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돈 주고 맞는다는 봉침 공짜로 선사받았으니 얼마나 좋아”
“비싼 돈 주고 맞는다는 봉침 공짜로 선사받았으니 얼마나 좋아”
  • 승인 2011.10.2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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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불광중학교→족두리봉→잣나무숲속



토요일 오전. 왠지 한방 크게 때릴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다. 3호선 연신내역에서 만난 지인들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오후에 천둥번개에 소나기 내린다는데 사고도 방지할 겸 적당히 탑시다.”
간밤에 절친한 지인과 늦도록 퍼 댄 탓에 지금도 비몽사몽인 기자가 오늘의 날씨를 알 턱이 없다.
“글쎄요, 아무렴 다칠 정도로 심하게 오겠어요? 하지만 최단코스로 타도록 하시죠.”
불광중학교 지나 불광사 가는 길에 마주치는 등산객들 손에는 저마다 길고 짧은 우산들이 쥐어져 있다. 배낭 속에도 우비들이 들어있겠지. 은근히 공포가 밀려온다.
‘그-까-이-꺼, 장사 첨하나… 비 좀 맞지 뭐.’






기자를 포함한 일행 3명은 ‘불광사지킴터’를 지나면서 우측으로 곧장 방향을 튼다. 족두리봉 뒤쪽으로 오르는 코스다. 이 길은 족두리봉 8부 능선까지 일명 깔딱고개다. 숙취해소를 위해선 이만한 코스도 드물다. 오늘은 족두리봉 정상 바로 아래서 우회하여 비봉능선을 타다가 향로봉 아래 걸레바위 밑에서 왼쪽 잣나무숲길로 내려가는 아주 짧은 코스를 택했다.
소나기에 대비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 지인이 어제 자기네 회사의 임시 휴무 날이라 집에 있기 답답하여 한강변 10킬로미터 마라톤을 빠른 속도로 달렸더니 다리에 이상이 왔단다.
옆의 또 다른 지인 “60대 접어 든 자기 나이 생각은 않고 그렇게 무식하게 운동을 해?” 소리에 다리가 안 좋은 지인, 애써 발아래만 주시하며 모른 채한다.


# 족두리봉


# 탕춘대가는길


지난주 혼자 독주한다고 비난받은바 있는 기자, 오늘은 처음부터 조심스럽다. 설렁설렁 올라간다. 아직까지는 주변의 경치들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보인다.
그나저나 도무지 땀이 안 난다. 옆 사람 눈치를 보니 자기체질에 딱 맞는 속도인지 사뭇 느긋하다. 어디 뒤통수 따가운 짓 좀 해볼까? 슬슬 시동을 건다.
커브길 돌면서 단숨에 그들의 시야를 벗어난다. 10여 분 내달리니 이마에 맺히는 굵은 땀방울들. 이 방울들이 잠시 후 잣나무 숲에서 정상주를 단숨에 들이키게 하는 원동력이다. 몸속에 남아 있던 한 사발의 잔재들,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황급히 사라진다. 지들이 무슨 황야의 무법자라고.
족두리봉 아래 산 중턱에서 지인들 기다리며 휴식을 취한다. 발아래 은평뉴타운이 오늘따라 외롭게 보인다. 주된 원인은 음산한 날씨 탓이겠지. 두 양반 나타난다. 별로 힘든 기색이 없다. 하기야 그 속도로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 비봉능선


# 향로봉아래걸레바위



하늘의 먹구름이 바람에 밀려 연신 북쪽으로 이동한다. 주변이 컴컴해진다. 이거 정상주는 고사하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나 모면 할 수 있을는지. 사뭇 귀추가 주목된다. ㅋㅋ
오르고 또 오르니 족두리봉이 머리위에 떠있다. 우회하여 왼쪽으로 내려선다. 추락방지 쇠사슬에 의지하여 내려서면서 바로 올라 쳐야하는 인공 돌계단이다. 이곳을 올라가면 반대편 산 너머 불광역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되는 비봉능선 시작점이다.
정확히 비봉이 1.88킬로미터, 향로봉을 0.76킬로미터 남긴 지점이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근처 사람들, 두터운 방한복들 꺼내서 껴입는다. 얇은 바람막이 점퍼하나 달랑 가져온 기자. 이래저래 걱정이 태산이다. “가져 온 돈도 없는데… 왜들 나만 갖고 그래.”


