 해도 내 신념대로 살아가는 게 맞을까?
  • 승인 2010.11.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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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영화 ‘타인의 삶’을 보고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를 봤다. 무슨 예술영화인가 싶은 디브이디 커버디자인 하며, 고리타분해 보이는 제목, 대머리 주인공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나마 익숙한 영어대신 생소한 언어. 원빈이나 디카프리오가 무게 잡고 있는 다른 영화와 비교해 볼 때, 이 영화는 내게 아무런 매력이 없어보였다. 만약 친구의 강추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이 영화를 볼 생각 ‘비스무리’한 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속는 셈 치고, 보게 된 ‘타인의 삶’.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괜찮은 영화였다. 배경은 비록 곧 통일될 동독이지만, 현대에 던지는 메시지가 꽤나 심오하다고나 할까. 여하튼 맘에 드는 영화였다. 알고 봤더니 관객상을 받은 영화라고. 뭔 상받은 영화치고 맘에 꼭 들었던 영화가 없었는데 ‘관객’상은 역시 다르다. 오히려 무슨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는 영화보다 더 값진 상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관객’으로서 상 주고 싶은 영화다. 마땅히 받음직 하다.
영화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스포일러가 조금 있으니, 주의하시길. 주인공인 비즐러는 비밀경찰으로 냉혹하기 그지없는 대머리 아저씨다. 인기 극작가 드라이만의 애인인 여배우 크리스타를 장관이 마음에 들어 했고, 드라이만의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장관의 명령 하에 그는 인기 극작가인 드라이만을 감시하게 된다. 24시간의 도청, 감시.
하지만 드라이만의 삶을 엿보던 비즐러는, ‘변화’를 겪게 된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지켜보던 비즐러는 점차 인간적인 사람으로 바뀌게 되고 후에는 결국 드라이만을 보호하기에 이른다. 체제를 위해 살아가면서 ‘반체제적인 사람’을 잡아내는 것이 자신의 천직인 줄 알고 있던 그가, ‘반체제적인 행동’을 하면서까지 드라이만을 지켜내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직위를 박탈당하고 우편배달부로 강등되게 된다. 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후, 드라이만은 비즐러가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드라이만은 그의 책,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에서, ‘HGW XX/7에게 헌정함’이라는 글귀를 남긴다. HGW XX/7은 비즐러의 코드네임이다. 비즐러는 이 책을 사면서, 직원의 “선물이세요?”하는 질문에 “아뇨, 저를 위한 것입니다.”하고 대답한다. 이것으로 이 영화는 끝을 맺는다. 꽤나 여운이 남는 마지막이 아닐 수 없다.
이 내용의 양적 비중으로 따진다면, 플롯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도청당하고 있는 드라이만이라고 하겠으나 그는 비즐러의 눈과 귀를 통해 전달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되어진다. 비즐러가 평면적인 인물이었다면 아마 이 영화는 혁명적인 드라이만을 그리는 영화였겠지만(혹은 그 비극), 비즐러는 극적으로 입체적인 인물이다. 동독과 서독, 그리고 인권침해. 스크린의 ‘타인의 삶’, 즉 ‘드라이만의 삶’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 역시 가벼운 것은 아니나 초점은 드라이만의 변화에 맞추어져있다.
