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께서 불편하십니다…종이컵은 쓰레기통에 넣어주세요!”
“어머님께서 불편하십니다…종이컵은 쓰레기통에 넣어주세요!”
  • 승인 2011.02.2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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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도서관, 라면국물 그리고 종이컵남


도서관 개관시간에 맞추어 집을 나선다. 텅 빈 도서관에 처음으로 짐을 푸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뿌듯한 일이다. 나 정말 열심히 살고 있구나, 그런 느낌.
열람실 냄새가 난다. 책상과 의자의 나무 냄새, 바닥의 대리석 냄새, 밤새 가라앉았다가 아침 비질에 몸을 띄운 먼지 냄새, 창밖에서 실려 오는 아침 공기 냄새. 그 안에 오직 나뿐이다.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어디 앉아볼까 좌석을 고민한다.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속속 들어온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혼자만의 시간은 종료되어 버린다. 조금 아쉽다. 열람실에 사람 냄새가 추가된다. 아니 그전에 이미 무뎌진 코는 이 미세한 냄새를 더 이상 감지해내질 못한다. 금세 대여섯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짐을 풀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음료수라도 뽑아 마시려고 복도로 나온다. 자판기 앞, 정수기 앞, 아까 그 사람들이 서성서성하고 있다. 아침부터 공부를 하겠다고 꾸역꾸역 나왔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견할 것이다.
다들 물 한잔, 커피 한잔으로 여유로운 얼리버드의 아침을 시작한다. 얼리버드인척하려고 눈이 팅팅 부은 올빼미 한 마리는, 가당찮게도 그들에게 뭔가 동질감을 느끼면서, 콜라 한 캔을 뽑는다. 참말로 기특한 올빼미가 아닌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뭐 그다지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간다. 공부하는 게 지루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니 반겨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할 게 태산인데 시간이 모자람을 슬퍼해야하는 건지 아리송하다.



어쨌거나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우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아 점심시간이구나 하고 알아챈다. 근래에는 배꼽시계가 고장이라도 난 모양인지 제때에 배고픈 일이 없다. 배도 안 고픈데, 그냥 계속 앉아 있기로 한다.
내가 있는 열람실 맞은편이 바로 휴게실이라 점심시간이면 열람실이 조금 소란스럽다. 나야 뭐 소음에 많이 무딘 편이라 상관없지만, 사람들은 그게 아닌 모양이라 대개 이만큼 시끄러워 질 때면 나가서 다들 점심을 먹는다. 암묵적인 점심시간의 약속.
이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점심을 먹는대도 조금은 주의해야한다. 젓가락 소리 달각달각 신경 쓰며 밥 먹는 건 꽤나 불편하지만,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다.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아까 엎드려서 잤더니 목표치를 다 채우지 못했다. 잠깐 눈 붙일 요량이었는데 아주 그냥 꿈까지 꾸면서 달게 자버렸다. 지금이 열두시 반이니까, 한두 시간 후에 점심을 먹으면 딱 맞을 것 같다. 두 시간 동안 공부나 더 해야지. 열람실이 다시 휑해진다.
두시. 슬슬 배가 고프다. 열람실 책상 칸막이마다 다시 들어찬 머리통들을 뒤로하고 휴게실로 쭐래쭐래 걸어갔다. 보온도시락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로, 방해를 받은 몇몇 머리통들이 잠깐 들썩여 눈을 흘긴다. 읏, 죄송.



휴게실엔 역시 아무도 없다. 심지어 불까지 꺼져있다. 문을 열자마자 라면냄새가 훅 끼친다. 손에 들려있는 어머니표 도시락에 다시 한 번 감사.
도서관에서 까먹는 도시락은 정말 맛있다. 집에서 그냥 있는 반찬 좀 싼 것뿐인데, 뭔가 열심히 살고 있는 듯한 자뻑(자아도취, 잘난 척)이 양념이 된 걸까. 굉장히 맛나다. 금세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도시락을 다 먹는데 십 분이 채 안 걸렸다. 아주 마셨구만 마셨어.
밥도 먹었으니, 후식으로 커피나 한잔 해야지, 하고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걷는 다리에 부딪혀서 빈 도시락이 덜그럭덜그럭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덜그럭 소리가 멎는다. 발걸음이 멎었다. 정수기 앞에서. 나는 꽤 놀란 눈으로, 정수기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정수기에 누군가 테러를 해 놨다. 정수기 주변이 온통 붉다. 누군가 휴게실 앞에 있는 이 정수기에다가 라면 국물을 버려놓은 것이다.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다.
라면 국물을 정수기에 버리지 말아달라는 표지가 휴게실에 붙어 있다. 누군가 이를 무시하고 정수기에 버린 모양이다. 물 받는 통에서 흘러넘친 라면 국물이 대리석 바닥에 흥건하다.
물 컵을 버리는 통은 컵라면 그릇과 각종쓰레기로 만원, 그 비좁은 곳을 참지 못하고 몸을 던진 용감한 쓰레기들도 몇 보인다. 라면 국물에 처참히 몸을 적신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저만치 따로 있는 쓰레기통이 무색하다. 괜히 무안하고 뻘쭘한 ‘캔류’, ‘재활용’, ‘일반쓰레기’ 표지판들. 이것을 청소하셔야 할 어머니 생각에 머리가 아찔하다.
행여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점심시간도 서로 맞추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해놓은 꼴이 바로 이것 아닌가. 같은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



도시락통 소리에 흘겨보던 눈길이 돌연 떠오른다. 너는 생각이 있는 거니? 열람실 안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굴면 어떻게 하니, 다들 공부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던 그 도도한 눈. 커피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연초에, ‘종이컵남’으로 떠오른 훈훈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정수기에 메모를 하나 붙여 놓은 것. 그 메모는 이런 내용이다.
“안녕하세요! 2열을 자주 이용하는 늙은 고시생입니다. 다름 아니라, 어머님께서 정수기 물받이통 비우실 때 일일이 종이컵을 손으로 건져내셔야 해서 많은 불편을 겪고 계십니다!(통 자체도 물차면 엄청 무거움) 번거로우시겠지만 종이컵은 쓰레기통에 넣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법돌이.”



이 글 옆에 미화원이 남긴 글이 한 장 더 붙어 있다.
“법 공부하는 학생님, 미화원 이 아줌마를 친어머님처럼 생각해서 너무 고마워요.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그동안 마시고 버린 종이컵이 많았었는데 이 글을 쓴 뒤에 거의 100%에 가까운 효과를 낳고 있어요. 남자 화장실 맡은 아줌마 올림.”
정말 세상에서 가장 훈훈한 정수기가 아닐 수 없다. 쪽지 두 장이 붙어 있는 정수기, 그리고 내 발 앞의 라면 국물이 흥건한 정수기.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이 붉다. 바닥의 라면 국물처럼. 부끄럽다.
그대로 열람실에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포스트잇과 볼펜 한 자루를 가지고 나온다. 왜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거냐는 듯한 눈빛들이 뒤통수에 와서 꽂힌다. 이번에는 별로 죄송하지도 않다. 괜히 발소리도 쿵쿵 낸다. 심술 난다.



우리 도서관에는 왜 ‘종이컵남’이 없는 거지! 종이컵남과, 그 훈훈한 정수기가 있는 도서관이 부럽고 또 질투난다.
포스트잇에 간단하게 몇 글자 써서 정수기에 붙여놓았다. “라면 국물은 여기에 버리지 말아주세요. ㅜㅜ” 종이컵남처럼 심금을 울리는 긴 문장은 아니지만, 내일부터는 적어도 라면 국물 흥건한 모습은 없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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