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그리워지는 한사발의 추억 “오늘은 하수상하여 그냥 갈까 하노라”
간절히 그리워지는 한사발의 추억 “오늘은 하수상하여 그냥 갈까 하노라”
  • 승인 2011.11.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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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의 서울 인근산 샅샅이 훑기> 불광역-구기터널-탕춘대-포금정사-비봉-승가사 그리고 명동



주말 이틀간, 가을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다. 한 주간 기다렸던 산행계획이 어그러진다는 생각에 마음이 별로다.

토요일 아침. 창문을 여니 상큼한 가을 내음이 코끝에 와 닿는다. 손을 내밀어 허공을 휘 저어 봐도 손바닥에 물기가 닿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기상청의 ‘횡설수설, 믿거나 말거나, 무슨 말도 못하게 해…’ 반복되는 시리즈. 평소에 과묵한 기자, 본인도 모르게 기상대를 향해 한 삿대질한다. “이런 거시기한 싸가지가 다 있나?”

암튼 물과 식빵, 감 등을 개나리 봇짐에 쑤셔 넣는다. 오후 3시엔 가까운 지인의 자제 결혼식에 참석해야한다. 간단한 간식꺼리만 챙겨서 나선다.



# 붉게 물든 단풍




우∼와, 불광역 2번 출구가 휭 하니 텅텅 비었다. 가을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이 시점에 외출금지령이라도 내렸남. 일기예보를 고분고분 따라준 시민들, 지금쯤 집에서 얼마나 분통들 터트리고 있을까.

구기터널 입구까지의 15분여 남짓 되는 거리 걷기. 온 몸에서 땀이 솟아난다. 평지를 걷는데 이렇게 더울 수가. 비온 뒤 날씨가 쌀쌀할 거란 말에 한겨울 산행복장으로 무장했으니….(이날 밤 뉴스시간 오늘이 100년 기상 관측사에서 11월 중 최고로 더운 날이었단다.) 이래저래 ‘놀고들 있네.’





# 족두리봉 가는길의 단풍


구기터널 입구 각황사 가는 돌계단 인근 작은 폭포 옆 이글이글 불타는 강렬한 단풍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사방이 벌겋다.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셀카로 자신들의 모습을 담느라 정신줄 놓고 있다. 그래도 이 날씨, 이 계절에, 이 운치에 약간의 정신 팔림도 권장할 만하지 않은가.

바짝 마른 계곡을 따라 뚜벅뚜벅 발길 옮긴다. 하지만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몸이 갑갑하다. 두툼한 겨울용 티셔츠를 벗자니 알몸이라,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이번 주는 치과에 다니느라 마눌보다 사랑하는 酒님도 끊었는데 이렇게 몸이 무거울 수가.

또다시 기상청을 떠올린다. 그러다 이내 고개 젖는다. 지나간 일인데 부질없이…. 그나저나 컨디션이 너무 안 좋다. “그러게 누가 酒님을 멀리 하랬나.”

나중에 예식장에서 만날 주당(酒黨)들, 그 등쌀을 어찌 헤쳐나갈꼬, 벌써부터 목하 고민에 빠진다. 주당이 술을 멀리하니 도통 만날 사람이 없다. ‘그러게 평소에 스님과 목사님을 친교 해뒀어야지.’



# 탕춘대 너머 인왕산이...


# 탕춘대 오솔길


앞마당 같은 향로봉 아래 오거리에서 땀 훔치며 물 한 모금 마신다. 탕춘대 쪽으로 우회한다. 오른쪽의 족두리봉이 오늘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멀리 남산과 인왕산이 뿌연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다시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배어나온다. 가을의 절정인데 사람이 별로 없어서다.

탕춘대 끝자락에서 포금정사 방향으로 틀어 비봉으로 향한다. 땀이 계속 흘러내린다. 포금정사 넓은 터에는 등산객들이 드문드문 모여 앉아 점심들 챙기고 있다. 벌써 오후 1시를 넘긴 시간이다. 여기서 쉬어가야겠다. 물개바위가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아 간식질 한다. 무언가 허전하다. 주머니속의 송곳이 삐져나오듯 배낭 속 막걸리가 튀어나와야 하는데. 낭중지추(囊中之錐)가 허하니 낙화유수(落花流水)가 그리워 구곡간장(九曲肝腸) 타는구나. 한 사발 굶더니 방랑시인, 객지의 바위 위에서 한 고생하네 그려.

