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 명절 설, 더 움츠러드는 구직자들

“친척들 보기 부끄러워서 어떻게 고향에 갑니까. 취직하기 전까진 절대 못가죠.”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을 앞두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젊은 구직자들에게 귀향이란 단어는 언감생심이다. ‘취직되지 않는 사회’는 취업 준비생들에게서 가족과 함께 흥겨운 명절을 보낼 권리마저 빼앗아가고 있다.
대학가에는 명절을 맞아 한층 더 움츠러든 취업준비생들만이 눈에 띈다. 그들의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각종 취업대비용 서적을 어깨에 걸머진 채 때론 고시원에서 때론 도서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에게 ‘설’이나 ‘명절’과 같은 말은 잊혀진지 오래다.





높아지는 경쟁률, 높아지는 난이도

휴학생인 김모(29) 씨는 장남 노릇을 포기한 지 오래다. 명절 때면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도 뵙고 성묘도 해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원하는 바를 이룬 뒤 당당하게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김 씨의 힘없는 얘기. 5년째 사법고시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김 씨는 한 학기만 남겨둔 상태에서 대학졸업을 미룬 채 ‘금의환향’의 그날만을 기대하고 있다.

그가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의 김 씨 고향집에는 삼촌 두 분이 명절을 쇠러 찾아오곤 한다. 그런데 김 씨에게는 삼촌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열심히 하니까 곧 좋은 결과가 있겠지’라는 덕담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부담이죠. 게다가 집안의 장손이다 보니, 여전히 ‘백수’로 보이는 것이 더욱 껄끄러웠어요. 그래서 그는 지난해 설부터 명절 귀향을 아예 포기했습니다. 연속으로 3차례나 명절을 건너뛴 셈이죠.”

올해는 특히 심적으로 힘든 명절이라는 김 씨. 지난해까지 함께 살던 동생마저 올 초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면서 따로 살게 됐기 때문이다. 안암동의 한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김 씨는 “그래도 큰아들인데 제 노릇을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며 “삼촌들 뵐 때마다 괜히 눈치도 보이고, 취업한 동생과 비교되는 것 같고 해서 고향에 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시에 합격하는 게 최대의 목표이고 그도 아니면 다른 뭐든 될 때까지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 씨는 이번 설 연휴에도 도서관을 찾아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올핸 꼭 시험에 합격해 고향에 내려 갈 것”이라고 했다.  

교육대 졸업생인 우모(30) 씨는 4년째 교사임용고시를 치르고 있지만 매번 낙방했다. 우 씨는 최근의 임용고시는 사법고시 수준이라며 혀를 찼다.

“면접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러야 해요. 사법고시 절차와 비슷하죠. 2차까지 합격해도 3차에서 떨어지면 다음엔 1차부터 다시 치러야 하죠. 경쟁률은 사법고시보다 낮지만, 수험생들의 수준이 비슷해서 체감경쟁률은 사법고시나 별 반 차이 없어요.”  

우 씨의 동기생들 중 절반가량은 임용고시에 합격해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상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친분이 두터운 동기생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향에 내려간다. 2년째 명절을 서울에서 보냈다는 우 씨는 “네 잘못이 아니다. 내려오라”는 부모의 설득에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우 씨는 명절이 지나고 난 뒤 고향인 포항에 내려간다. 지난 추석 때도 그랬다. 명절 때 찾아오는 친척들과의 조우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부모님들도 “친척들 보기가 정 민망하면 명절을 전후해서 내려오라”고 한다. 그는 “세뱃돈 받는 것도 민망하다”며 “명절을 피해 부모님 봬야 한다는 처지가 스스로도 참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임용고시 제도를 까다롭게 개정해놓은 정부에 대한 원망도 뒤따른다.





“저는 처음에 교대만 가면 교사가 될 줄 알았어요. 재수까지 해가면서 교대에 입학했는데….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부터 임용고시 경쟁률이 올라갔어요. 교대 출신이 아니어도 시험을 칠 수 있게 해버려서 이에 반대하느라 광화문 집회에도 자주 나갔죠. 이명박 정부 들어선 시험 차수를 더 늘렸어요. 게다가 도중에 떨어지면 이듬해에 처음부터 다시 시험을 쳐야 하잖아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수험생들은 대부분 하루 12시간 이상씩을 책상에 붙어 있다. 설날에는 특강도 없고 독서실도 대부분 문을 닫기 때문에 대학 독서실을 찾는 경우가 많다. 독서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한국사 모의고사를 풀어보지만 막히는 부분이 많다. 역사책을 많이 읽은 편이라는 박모(33) 씨는 “세세한 부분까지 외워야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경쟁률이 세지면서 변별력을 강화하기 위해 난의도가 높거나 지엽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출제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수험생들은 몇 년 전에는 행정고시에나 나왔을 법한 문제가 요즘은 9급 시험에 출제됩니다.”

