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나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실망하지 않을 수 있잖아.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대사와 맞지 않게 청량한 친우의 미소를 보면서, 얼음이 지나치게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마신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 그러면 정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동의를 표시하는 일절의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그녀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물어온다. 그렇게 생각 안 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외면하기 어려워 마지못해 글쎄, 하고 내뱉는다.

그나마 뒤도 흐린 그 말에, 친구가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보이며 열을 올린다. 주식만 해도 그렇다고, ‘내가 이 주식을 사서 떼돈을 벌겠지’하고 생각하면 도저히 쿨해질 수가 없지만, ‘이 주식에 투자한 돈은 어쩌면 그대로 빠이빠이일 수도 있겠다’하고 생각한다면 객관적으로 자신의 투자를 바라볼 수 있으니 적기를 잡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연애도 그러하고, 시험도 그러하고, 결국은 모든 것이 그러하다고 한다. 그건 뭔가 너무 뭐랄까, 너무 부정적이잖아? 하고 반문했더니, 마냥 긍정적으로 살기엔 세상이 너무 암울하지 않니? 하며 또 예의 그 웃음을. 저게 23살이 할 대사인가 싶기도 하고, 하긴 23이 적은 나이는 아니지 싶기도 하고,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하긴, 그게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긴 한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래, 이성적이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며 그녀가 이쪽으로 쏠렸던 몸을 다시 젖힌다. 나는 그냥 컵에 서린 물방울들을 닦았다. 이성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감성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 헷갈리는 개념이다.


언제나 항상 최악을 생각하라며, ‘유비무환’을 이야기하시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유비무환. 좋은 이야기다. 최악의 경우까지 미리 생각해두고, 또한 그에 대비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당황해 허둥지둥하며 일을 그르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최악을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생각하느니만’ 못한 경우를 야기할 때도 있다. 최악의 결과를 방지하기 위한 ‘생각’이 외려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나는 최악을 생각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물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이성적인 행동이다. 친구 말대로, 결과에 지나치게 실망하지 않을 수도 있을뿐더러, 과정에 있어서도 객관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도우미가 될 수도 있다. 굳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방책’까지나 마련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장점을 뒤집을 만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에는 큰 리스크가 있다. 그것이 내가 최악을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최악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 난이도를 비유하자면, 타고 있는 배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 일과 같다. 배가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새 들어오는 물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퍼내야만 한다. 넋 놓고 있다가는 물귀신이 될 지도 모른다. 자신이 없다면 구멍을 뚫을 생각일랑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거다. 구멍을 뚫어서 어떤 어마어마한 이익이 생긴다 하더라도 말이다.


긍정의 힘, 시중의 많은 책들이 이것을 대단한 비밀이나 되는 듯 역설해서 이미 수십, 수백 권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긍정적인 말을 하라…. 어떤 책은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듯 이 내용을 반복하고, 어떤 책은 수많은 물의 결정을 찍는 정성을 보여 가며 이 내용을 증명하고, 어떤 책은 이것이 부자가 되는 방법이라고 은밀히 속삭이기도 한다. 심지어 내가 본 두껍고 딱딱한 경제관련 책조차 한 챕터를 내어 최악을 생각하면 최악을 받는다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결국은 다들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하면 된다”라고. 하면 된다, 하면 된다고 하는 그 생각이 정말 하면 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사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면 된다. 삼척동자도 아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는 모든 사람 중에 하면 다, 모두 다, 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해도 안 되는 경우도, 틀림없이 있다. 꿈으로 가득 찬 눈빛도 현실의 역풍 앞에선 허물어질 때도 있는 거다.

