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 미군부대 고엽제 매몰 파문 ‘세상에 이런 일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 내 고엽제 비밀 매립 사태 파문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1978년 당시 캠프 캐럴에서 근무한 스티브 하우스 씨가 매몰 사실을 폭로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고엽제 매몰 소식을 전해들은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도 고조되고 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은 캠프 캐럴 등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는 등 철저한 오염 조사와 고엽제 매립 경위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가 어떤 대응에 나설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비밀 매립 600여 드럼 달해”

주한미군이 지난 1978년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비밀 매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이 폭로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19일 SBS ‘8시 뉴스’는 미군기지 안의 빈 터에 고엽제를 대규모로 매립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SBS는 이 사진을 익명의 주한미군이 촬영했다고 밝혔다.

SBS에 따르면 D구역이라고 불리던 건물 건너편 넓은 빈 땅에 고엽제를 묻었는데 당시 찍은 사진을 보면, 길게 패인 땅의 가운데에 뭔가 묻혀있는 게 뚜렷이 보인다. SBS는 “당시 드럼통 안에 든 고엽제를 매립한 후 매립에 동원했던 트레일러 차량까지 통째로 묻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맹독성 물질인 고엽제가 엄청난 규모로 비밀 매립된 것이다.

당시 매립작업을 했던 스티브 하우스 씨는 “트럭 뒷부분을 땅 속에 묻고 트레일러도 분리한 뒤 묻으라고 지시했다”며 “이듬해 봄비가 내리자 완전히 메워지지 않은 구멍에 빗물이 들어찼고, 빗물이 흘러넘치면서 새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SBS는 고엽제는 당시 드럼통에서 새어나온 것을 만졌던 미군의 피부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독성이 강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지난 23일 MBC 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전화인터뷰에 응한 스티브 하우스 씨는 “자신의 몸에 드러나는 증상이 고엽제 후유증이라고 해도 미국 보훈청이 믿지 않으려고 했다”며 “이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에 대해서 한국인에게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기에 폭로를 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이날 스티브 하우스 씨는 “고엽제를 매립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고도 했다. 그는 “전에도 군부대에서 위치를 측정한 적이 있기 때문에 캠프 내 고엽제를 파묻은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증언했다. 1978년 당시 매립된 고엽제는 한국에서 사용한 고엽제 300여 드럼 뿐 아니라 베트남에서 사용한 고엽제 등 600여 드럼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인터뷰에서 스티브 하우스 씨는 고엽제를 묻을 때 고엽제 통을 깔기 전에 드럼통을 비닐로 싼다든지 하는 보호조치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주민 건강 조사해야”

지난 20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럴 현지조사에 나선 환경부․경북도․칠곡군 관계자, 전문가 등 10여명의 조사팀은 부대 둘레 10여㎞를 한 바퀴 돌며 고엽제가 외부로 유출될 수 있는 경로를 검토했다.

미군부대 정문 근처 실개천을 둘러본 부경대 옥곤 교수(환경대기과학)는 “미군부대 안에서 방류수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며 “빗물과 하수처리를 분리하는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이옥신 전문가로 알려진 옥 교수는 “부대에서 흘러나가는 최종 방류구 통로가 몇 곳인가도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개천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와 동정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왜관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허순구(60) 씨는 “실개천 주변에는 지하수를 뽑아올려 식수로 사용하는 주민들도 있다”고 말했다. 칠곡군은 “최근 수질검사에서는 식수로 적합하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주민들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다시 수질을 정밀 조사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사전답사 수준의 현장조사를 한 조사팀은 23일부터 미군부대 부근의 지하수 관정 24곳을 대상으로 오염도 조사를 시작하고, 부대 주변 토양과 하천에서도 시료를 채취해 조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조사팀은 또 미군부대와 경계가 맞닿아 있는 칠곡군 왜관읍 석전1리 고지마을 주민들이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4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은 고추와 마늘 농사를 짓고 있으며, 2009년까지 간이상수도를 써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 마을 문병무(66) 이장은 “지금까지는 큰 탈이 없었지만 고엽제 소식을 듣고 마을 주민들이 긴장하고 불안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캠프 캐럴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퇴직 군무원들은 고엽제를 묻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기지 안 동쪽에 있는 ‘헬기장’을 지목했다. 이 헬기장이 각종 건물과 담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아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캠프 캐럴의 위치가 영남권 식수원인 낙동강에서 불과 630m 떨어진 데다 그동안 기름 유출 등의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공정옥 사무처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라며 “민간단체가 포함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우리나라 모든 미군부대에 대한 오염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 처장은 또 “치외법권 지역인 미군부대는 접근 자체가 힘들어 이번 조사가 흐지부지 끝날 수도 있다”며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백창욱 상임대표는 “이 땅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다”며 “정부는 안보를 핑계로 주한미군의 눈치만 볼 것이 아니라 주권국가로서 국민의 생명과 국토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 시민단체들은 23일 대구환경운동연합 주관으로 이번 사태와 관련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또 미군부대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이어나갈 방침이다. 김선우 대구경북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시민단체별로 미군부대에 대한 환경조사 실시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국회에 국정조사단을 꾸려 줄 것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장세호 칠곡군수는 “환경부가 본격적인 오염조사를 할 때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시민단체가 포함되도록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환경연합 김종남 사무총장은 “4대강, 구제역, 핵 사고에 이번에 고엽제 재앙이 왔다”면서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한 “민간단체 차원의 전국적 대책 기구를 추진 할 것”이라 밝혔다.

