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어둠속의 대화




어둠속의 대화 展(DIALOGUE IN THE DARK). 평소 미술 전시회는 자주 다녔지만, 어둠속의 대화 전은 그런 내게도 꽤나 생소한 스타일의 전시였다. 공연이라 하기엔 너무 조용하고, 전시라고 하기엔 너무 역동적인. 꽤 오래전에 다녀온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꽤 깊게 각인된 것은 아마 그 생소한 스타일에서 오는 충격도 한몫했으리라.

어둠속의 대화 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 150개 도시에서 약 600만 명 이상이 다녀갔고, 유럽과 아시아 미국 등 전 세계25개국에 상설전시장이 있을 정도로 꽤 유명한 전시로 2010년에 처음으로 한국에도 선보이게 되었다.

100% 어둠이라는 이색적인 소재의 `어둠속의 대화`는 지난 20년간 전세계속의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통해 단순한 시각장애 체험이 아닌 전시와 퍼포먼스가 접목된 신개념의 종합예술로서 진화하였다.

이 전시는 다른 전시와는 달리, 눈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전문 가이드들을 따라 전시되어 있는 상황들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이 전시의 구성이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조차 인지하기 힘든 완전한 어둠 속에서 준비된 상황들을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눈을 가리고 길을 걸어본다든지 하는 시각장애 체험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시각장애 체험이 단순히, ‘아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공감을 끌어내는 것에 그친다면 이 전시는 그러한 공감은 어디까지나 부수적 결과에 그치며 조금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각 중 단순히 하나만을 잠시 제거 했을 뿐인데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시각에 대한 감사, 또는 시각 장애에 대한 이해와 공감. 더 나아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시각에만’ 의존하고 있었던가 깨닫는 것은, 마치 조용한 폭발과 같이 짧은 순간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이 전시의 후기에 대해서 자세히 적는 짓은 하지 않겠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이들 중 이 전시를 접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잖은가. 물론 여기서 구구절절 전시의 내용을 죄다 스포(스포일러,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의 주요 줄거리나 내용을 관객, 독자, 또는 네티즌에게 미리 알려주는 정보를 뜻한다)해버린다 하더라도 사실 그 내용자체는 그 전시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긴 하다. 이 전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마음의 소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어떤 분은 벌써 7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교훈을 얻어가고 있다고. 분명 저렴하진 않은 가격이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며 말이다.

이 전시를 경험한 경영인들을 통해 많은 시각장애인의 고용이 이루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후기에서 ‘시각장애’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이 전시를 통해서 시각 장애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해와 공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부분에 대한 감상은 실로 일부분에 불과했다.

나는 평상시에도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내 기억체계는 거의 장면 장면을 연속해 저장하는 식이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어떤 향기를 맡으면 그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든지 하는 이야기처럼, 내 경우에는 어떤 상황을 기억하는데 색깔이나 눈으로 느껴지는 질감 따위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험기간에 무언가 막힐 때면 책에서 그 내용을 보던 ‘장면’을 더듬어 볼 정도로 나는 시각에 많이 의존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눈이 전혀 기능을 하지 않는 완전한 어둠 그 자체가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따뜻하고 편안한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에 완전히 압도된 나는 ‘남’을 생각할 여유가 거의 없었다.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한켠으로 밀려날 정도로 나는 상당히 불안해했다. 지금까지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다른 감각들은 갑자기 깨어나지 못해 허둥지둥했고, 시각 역시, 텅 빈 듯한 어둠속에서 무의미하게 눈동자를 굴리거나 초점을 달리 맞춰본다거나 눈을 깜박인다거나 하는 무의미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실제가 아니라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이라는 사실(심지어 내가 돈을 지불해서 경험할 수 있는)이 이 불안감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 줄뿐 내가 느끼는 불안감이 불안감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겁에 질린 내 시각이 이제는 환영을 만들어 낼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고요했다. 무섭지 않은 불안을 인지한다는 것은 찬찬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전시장을 나와, 빛이 있는 세계로 돌아오는 순간의 그 반가움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시각에 의존하는 내 습성을 고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재회하는 이 시각의 세계에서 나는 꽤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 정도로 심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다양한 감각 중에서도 시각에 많이 의존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

사실 인간의 입력기관중에 가장 넓고 큰 범위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 시각이다. 미각은 혀가 닿는 부위로 한정되고, 촉감은 인체가 닿는 부위로 한정되고, 후각은 냄새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전까지의 범위로 한정되며, 청각 역시 소리가 닿을 수 있는 거리로 한정된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갓 구워낸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칠면조 요리를 들고 당신을 부르는 듯 입을 벙긋 벙긋하고 있다. 이 사실은 미각 촉감 후각 청각의 범위를 모두 벗어났기에 오로지 ‘시각’으로만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이 된다.

시각이 없다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예민한 레이더가 사라진 셈인데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문제는 ‘지나치게’ 시각에만 의존한다는 점이다. 시각이 우리가 가진 오감 중에서 가장 뛰어난 감각이라면야 이것에 의존하는 것이 실상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본다.

물론 시각이 상실되고 난 뒤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테지만, 여기에서 다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눈이 수집하는 정보들이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을뿐더러 그 정보를 토대로 내린 뇌의 결론이 영 이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모양이 형편없는 요리가 맛있는 냄새를 낸다고 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만 해도 그렇다. 사실은 ‘요리의 맛’을 예측하는 것은 시각보다 후각이 더 잘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각이 수집해 온 정보를 우선 처리해서 먹기도 전에 입맛이 떨어지는 결과를 내곤 한다.

보여지는 것, 그러니까 모양이 형편이 없다는 사실은, 그냥 이 접시 위의 요리가 보기에 훌륭하진 못하다는 사실에 불과하다. 이것을 자의적으로 보기에 형편없으니 맛도 없을 것이다 하고 판단해버리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 틀림없다. 마치 이웃집 판사를 맹신하여 지역 주민의 건강검진도 판사에게 맡기는 꼴이 아니고 무언가.

시각의 전문분야를 넘어서는 다른 감각들의 분야까지도 시각을 앞세우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모양만 조금 떨어질 뿐 맛있는 요리를 맛 볼 기회를 놓친다’ 같은 귀여운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비극이다.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삶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틀린 채 살아가게 만든다. 당신의 판단이 사실과는 판이하게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모양이 후진 요리가 천상의 맛을 낼 수도 있으며, 예쁜 여자도 흉악범죄자일 수 있고, 당신이 어제 만난, 못생긴 소개팅남이 사실은 당신의 인생을 가장 빛나게 해줄 왕자님의 재목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똑똑하다. 우리가 간혹 멍청한 결정을 하는 것으로 우리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당신의 감각들이 수집해온 정보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언제나 똑똑한 결정들을 해낼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다. 못생긴 소개팅남이 성격도 거지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감각들에게 공평하지 못하다. 당신의 다른 감각들을 시각만큼만 믿어보라.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일 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진 못한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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