김 씨는 설 연휴 기간에 한국사를 정리하는 게 목표다. 보통 한국사 수험서 분량은 1500쪽 정도. 경쟁률이 세지고 강사들 간 학생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험서도 해가 갈수록 두꺼워졌다.

“9급 교육행정직을 준비 중이에요. 2년 정도 됐어요. 작년 설부터는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명절 때 얼굴 한 번 안 비친다며 반 농담으로 ‘건방지다’고도 하지만, 워낙 경쟁률이 높은 시험이다 보니 이해해주는 눈치랍니다. 오늘은 오전 8시부터 점심 때까지 담배도 한 대만 태우고, 화장실도 한 차례만 다녀왔어요.”

김 씨는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했다.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도서관 사서가 꿈이었다. 그러나 사서시험도 경쟁이 치열해 보통 3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야 한다. 또 된다고 해도 계약직이 대부분이어서 안정된 생활을 도모하기 어렵다. 임씨는 고민 끝에 졸업과 동시에 교육행정직 9급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문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가를 좋아하는 임씨는 빨리 합격해서 여가 시간에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고 싶다고 했다.


쫄지 마, 백수?

“트레이닝 바람으로 식당에 가서 벽에 걸린 TV에서 나오는 명절특집 개그프로그램이나 보며 설을 나야겠죠.”

대학을 졸업한지 5년이나 됐다는 조모(34) 씨는 돈이 궁할 때면 거리에 깔리는 ‘벼룩시장’을 찾아 나선다. 흔히 인터넷을 통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지만, 김 씨 나름의 비법에 따르면 아침 일찍 배포되는 벼룩시장에서 오히려 건질 수 있는 알바가 많다.

“명절 시즌이면 특히 돈 되는 일거리가 많아요. 너나 나나 모두 고향에 내려가다 보니 노동을 필요로 하는 알바 자리가 많아요. 극장이나 식당, 하물며 공사현장까지 단기 알바들을 쓰거든요. 게다가 명절 때다 보니 급여도 센 편이죠.”

조 씨는 공무원시험, 언론사시험 등을 치러봤지만 매번 낙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시험을 치른 것은 아니었기에 절망하진 않았다. 고향인 광주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을 부모도 잘 알고 있다. 조 씨는 대학 시절에도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고향엘 잘 내려가지 않았다. 가족?친척이라는 조직에 어릴 적부터 적응을 못했다. 조 씨는 그동안 살아오며, 5년 동안 알바를 하며 느낀 건 ‘창업의 길’이라고 했다.     





“벌어놓은 돈은 없지만, 아이디어를 많이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설엔 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는데 괜히 눈치만 보이더라고요. 그런 거 있잖아요. 어른들의 ‘젊은 놈이 일할 생각 안 한다’는 눈초리 같은…. 당장은 무슨 명분이 있어야 고향엘 가죠.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으나, 휴대폰에 달고 다니는 이어폰을 ‘분리형’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어폰이 하도 꼬이니까, 꼬일 때마다 좌우로 갈라지는 부분을 분리해버리면 금방 펼쳐질 거 아니에요.”

조 씨는 한 때 기계공학도였다. 대학 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의 전공을 살릴 날이 왔다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는 “특허를 따내고, 당당하게 고향에 내려가는 게 작은 소망”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행복한 고민(?)을 하는 백수들도 있다. 공무원시험에 이미 합격했지만 임용 시기가 늦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백수로 머물고 있는 이들이다.

“합격만 하면 백수에서 탈출할 줄 알았는데. 언제 임용될 지 기약도 없어 더 답답하네요.”

세 번째 도전 끝에 지난해 여름 9급 공무원 임용시험에 합격한 김모(29) 씨는 명절이 즐겁지만은 않다. 시험에 합격하고도 수개월째 임용이 되지 않는 때문이다. 그는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이제 당당한 직업인으로 친구, 친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은근히 지난 추석에 이어 이번 설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임용이 미뤄지면서 여전히 백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공무원 구조조정 여파 때문이죠. 임용시험에 합격하고도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예비 공무원들이 많아요. 정원을 대폭 감축하면서 신규 공무원 임용이 계속 늦춰지고 있는 셈이죠.”

정원은 줄였지만 정부가 인위적 감축은 하지 않기로 하면서 기존 공무원들이 정년이나 명예퇴직 등으로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예비 공무원들의 신규 임용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김 씨가 올해 임용되더라도 할 일 없이 대기 상태로 ‘눈칫밥’을 먹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행안부에 전화하면 늘 같은 소리예요. 연내에 임용될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저처럼 묻는 합격자들이 많다고 해요. 첫 출근도장 찍기가 참 힘드네요.”

명절 때도 당당하게 고향 앞으로 갈 수 없는 이들. 이들이 금의환향하는 날은 올 수 있을는지.

공민재 기자 selfconso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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