시민사회단체들은 △ 철저한 조사 및 조사결과 공개 △ 고엽제 매립의혹에 대한 국정조사 △ 주한미군 사죄 △ 정부의 오염지역 정화 및 피해주민 보상 △ 전국 미군기지 환경조사 실시를 촉구했다.

여야정치인들 역시 한 목소리로 철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환경부와 경북도, 칠곡군은 긴급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SOFA(주한민국주둔지협약) 환경분야 의제로 논의할 것이라 밝힌 상태다.

“실제 반입량 훨씬 많을 것”

파문이 확산되면서 정부가 주한미군의 고엽제 반입과 처리 실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혹이 일고 있다. 더욱이 1970년대 초 캠프 캐럴 외에 경기 의정부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미군기지로도 고엽제로 추정되는 다량의 드럼통을 옮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지만 군 당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캠프 캐럴 내에 다량의 고엽제를 묻었다는 의혹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며 “정부가 태스크포스를 가동하고 미국과 공동조사에 신속히 합의한 것도 이번 사안이 그만큼 충격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미 양국이 과거 비무장지대(DMZ) 인근 북한군 예상 침투로의 수풀과 잡목을 없애기 위해 고엽제 살포작전을 공동으로 벌인 사례를 볼 때 정부가 주한미군의 고엽제 반입 실태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1999년 주한미군이 DMZ 인근에 고엽제를 뿌렸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된 뒤 국방부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1968∼69년 DMZ 인근에 모두 5만9000갤런의 고엽제를 뿌렸으며 이 중 독성이 강한 에이전트 오렌지는 2만1000갤런이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국방부 관계자는 “고엽제 살포는 미2사단이 먼저 요구했고 한국군도 필요성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1969년 이후에도 한․미 군 당국이 소규모로 고엽제 살포작전을 벌인 점에 비춰볼 때 실제 반입량은 5만9000갤런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선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쓰고 남은 고엽제의 상당량을 미국으로 가져가지 않고 주한미군이 주둔한 한국으로 들여와 몰래 폐기했을 개연성을 제기한다. 한 전문가는 “미군이 느슨한 한국의 환경 감시를 틈타 한국 정부 몰래 들여왔거나 한국이 이를 묵인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고엽제(枯葉劑, defoliant)는 발암물질로 알려진 다이옥신이 다량 함유된 맹독성 물질이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은 월맹군의 은거지가 되는 밀림을 고사시키기 위해 1961년부터 10년 동안 100만리터를 사용했다. 맹독성이 함유된 만큼 피해도 컸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일부 베트남인들의 경우 정상수치보다 200배나 많은 다이옥신을 인체에 함유하고 있으며, 베트남 국민 중 고엽제의 피해자가 수백만 명에 이를 것이라 밝혔다. 1994년 6월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군인 및 민간인 약 200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베트남전 참전했던 우리나라 장변 1만 명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UN은 베트남전 이후 고엽제를 사용 금지한 화학무기로 보고 사용을 감시하고 있다.

우리정부와 군 당국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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