꽤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 영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것이다. 사실 영화가 전달하려고 했던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담담하게 그려내는 비즐러의 변화에서 내가 가장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도덕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우선 당장 의문이 드는 것이 비즐러는 악한 사람이었냐 하는 것이다. 변화하기 전의 비즐러, 냉혹했던 그는 악한 사람이었을까. 크리스타에게 반한 장관은, 의도적으로 악한 인물에 가깝다. 감독은 그에 대해서는 여지를 두지 않는다. 사실상 드라이만의 여자인 그녀를 얻고 싶은 욕망 역시 드라이만을 감시하도록 하는 큰 요인 중 하나니까. 권력으로 그녀를 취하고, 자신에게 독이 될지 모르는 내용은 은폐하는 인물. 감독이 그에게 도덕적 판단의 여지를 남겼다면, 장관으로 분한 배우가 그런 위압적이고 권위적인 -게다가 눈은 매섭고 입은 쳐진데다가 뚱뚱하기까지 한-인물로 그려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바로 비즐러다. 물론 감독은 변한 후의 비즐러에 대해서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한 후의 비즐러가 ‘선하다’고 주장 될 정도로 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개념으로 변하기 전의 비즐러가 ‘악한’ 인물인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조금 딱딱하고, 원칙주의자이고, 약간은 지루한 사람이다. 역사적인 배경이 요구하는 ‘원칙’을 철저하게 따르는 그는 오히려 ‘선한 사람’일 수도 있다. 칠판에 ‘떠든 사람’하고 제 친구 이름을 적어놓는 학급 반장 같은. 어른들에게 그런 아이는 그야말로 ‘착한 아이’가 아닌가.
절대적인 본질을 논외로 한다면 도덕이라는 것도 시대와 사상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는 독일의 통일 앞에 선과 악이 뒤바뀌는 상황에서, 특정한 계기로 선악 개념을 바꾼 사람이기도 하다. 다만 그 시점이 약간 일렀던 탓에, 우편배달부가 되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서 절대적인 ‘선악’을 결론짓지 않는다. 인권을 침해하고 언론을 억압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숨 쉬고 있는 우리에게 악한 것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도덕개념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바로 ‘선한 이들의 소나타’라는 곡을 듣고 비즐러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동독과 서독이 분리되어 있던 체제 하에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음악가가 쓴 ‘선한 이들의 소나타’.
여기서의 선함이라 함은 드라이만과 같은 사상을 지닌 이들이 가진 사상과 이상을 뜻한다. 전체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변하기 전의 드라이만이 가지고 있던 ‘선함’이었다. 인권의 침해와 언론 억압은, 어쩔 수 없는 소의 희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드라이만의 삶을 관찰하면서 이러한 사상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하지만 역시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인간적인 면모가 눈뜨는 것이다. 그는 결심을 하는 것도 아니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눈물’을 흘린다.
그 후 그가 드라이만을 돕기 위해 하는 행동들도, 현 정권의 부패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기 보다 그를 살리기 위해, 인간으로서 그를 돕는 정도다. 그의 인생의 신념을 걸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어쨌거나 소극적인 방법이다. 그의 전의 사상이 ‘악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간적’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굉장히 가치중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는 비난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담아낼 뿐이다. 하지만 ‘착한 아이’가 ‘인간적인 아이’가 되는 것, 이것 자체에 대해서까지 가치중립적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이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아름다운 변화’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나쁜 것이 좋게 변했다’라고 단순화하기엔, 이 영화 속의 도덕개념은 너무나도 담담하다.
선한 것은 무엇이고, 또 악한 것은 무엇일까. 바른 생활, 도덕, 윤리교과에서 쉴 새 없이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난 칸트의 도덕관념이 어떠했고, 또한 공자의 선악이 어떠했는지를 배우고 공부했건만, 그를 실감한 것은 비즐러의 눈물에서였다.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다.



나는 선량한 시민이다. 나는 딱히 모난데 없이, 대한민국의 대학생으로서,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선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독재정권이 군림하던 시기의 침묵이 ‘선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이 선한 것일까? 당장 모든 사람들이 날 더러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말인가.
과연 나의 신념대로 행하는 것이 선한 것이긴 한 것일까.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처럼, 웃어른을 공경하고, 교통신호를 잘 지키고, 쓰레기를 잘 줍는 것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단순한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이 착한, 선한 것인지. 다만,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젊은 피들이 모두 이 같은 것을 고찰한다면, 결론을 명쾌하게 내리진 못할지언정 아마도 우리사회는 더 나은 곳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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