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빨간 궁서체의 글씨 “죄송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그 빨간 궁서체의 글씨 “죄송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 승인 2011.03.0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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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대학합격자 명단 발표하던 날


# 어머니가 찍어오신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 풍경


현재 시각 21시 14분. 집 분위기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계신 어머니도, 방안에 틀어박힌 동생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간혹 들려오는 한숨소리. 24시가 다가온다. 곧 내일이다. 내 입에서도 한숨 비스무리한 것이 새 나온다.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에 둔 것이 글인지 종인지도 모르겠다. 아, 나 공부 중이었던가.
“유 갓 메일~♪” 온 신경이 전화기에 집중되어 있던 터에 울리는 경쾌한 알림음, 팽팽히 당긴 바이올린 현이 뚝 끊길 때처럼 핑,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거실의 어머니도, 그리고 각자의 방에 들어앉은 나와 동생도 움찔, 아니 놀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무슨 스팸문자가 이 시간에.”
평소 늘 온화하셨던 어머니의 입에서,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 에효∼. 그 소리에 꼿꼿이 퉁겨진 허리에 다시 힘이 풀린다.
다시 시계를 본다. 21시 20분. 시간도 참 더럽게 안 간다. 근데 어째서 내일은 이렇게 빨리 다가오는 건가. 21시 21분. 창밖이 검다. 오늘이 다 가고 있다. 오늘은, 대입발표 최종 확정일이다. 오늘 중으로 전화가 오지 않으면, 이젠 정말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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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정시 가나다군 중 나다군에 합격했다. 그래도 다 떨어진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삼수는 면하였다. 하지만 워낙 1지망과 2지망 사이의 갭이 큰지라, 1지망의 추가합격 소식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동생은 1지망의 대학교에 특별전형으로 지원했다. 5명밖에 모집하지 않는 그 전형에 징그럽도록 많은 지원자가 몰렸다. 동생은, 6번이었다. 후보 1번. 불합격. 그만으로도 감사했다. 당장 합격은 아니지만, 희망이 보였다. 1번. 우글우글한 불합격자들 사이에서 그나마 1번의 대기순번을 쥐고 있다는 것이. 에이 설마 1번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명, 한명만 빠지면 되는 것이다. 합격통보를 받았을 5명 중 한명이 더 좋은 대학교에 합격하길 빌고 또 빌었다. 2번도 아니고 1번이다. 숫자 1이 갖는 특유의 긍정적인 뉘앙스가 온 가족을 들뜨게 했다. 묘한 기대와 불안.
대기번호 1번을 받고 난 이후부터, 어머니께서는 아침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시곤 했다. 갓바위, 그곳에는 오만가지 소원을 담은 얼굴들이, 꼭 우리 어머니 같은 표정으로 북적북적하다 하셨다.
날짜는 계속 갔다. 한번 잠들면 불이 난대도 깨어날 줄 모르는 내 동생이, 핸드폰만 울리면 벌떡 벌떡 일어났다. 밥도 잘 넘기질 못했다. 내 동생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말라갔다. 어머니는 몰라보게 체중이 느셨다. 불안감에 가만히 계시질 못하겠다고 하셨다.
1차 추가합격자발표, 2차 추가합격자발표, 3차 추가합격자발표…. 불안감이 세를 불리는 가운데에, 그러한 시간들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나는 우리 가족 중에선 그나마 제일 태연한 편이었다. 간절히 바란 것은 이루어진다고, 나는 그를 의심 없이 믿는 것이 오히려 좋은 소식을 불러올 행운을 만들어 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에이, 붙는다니까. 그냥 그렇게 말했다. 자꾸 그리 말하였더니 정말 붙을 것 같았다.
합격한 나군과 다군 중 어디에 등록하는 것이 좋을까를 두고 열린 가족회의에서도 나는 끝까지 불성실한 태도였다.
“저는 나군이 더 나은 것 같아요. 근데 어차피 가군 붙을 건데 너무 고민하지 맙시다.”
그래, 그래야지, 하는 눈들에서 반짝 희망이 빛났다가 흔들리며 사라진다.
동생은 결국 나군을 선택해서 등록하였고, 날짜는 또 지난 며칠과 같이 계속 흘렀다. 나는 도서관을 가거나, 집에서 공부를 하거나, 혹은 서울과 대구, 밀양을 왕래하며 시간을 보냈다.
4차 추가합격자발표, 5차 추가합격자발표…. 죄송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그 빨간 궁서체의 글씨는 자꾸 보아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굳건하게 믿었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 본인도, 부모님도, 그리고 나도 한 뜻으로 바라는 일이 아니었던가. 재수생으로서의 시간이 동생에게 얼마나 힘든 날들이었는지 알고 있다. 아무쪼록, 목표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길, 내 고3시절에도 없었던 수능노이로제에 걸려가며 그렇게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다. 누나가 이럴진대, 부모님이야 오죽하겠으며, 본인 마음은 또 어떻겠는가.