혁신의 90퍼센트는 실패한다고 한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혁신은 결국 실패하지 않고 살아남은 10퍼센트라는 이야기다. 90퍼센트는, 실패할만해서 실패한 것인가? 성공한 10퍼센트에 비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했던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도전에 꿈을 가지고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믿음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디 ‘하면 되는 것’인가.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인생은 종종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는 외로운 배 한척으로 비유되곤 한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사방이 푸른 물과 하늘 뿐, 지표는 어디에도 보이지도 않는다. 긍정하는 것, 혹은 낙관하는 것. 그건 마치 순풍과도 같은 것이다. 목표를 가진 이들을 나아가게 만드는 힘. 그것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좋은 바람을 타고 최선을 다해 나아간다고 해서, 정말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 오랜 항로의 끝엔, 정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실망과 좌절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친구는, 최악을 생각함으로써 그러한 실망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오랜 여정의 끝엔, 아무것도 없을 거야, 하고 출발한 배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최악을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 위의 돛단배. 그러한 처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악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 때나 남발해선 결코 안 된다. 지나친 낙관은 태풍처럼, 내 배의 돛을 부수고, 잘못된 항로로 배를 몰고, 심지어 배를 가라앉게 만든다.

바로 앞에 커다란 암초가 있더라도 그대로 나아가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다가 결국 제2의 타이타닉호라는 암담한 결과만 남게 되는 거다. 이렇게 의욕만 앞서 날뛰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이성이다. 차분하게, 예상대로 안 될 때를 계산하고, 준비하는 것. 최악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다. 암초에 부딪힐 때를 생각하라는 것. 가끔 바람이 예상 밖으로 날뛰거나 지나치게 잠잠할 때를 생각하는 것. 그가 이성적으로 감성의 돌풍을 조절하는 방법이 되어준다.

성공을 향해가는 항로에 있어 이 바람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부정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것과 꼭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악을 생각할 때는 정말로 ‘잘’ 해야 한다는 거다.


친구가 예로든 것 중에, 연애에 대한 것이 있었다. 여자 A를 짝사랑하는 남자 B가 사랑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고 고백을 한다면, 설령 여자A가 거절을 한대도 남자B는 충격을 덜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여자A가 뜻밖으로 고백을 받아준다면, 그 기쁨은 두 배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그럴싸한 이야기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 예시 자체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함이 있다. 남자B는, 여자A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는 순간, 예상했던 대로구나, 하면서 큰 상처 없이 여자A를 포기하게 되지 않겠는가. 결국 남자B는, 여자A의 대답 한 번에 모든 것을 맡긴 셈이다.

게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하는 고백이 적극적일 리가 없다. 이 케이스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 좋은 예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남자B가 여자A의 마음을 완전히 낙관하고 무대포로 돌진하여서, 혹시 있을지 모를 거절의 충격을 고스란히, 혹은 갑절로 받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되, ‘잘’ 생각하시란 거다. 예를 들면, 여자A는 결국 나에게 넘어올 거야,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이번 고백은 거절당할 수도 있다, 그런 최악의 시나리오도 생각해 보라는 거다.

이렇게 거절당한 남자B는 무기력하게 자신의 사랑을 포기할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약간 스토커 스멜이 나긴 하지만, 확실히 능동적이지 않은가? 남자B가 여자A와 사귈 수 있을 지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단 말도 있으니 (열 번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도 있다는 말도 있다만) 확률은 조금 높아진 셈이다.

친구 말대로 암울한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살기는 꽤 힘든 일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이 암울하다고 해도 반드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일도 있는 거다. 정말로 이루고 싶은 일이라면,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갖고 나아가야 한다.

나는 이 암울한 세상의 한명의 옵티미스트(Optimist 낙관주의자)로서, ‘철없다’, ‘생각 없다’, ‘대책 없다’ 온갖 비난의 손가락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결국은 최후에 웃는 사람 중 하나가 될 예정이다.

최악의 경우는, 과정에 있어서만, ‘유비무환’의 빛을 발하는 법이다. 친구의 의기양양한 웃음과, 얼음이 반이나 녹았어도 여전히 차가운 커피를 번갈아 보면서, 나도 웃는다. 그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 좋지. 좋구 말구. 그건 정말 낙관주의자에게도 꼭 필요한 거다. 밍밍한 커피 맛도 나쁘지 않았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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