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2011 연말의 단상



야호!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길고도 길었던 마지막 시험이 끝이 났다. 열정적인 답안지 작성에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두 번째 마디가 아릿아릿했다. 그래도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는 아니라 그럭저럭 쓰고 나온 것 같다. 절로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지난밤 한 시간 반밖에 자지 못했지만, 이 기분이라면 하룻밤 더 새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었다. 아. 이런. 방금까지의 에너지가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푸시시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엉망진창인 나의 방.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공부를 할 때 청소를 잘 하지 않는다. 연습장이며 책, 목도리, 재킷, 양말, 뚜껑 실종된 펜 등등으로 발 디딜 틈 없는 내방. 설거지거리도 가득 빨래거리도 가득, 청소만으로 하루는 꼬박 써야할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 엄마야. 시험 잘 쳤어?”
“뭐 그럭저럭. 이제 청소해야 해요.”
“그래. 언제 내려 올 거니? 치과는?”
아, 그래. 지금 내 앞에 남은 과제는 단순히 방청소가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시험기간이라고 치과치료를 미뤄뒀었다. 당장 치료를 받는 일이 시급하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제 이틀 뒤로 다가온 동생의 입시원서다. 내일 아침에 치과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당장 내려가면 되겠지. 동생 입시지원이 끝나고 나면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 원칙의 아버지 덕분에 이번에는 친구도 못 만날 테고,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나면 2010년도 끝이니, 오늘이 아니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이 안 선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고 대학도 같이 온 친구를 불러냈다. 당장 가장 중요한 건 동생 입시 상담, 다음으로 중요한건 치과 치료, 그 다음은 청소였지만…. 일단은 청소를 제외하면 다 내일의 일이고, 청소도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서 하면 될 것 아닌가.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연말에 한번 다 같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보게 되어서 할 얘기가 참 많았다. 떠들고 떠들고 떠들고, 영양가 있는 이야기만으로 몇 시간을 채웠다고 하는 건 사실 거짓말이다. 몇몇 이야기는 정말로 우리가 고민해야할 내용이었지만, 역시 대부분은 ‘~라 카더라’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엄마. 액정에 뜨는 번호를 보며 ‘잠시만∼’ 하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시끌시끌한 소리에 엄마가 잠시 침묵한다.
“밖이니?”
순간적으로 욱, 하는 기분이 든다. 나도 힘들었는데, 시험기간 내내 서너 시간씩밖에 못자고 공부했는데, 하루정도 좀 논다고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네.”
“니가 지금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니. 동생이 이제 원서마감인데.”
“들어가요, 들어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도 한 두어 시간 더 수다를 떨었다. 집에 돌아오니 11시다. 방은 여전히 개판이고….
컴퓨터를 켠다. 오랜만에 힐을 신었더니 발이 피곤했다. 메신저에 접속해있는 동생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눴다. 내일 원서를 쓸 예정이라고. 청소도 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고 동생과는 얘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잠이, 잠이 쏟아진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얘기해, 그 말을 남기고 나는 그냥 잠이 들었다.
아침, 아니 아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시간에 난 부스스 일어났다. 어느덧 11시를 향해가고 있는 시계가 날 책망하듯 방안을 촉칵촉칵 울리고 있었다. 치과에 가야 하는데, 방도 치워야하고. 아 동생이랑 빨리 얘기도 마쳐야 한다. 그런데 11시다.




차 시간을 알아봤더니 하나같이 애매하다. 청소를 하고나면 분명 차 시간을 맞출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남겨두고 다녀오자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딸 자취방을 확인해볼 어머니의 놀란 눈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 했다. 이대로 두고 며칠 집을 비우면 방이 통째로 발효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이런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더 이상의 월세 지원은 기대하기 힘들 거다.
결국 치과 치료를 내일로 미루고, 동생과의 상담은 인터넷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이 얼마나 형편없는 누나인가.
시험기간에 뭔가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 어금니에 통증이 느껴졌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시험 끝나는 대로 오시면 사진촬영을 한번 해보자는 치과 측 말을 듣고 최대한 빨리 찾아가 봐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침대에서 겨우 바닥이 보이는 곳을 딛고 책상 앞으로 건너갔다. 메신저를 앞에 두고 동생과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어금니는 욱신거렸다. 최대한 빨리는 개뿔∼. 동생과의 상담은 이번 학기에 내게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시험기간에도 지금 하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었다. 시험기간이라서 동생 혼자 이것저것 조사하는데 도움이 되질 못해서 늘 미안했었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면 바로 내려가서 같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서 최종적으로 지원할 대학을 고르기로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뭔가. 머리를 맞대고? 잠도 덜 깬 누나가 타자로…그건 뭐야? 이건 뭐야? 질문이나 해대는 이것이 과연 머리를 맞대고 하는 의논일까. 자료 하나를 같이 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들었고, 의사 전달이 명확하게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지 않았다. 아 정말로, 정말 형편없는 누나다. 나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것에 맞추어 계획을 세워 그를 실천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다거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거나 하는 플러스적인 개념도 있지만, 행여 그를 소홀히 하다가는 이렇듯 한꺼번에 중요한 일들을 망쳐버리는 마이너스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어제 청소만 제대로 해두었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어제 내가 청소를 하고 체력이 허하는 한도에서 친구를 만났다면, 행여 내가 피곤을 못 이기고 오늘 늦잠을 잤다 하더라도 아슬아슬하게 치과 치료를 받고 고향 집으로 내려갈 수 있었을 거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처럼 어금니가 왜 욱신거리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단지 걱정만 하고 있을 리도 없고, 컴퓨터 앞에서 못난 누나임을 시인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내 등 뒤로 보이는 내 방이 저런 꼬락서니 일리도 없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스케줄러를 사용하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을 망치고 나니, 내 빨간 스케줄러가 아쉽다. 2011년도 내일 모레인데, 마음에 드는 스케줄러나 물색하러 가 봐야 할 것 같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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