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권선징악…

착한 흥부는 복을 받고 나쁜 놀부는 벌을 받는다. 계모와 언니들이 아닌, 불쌍한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난 것도, 사악한 왕비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했던 백설공주가 결국에는 왕자를 만나 독사과를 뱉어 낼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맥락이다. 착한 사람은 결국 복을 받는다는.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에서도 항상 악당들이 ‘두고 보자’며 꽁무니를 뺀다. 고전 소설도, 동화도, 만화영화에서도 당연한 진리인 것 마냥, 언제나 마지막에 웃는 것은 착한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가 이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플롯을 버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항상 착한 이들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은, 현대인들의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을 만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한 주인공이 끝까지 자신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묵묵하게 악당들의 횡포를 견디고 또 견뎌 끝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희열이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실감이 없는 작품들은, 수용자들의 내면 어딘가의 판타지를 자극하지 않는 이상 공감을 얻기 힘들다. 결국은 외면당하기 마련인 것이다. 주인공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도, 결국은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는 이야기도, 심지어는 끝내 악당이 승리하는 이야기도 지금에 와서는 그리 파격적인 것이 못 된다. 그런 식으로 현실의 씁쓸함을 이야기 하는 작품이, 외려 ‘권선징악’보다는 더 많은 것이 요즘의 작품들이니까. ‘권선징악’은, 동화나 만화영화와 같이 어린이들이 보는 분야에서만 아직 그 세를 유지하고 있는 판국이다. 어린이들은, 현실의 쓴맛을 아는 것보다 올바른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착한 것이 좋은 것이고, 악한 것은 나쁜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그만한 보상이 따르고 나쁜 일을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실상 현실이 그러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것’이지 않은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그러한 ‘교육’적 역할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권선징악’을 버릴 수 없을 뿐이다. 만약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전통적인 권선징악이라는 플롯은 아마 거의 자취를 감추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악당들의 괴롭힘에도 꿋꿋하게 견디고 착한 심성을 잃지 않는, 권선징악 이야기 속 ‘착한 사람’들은, 더 이상 복을 받지 못한다. 심지어 이러한 이야기 속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악당’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시대도 지났다. 그 괴롭힘이 통상적으로 합법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악당이 아니라, 당연한 일일 뿐이다. 외려 그에 현명하게 대처 못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당하는 사람도 잘 못이라는 거다. 오늘날, 처자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장이 친형에게 자신의 권리인 상속분을 주장하지 못하고, 능력도 의욕도 없이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면, 사람들이 그 형만을 두고 악당이라 손가락질을 할까? 아니다. 그 동생이 지적 장애를 앓지 않는 이상 뭐 저렇게 멍청한 사람이 있나 하고 동생 역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무능하게 저게 뭔가 하고 말이다. 세상이 변했다. 자기의 잇속을 챙기는 것은 심각한 불법적 행각이거나 지나치게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라면 더 이상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전혀 굽힐 줄 모르는 사람 역시, 비난을 받는다. 적당히, 라는 것도 알아야한다. 사회성도 올바른 신념만큼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 것이 현대 사회다. 이 같은 것들은 사실, 이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반증도 못 된다. 그냥,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일 뿐이다.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안타깝지 않다. 사회가 똑똑해지고, 똑똑한 만큼 보상해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착함’의 의미도 바뀌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착한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또렷하게 도덕적 신념을 지키고, 때로는 그 도덕적 신념을 위해서 똑똑하게 목소리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참고 참고 또 견디는, 바보같이 착하기만한 사람들은, 오늘날 그저 ‘바보’일 뿐이다. ‘착함’도 이제는 똑똑함이 겸비되어야지만 착할 수 있는 세상이다. 똑똑해야하고, 공부해야 하는 사회. 어딘지 조금 씁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 회의적이지 않다. 사회가 발전하면 구성원도 당연히 노력해야하는 것 아닌가. 전통적인 권선징악이 더 이상 사람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것과, 그들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조금 다른 일이다.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나는 그것이 크게 안타깝지는 않다. 물론 내 주변의 착한 사람이, 그로 인해 사업에 실패하거나 하면 개인적으로 안타깝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내 주관이 관여된 일이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런 사실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이야기다. 사업을 할 때 남을 너무 쉽게 믿는 것 역시 덕목이 부족한 것이고 그로 인해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본다. 바보같이 착한 사람들은, 사업을 벌인다거나, 특별히 어떤 작위를 하지 않아도 언제나 이용의 대상이 된다. 앞서 얘기한 흥부 놀부 사례만 보더라도 동생의 상속분을 혼자 가로채는 것은 분명히 불법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멍청하게 자신의 권리를 챙기지 못하고 있다면 오히려 동생이 더 크게 욕을 먹게 된다. 이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그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은 사회가 발전하는 게 이롭다 말다 하는 개념을 떠나서, 분명히 문제가 있다. ‘잘’ 살 순 없다고 해도, 살 수는 있는 사회여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바보같이 착한 것은, 어쨌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도 않는데다가, 악한 것보다야 나은 가치임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바보같이 착함’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정말로 제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덜 떨어진 착함만이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것은 선한 가치다, 하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피해를 입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믿은 네가 잘못이다.’식의 반응들은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선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똑똑하면서 착하기까지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힘든 사회. 이것은, 점점 똑똑해 진다는 것이 분명 긍정적인 발전의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반성이 필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얼마 전, “이젠 아이랑 노인도 못 믿겠어요” 하는 인터뷰를 뉴스에서 본 적 있다. 누군가의 선행을 악용하여 인신매매를 하는 수법이 인터넷에 뜨고부터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길을 잃었다며 우는 아이를 돕는 사람이나, 무거운 짐을 들고 계신 노인을 돕는 사람들을 노린 신종 범죄라고 한다. 누가 봐도 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선한 가치다. 이것은 흥부처럼 ‘바보 같은 착함’도 아니지 않은가.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악용하는 이런 사례들 때문에, 사람들은 자그마한 선행에도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히 선행을 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고민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은 목숨을 건 모험일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면 선행을 베푸는 것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기 쉬운 현대 사회에서, 그나마 있던 선의마저 거두게 만드는 두려운 일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죄 악해지고 있어서일까. 글쎄,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주위만 해도 좋은 사람들이 악한 사람보다 많다. 내가 매우 복 받은 인간이 아니라면,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모두 악당이 되어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지나친 회의론이다. 하지만,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확실하다. 불신사회를 타파하는 것은, 이러한 기사 밑에 달려 있는 ‘나쁜 놈들’하는 욕이나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처벌의 강화보다 앞서, 본질적으로 ‘착함’의 가치를 다시금 끌어올리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착한 가치들이 대접받는 사회, 그것이 가능해지고 나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힘든 사회의 개선 방법도 분명, 길이 보이지 않을까.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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