추가합격자 발표가 본격적으로 전화로 통보되면서, 불안감은 터질 것처럼 집안을 가득 채웠다. 천천히, 또 빠르게 시간이 갔다.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추가 합격되셨습니다. 그 전화 한통이 이렇게나 힘든가. 야속했다. 불안감에 냄새가 있었다면 아마 온 집안이 불안감의 냄새로 질식해버렸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난 늘 도서관으로 피신했다.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동생은 전에 없이 내게 의미 없는 문자 따윌 하곤 했다. 누나 뭐해? 같은. 뭐하긴 공부하지. 그래.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이 나면, 나는 이 아이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가를 가늠해보곤 했다. 나보다 더할 것이라니 상상이 안 된다.
내 옆자리의 교복 입은 여학생, 그 여학생이 보고 있는 수학의 정석, 토익 문제집을 풀고 있는 나, 누나 뭐해 물어오는 동생. 현실감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또 한 순간에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란 걸 처음 알았다. 나는 가만히, 심지어 눈동자조차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내 앞에 펼쳐진 책은 까마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지루한 시간은 지루하게 흐르고 지루하게도 다시 오늘이 반복된다. 그 지루한 오늘 속에서는 침묵하는 전화기, 그저 펼쳐진 책이나, 그저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심지어는 불안감조차도 지루하였다.
어느 때보다 길고 지루한 일주일이 흐르고, 이젠 마지막의 오늘까지 왔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리 시작한 오늘은 벌써 22시를 향한다.
동생은 나군 대학 소재지인 부산으로 가게 될 것 같다. 사실 부산도 나쁘지 않다. 어디를 가든 자기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언뜻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간절히 바라던 것은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의심 없이 믿었는데. 간절히 바라는 것도, 의심 없이 믿는 것도 때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참 맘이 아팠다.
그리고 그 말은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내가 의심 없이 믿고 있는 다른 것들도,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온통 갑갑해졌다. 22시, 22시 30분, 23시, 23시 30분. 도저히 오늘이 끝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가장 먼저 잠든다.
나는 그나마 우리 집에서 가장 태연하였는데, 마지막이 되자 가장 불안한 사람이 되었다. 체념의 빛을 띠는 어머니 얼굴이 외려 편하여 보인다. 그 모습이 나는 못 견디게 불안하였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행하게도 잠은, 불안한 누나의 침대에도, 축복처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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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불안한 맘과는 달리 나는 단 잠을 잤다. 간밤에 악몽 비슷한 것을 꾼 것도 같지만 개운한 아침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악몽 따위가 중요한 사항이 못되었다.
동생은 얼굴이 푸석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와 부산 하숙집에 대해 상의하고, 얼마나 자주 고향집에 들릴 건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너 이렇게 아침에 못 일어나서 어쩔 거냐 하고 면박을 듣고. 엄마의 성화에 흐흥, 하고 웃어 보이는 동생은 별로 설레 보이는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퍽 신입생다웠다. 해서, 한편으론 안심이 되고 또 한편으론 그 파리한 웃음이 여간 마음 아픈 것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장을 보러 나섰다. 맛있는 것을 해주마, 하고 호언장담을 했다. “나도 갈래.” 분주히 나서는 내 뒤로 동생이 따라나섰다. 마트는 그리 멀지 않았다. 뭘 해주지, 하고 생각하면서 잡담을 하며 걸었다.
그 길에서 동생은 행시를 준비하고 싶다고 말했다. “으응, 그래? 우와 힘들겠네.” 누나는 사시를 준비해 보겠다 하고, 동생은 행시를 준비해 보겠다 한다.
“우리 집안 정말 다들 힘든 길을 가는 구나.”
동생은 또 흐흥하고 웃는다. 마트에서 크림스파게티를 만들 재료를 이것저것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짧은 거리임에도 꽤 힘들어하는 동생. 일 년 동안 어디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만 앉아 있더니 체력이 말이 아니다. 자세도 약간 구부정하다.
동생이 벗어 둔 신발은 1년 전에 구입했음에도 아직 밑창이 새 것 같다. 저렇게까지 했는데 웬만하면 좀 붙여주지. 대체 누구한테 하는 원망인지도 모를 것이 절로 입을 비죽이게 한다.
“좀만 기다려. 빨리 해줄게.”
크림소스 스파게티는 내가 했지만 꽤 맛있었다.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던 동생도 꽤 많은 양을 먹었다. “으어, 배불러.” 한참을 괴로워한다. 손님이 과식으로 땅을 구르든지 말든지 요리사는 싹싹 비운 접시가 흡족할 뿐이다.
누워서 씩씩대던 녀석이 어느 정도 편안해지고 나니까 방으로 들어간다. 뭐해, 옆에서 빼꼼 보니 뭔가 모니터 앞에서 열중하고 있다. “수강 신청해야 돼서.” 무슨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어떤 교수님은 어떻다, 무슨 과목은 어떻다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내 신입생 때 모습이 겹쳐 보여 어깨를 팡팡 쳐줬다. “그려, 열심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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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책상에 앉았다. 덮지도 않고 잠든 책이 펼쳐져있다. 어젯밤, 22시, 23시…. 그때의 불안감이 슬밋 고개를 쳐들다 만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 음, 아닐 수도 있다. 뭐 아니면 어떤가. 누구보다 간절했을 동생은,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모든 것들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내겐 너무 외면하고픈 사실이지만, 외면하고픈 사실도 결국 어쩔 수 없이 ‘사실’인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들도 어쩌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만,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계속 태연할 생각이다. 내가 뜻한 바가 끝끝내 빛 보지 못하고 재 되어 버리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고 다시 굳게 믿어보려 한다. 의심 없이 믿는 것, 그것은 배은망덕하게도 나와 내 동생의 뒤통수를 후려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확신한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어쩌면 항상 맞는 명제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들은 대개 간절히 바라던 것이다. 간절히 바라지 않고서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안 된다면’, ‘혹시라도’, 그런 생각은 지금 할 것이 아니다. 일단 간절하게 바라고 또 구한 후에 그 때 생각해 볼 일이다.
힘든 진로를 택한 동생의 앞날에도 그리고 그 누나에게도, ‘의심 없이’ ‘간절하고’ ‘치열한’ 시간과, 또 그에 걸맞은 성과가 있길 ‘간절히’ 바란다. 내 스스로에게도, 동생에게 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어깨를 팡팡 쳐주고 싶은 마음이다. 열심히 하자.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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