비봉을 머리에 이고 사모바위에 도착한다. 여기도 한산하기는 매 한가지다. 약간 지체하며 호흡만 가다듬고 승가사로 내려간다. 예전에는 일행들과 이쯤에서 정상주를 마셨건만…. “세월이 하수상하여 그냥 갈까 하노라.”



# 포금정사


# 물개바위


만추(晩秋)의 낙엽들이 발아래 뒹굴면서 하산 길의 운치를 더해준다. 이래저래 가을은 저만큼 멀어져 간다. 구기동으로 내려와 큰 길 가에서 버스에 오른다.

명동역은 복잡했다. 퍼시픽호텔 인근 웨딩홀도 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5층 그레이스 홀. 평소 존경하는 지인의 자제가 늠름한 모습으로 입장한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졸업 후, 다시 약대를 나와 약사고시를 패스한 재원이다. 학교생활만 20년을 넘게 한 골수다.

뒤이어 천사처럼 훤한 얼굴의 신부가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사뿐사뿐 들어온다. 하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양가 어른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자고로, ‘주례사(결혼)와 치마(여자)는 짧을수록 좋고, 정치인과 기저귀는 자주 갈아 줄수록 좋다’며.

2층 연회석은 물 반 고기 반이다. 가장자리를 빙 돌아가며 푸짐한 음식들이 가득 놓여있다. 해산물 위주로 접시를 채워 우리 지인들 테이블로 찾아든다.

영등포 지인, “어이, 전 국장 왔구나. 어서 와서 술 한 잔 받게나.” “아닙니다. 일요일인 내일까지 참아야 됩니다.” “하기야 지난 주 치과 다니면서도 계속 푸더니만, 그때 알아봤지.”

얼마 전 모임에서 억지로 먹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남의 말 하듯이 하는 저 심보는 뭔감. 나잇살 자신 분이.



# 산 너머에 족두리봉이...


# 딱다구리


오랫동안 얼굴 못 본 지인들과 반갑게 인사 나누고 이런저런 근황들을 물어본다. 헌데 여지없이 술잔 권해온다. 술 사양하는 게 이렇게도 힘들 줄이야. 예전에 미처 몰랐다. 정작 괴로움의 끝은 어디인가.

몇몇 지인들과 광화문까지 걷기로 했다. 수많은 인파로 뒤덮인 명동을 빠져 나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길가 매장의 직원들, 중국과 일본 관광객들 잡기위해 총력 기울이고…. K-팝 선율이 흐르면서 거리는 뜨겁게 달구어진다. 국제도시 명동의 분위기가 한껏 되살아난다.

젊은이들이 살아 숨 쉬는 명동 한복판에서, 내 자신도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심장의 박동이 요동쳐 온다. 그 옛날 우리 학창시절에는 유네스코 뒤에 자리한 ‘학사주점’ 골목과, 중앙극장 뒤의 ‘튀김골목’이 대표적인 단골 술집들이었다. 지금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세시봉’의 노래들이 주류를 이룰 때다. 이장희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송창식의 ‘고래사냥’ ‘한번쯤’,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 양희은의 ‘아침이슬 등등.

무교동을 지나 청계천의 시작점인 동아일보 앞 청계광장은 때마침 열린 ‘서울 등 축제’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형형색색 찬란한 각종 모양의 등들이 불을 훤하게 밝힌 채 이곳을 찾은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외국인 할 것 없이 한껏 들뜬 표정들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다. 새로 온 서울시장이 살림살이 잘해서 지금처럼 시민들의 밝은 얼굴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 희뿌옇게 보이는 남산


광화문으로 접어들었다. “전 국장이 술을 안 하니 광화문 단골 호프집에서 입가심하기도 틀렸네 그려.” 영등포 지인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그렇다고 일생일대 처음 내린 기자의 단호한 결단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술 일주일 참는 것 가지고 무슨 일생일대식이나.)

“형님, 오늘만 날이유? 다음에 진하게 한잔 부어뿝시다.”
일행들,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광화문에 어둠이 짙게 깔린다.
 선임기자jkh414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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