# 향로봉


# 향로봉과비봉


그나마 위안이라면 전날 내린 비로 땅바닥이 축축해 흙먼지가 날리지 않아서 좋다. 얼마 후 향로봉 아래 걸레바위 밑 5거리에 당도한다. 12시 방향은 향로봉, 1시 방향은 탕춘대 능선 길, 3시 방향은 구기터널 입구의 하산 길, 9시 방향은 불광사지킴터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피부에 와 닿는다. 지체 없이 불광사지킴터 방향으로 내려선다. 부지런히 내려가다 보니 약간의 딜레마에 빠진다. 잣나무 숲에서 한 사발하고 내려가느냐, 아님 그냥 내달려 비를 피하느냐. 현재는 비가 약간 흩날리는 수준이다. 선두에 서서 빠른 걸음으로 단박에 잣나무 숲에 안착한다. 일행들 숙고할 틈도 주지 않고. 넓은 돗자리 신속히 펴고 한 사발 세팅에 들어간다. 오징어미나리무침, 청량고추…. 오늘은 간단하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 때문에.
막걸리 1통 흔들어 딴 뒤 잔을 채운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술 몇 순배 할 순 있겠지.”
잔 부딪힌다. “무사히 하산을 위하여!!”
이때, 빗방울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적신다. 옆의 사람들 황급히 짐을 싼다. 우리도 따라 싼다. 정확히 딱 한 사발씩만 하고.
“형님 여기서 또 보네요.” 누군가의 부름에 분주하던 손길 멈추고 눈길 준다. 산 아래 테니스장 옆에서 주말농장 하는 후배다. 후배와 함께 온 옆의 지인도 기자와 산을 자주 왔던 선배 어른이다.
“아이구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나저나 비가 와서 정배 한잔 나누고 하산해야 쓰겄는디.”
“아우님, 반갑소. 잘 지내셨는가. 이 정도 비야 뭐 어째. 한잔하고 내려감세.”
인사와 동시에 빗줄기 굵게 변하면서 천둥번개 내리친다. 잣나무가지 아래에서 각자 배낭에 담긴, 비 맞이하는 도구들 챙긴다. 주(酒)님 소리가 쏙 들어갔다. 차원이 다른 주님, 하산길 잘 살펴주십시오.


# 향로봉능선


# 향로봉앞능선


이동전화와 디지털카메라 등 전자제품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배낭 속 깊숙이 쑤셔 넣고 하산 시작이다. 주변 일행들, 우산 쓰고 비옷 입고. 나 홀로 온몸으로 소나기 치받는다. 오늘따라 모자도 없이.
지하에 계신 작가 황순원이 봤으면 기가 찰 노릇이다. 머리도 허연 자가 무슨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처럼 비 맞고 난리야. “우산 없으면 비 맞는 거죠, 누구 염장을 쑤시는지요.”
침묵의 하산 길은 공포를 동반한다. 하늘에선 끊임없이 미사일 쏘아댄다. 우르릉 꽝 꽝꽝…
‘선린공원지킴터’를 지나니 드디어 주말농장 비닐하우스가 나타난다. 비닐하우스 안은 비교적 훈기가 돈다. 젖은 옷 벗어놓고 지인들 기다린다. 얼마 후, 일행들 속속 도착하고 넓은 식탁에 둘러앉아 술자리 차려진다. 정상주의 계속인지 하산주의 시작인지 불분명하다. 아무렴 어떤가, 무사히 내려와서 잔을 높이 들자는데….


# 잣나무숲


5명으로 시작된 자리는 주말농장 멤버들의 가세로 어느새 소대 인원으로 불어났다. 왁자지껄 소란 속에서 술잔들 도는데 ‘아! 따가’하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잣나무 숲에서 합류한 선배의 입술을 땅벌이 사정없이 쏘아댄 것이다. 잠시 뒤, 벌에 쏘인 아랫입술이 퉁퉁 부어오른다. 한때 모 여성 탤런트가 섹시미를 돋보이게 아랫입술을 까서 수술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두툼한 입술이 유행이 됐던 적이 있다.
“형님, 탤런트 모 씨처럼 섹시하게 보입니다. 비싼 돈 주고 맞는다는 봉침을 공짜로 선사받았으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웃기지 말고 술이나 한잔 부어주게.” 일행들, 유쾌하게 웃어젖힌다.
병원에 선배 안내해드리고 산행 후 즐겨 찾는 연신내 ‘연서시장’의 허름한 닭내장탕 집에서 나머지 회포를 푼다. 오전에 만난 최초의 멤버 3명과 조금 전 합류한 공주의 지인과 함께. 밖에는 여전히 굵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전광훈 선임기자 jkh414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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