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카페, 사람들, SNS

 



1.
원두를 갈아 커피를 직접 끓여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카페란 신기한 장소다. 사람은 낯선 장소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늑한 공간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커피 향이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들, 편안한 의자의 쿠션, 적당히 느긋해지는 조명과 음악소리까지. 이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여유로움과 익숙하지 못한 오픈된 장소 특유의 불편함이 공존한다. 이러한 특징은  어떤 일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하지만 큰 피곤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과제를 하거나, 공부를 할 때, 혹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독서를 할 때도 카페를 즐겨 찾는 이유다. 집 책상머리에서 앉아서 무언가를 시작하려하면 반드시 극복해야하는 일련의 고민들-조금만 있다가 할까, 아 하기 싫어, 오분만 쉴까, 따위의-을 겪을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 역시 공부하기에 좋은 공간이지만, 때로 그곳은 너무나 지나치게 열의로 가득해 그 기운에 눌려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지체 없이 짐을 싸서 카페로 간다. 한잔에 오천원 가까이 하는 커피한잔이 제법 비싼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무언가를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생각하면, 그만한 비용에도 크게 억울한 느낌이 없이 경쾌하게 지갑을 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PC방 한 시간에 천원 돈이니, 카페에서 서너 시간 공부하는 게 그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머리가 복잡하여 혼자 카페에 갔다. 이번에는 딱히 책이나 다른 것들을 지니지 않은 채로였다. 통신사 멤버십 공짜 아메리카노를 한잔 받아서, 별 생각 없이 머리나 식히러 나선 셈이다. 

2.
카페에 이렇듯 생각 없이 오게 되면, 주로 사람구경을 한다. 보통 카페의 사람들은 데이트를 하거나, 잡담을 떨거나, 2인 회의를 하거나, 혼자서 또는 함께 공부를 하거나, 외국인과 함께 회화 과외를 받거나 한다. 내가 카페를 애용하기 시작한 것이 스무 살 때부터니까, 해가 지날 때마다 카페의 모습도 많이 달라짐을 느낀다. 당장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카페의 수가 전에 비해 괄목상대하게 늘었다는 점이다. 골목마다 카페가 포화상태다. 카페의 수적인 증가뿐이 아니다. 카페 안을 들여다보면 예전엔 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에는 그 외의 다른 모습들도 많이 눈에 띄는 것 같다. 카페에 대한 인식변화가 확실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카페는 더 이상 ‘차나 한잔 마시러…’ 가는 곳만은 아니게 되었다. 대학가의 카페들은 아예 시험기간이 되면 임시로 야간 운영 시간을 늘리거나, 24시간 운영을 하기도 하니, 공급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카페는 거주공간 및 작업실 외의 또 다른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집 밖에서의 휴식, 또는 작업실 외에서의 업무 따위가 가능한 공간으로 말이다. 카페가 늘어나고 학교 근처의 카페에서 사람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면서 새삼 카페가 도서관화 되어가고 있다고 놀라워한 것도, 이제는 옛날의 일이다. 이젠 그도 그다지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포터블 IT기기들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자, 카페 역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이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카페들이 무료로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등, 수요층의 변화에 맞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정도다.

3.
스마트폰이 사람들에게 낯설고 어려운, 게다가 비싸기까지 한 기계라는 인식에서 점차 ‘유용한’ 핸드폰이라는 인식으로 바뀌면서 덩달아 활발해진 것이 바로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사람들이 저마다 한 손에 컴퓨터 못지않은 조그만 기계들을 당연한 듯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SNS가 대중화될 기반을 마련했다. 그 예로 SNS의 대표 격인 페이스북, 트위터 등은, 우리나라에 상륙한지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던 시점과 맞물리는 1년 전쯤부터였다. SNS는 효율적인 대화방식을 제공한다. 한번 글을 게시하면 여러 사람이 접근 할 수 있고, 이에 대해 1대 1과 거의 흡사한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는, 1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사람들의 소속에 대한 욕구를 가장 쉽고 간편한 방식으로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해 새로운 인간관계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1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오히려 피드백은 1대 1일 때보다 더 빠르고, 깊을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 중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만한 사람이 한명쯤은 있을 확률이, 단 한사람에게 이야기 했을 때 그 한사람이 더 빠른 피드백을 주거나, 혹은 주제에 대한 흥미가 있길 바라는 것보다 오히려 높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력을 지닌 SNS는 빠른 속도로 대중에게 파급되었다. 일부에서는 중독현상을 호소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들은 이 효율적인 네트워크를 컴퓨터에서 내 손안의 핸드폰으로 옮겨와 언제나 손에 쥐고 있으려 하고, 잠자는 시간을 빼곤 핸드폰 속 SNS에 항시 대기중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사람이 늘어나다보니 많은 이슈와 뉴스들이 SNS에서 탄생되고 또 전달된다. 자연스럽게 SNS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도태되는 느낌이 들어서 SNS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SNS의 몸집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알고리즘인 것이다.

4.
머리를 식히러 생각도 준비도 없이 카페에 들어서서, 메뉴중 제일 달콤한 커피한잔을 시키고, 제일 푹신해 보이는 소파를 찾아서 앉았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작은 (때론 작지 않기도 하지만) 액정을 들여다보며, 약간 멍한 표정으로 미미하게 웃거나,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 작은 기계들이 하나의 종교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딱히 할 것도 없고 해서 핸드폰을 꺼내 광신도 중 하나가 되길 기꺼이 자처한다. 내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에 다시 코멘트를 달고, 지인들의 게시 글에도 ‘좋아요’를 몇 번 누르고 나니, 마땅히 또 할 것이 없다. 다시 사람 구경. 저쪽의 창가 사람들은, 쪼르르 앉아 있지만 일행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바 형식의 창가 자리가 편해서인지 혹은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싶진 않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창가에 졸망졸망 앉아서 저마다 다른 대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집중하는 대상은, 책도 있고, 페이퍼도 있고, 스마트폰이나 패드, 혹은 노트북 여러 가지였지만 그 모습이 하도 비슷비슷해서 마치 그곳에 앉은 사람들이 죄 한 무리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도 액정을 들여다보느라 말을 잊었다. 종종, 이것 봐, 하며 웃으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거나 하지 앉았다면, 그 둘은 어쩌다 실수로 잘못 동석한 일면부지의 남이었다고 해도 믿음직하게, 그렇듯 서먹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손가락의 커플링이 반짝이는 걸로 봐선, 확실히 커플이었다. 혼자 앉아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등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록 둘이었지만 그들은 위화감 없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세우고 있었더니 -물론 엿듣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여자는 SNS를 하는 중이고, 남자는 기사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두명 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걸고, 꽤 다정하게 서로에게 몸을 기울인 채 마주앉아 있었지만, 어쨌거나 둘의 교류는 ‘이것 봐’ 이게 다였다.

5.
카페를 대하는 수요층의 생각도, 또 이러한 수요층에게 공급하는 서비스의 폭도 해를 달리하며 조금씩 모양을 달리해왔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카페가 바로 오픈된 공간이라는 점이다. 나에게도 오픈되어있고, 남에게도 오픈되어있는. 물론 카페에서 제공하는 음료 등을 구매하는 손님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처음 언급한, 내가 좋아하는 카페 특유의 여유로운 낯섦도 이러한 특성에서 온다. 자주 가는 카페라고 해도, 장소 자체는 익숙해질 수 있지만 그 안은 각기 다른 타인들이 모여 있기에, 늘 상황은 내 통제에서 벗어난다. 최소한의 통제를 허하는 열람실의 칸막이 같은 것도 없다. 사람들은 이런 개방성 속에서, 자신의 무리와 소통하기도 하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도 한다.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카페엔 ‘수다 떠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 혼자 집중하는 사람이 얌전하고 조용한 탓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점도 감안해야한다. 어쨌거나 카페가 기분 나쁘지 않은 소음으로 가득한 이유는, 사람들이 공간을 대화로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카페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면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 카페가 변화하면서, 그 안의 모습도 다양해졌지만 카페는 결국, 오프라인의 소통의 장인 것이다. 다만 그 외의 작업을 하는 모습들이 이젠 더 이상 이상하거나 낯설지 않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이 오프라인 소통의 대표 격인 카페라는 장소에서, 연인이라는 특별한 관계의 두 사람이, 마주 앉아 각자의 온라인 소통을 즐기고 있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의, 그것도 그 현대의 최첨단에 유행하는 SNS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이 어떤 식으로 구식의 것을 앞지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는, 연인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SNS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더 매력적인 때에 이른 것일까.

6.
새로운 대화수단이 나타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것이 효율적이고, 또한 새로운 문화의 재창출을 낳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이는 반겨야할 일이다. 하지만 역시, 기존의 대화가 사라지는 것은 슬프다. ‘사라진다’는 표현이 너무 회의적이라고 한대도, ‘줄어든다’는 것 역시 슬프긴 마찬가지다. SNS를 애용하는, 최첨단은 아니더라도 꽤나 빠릿한 젊은 세대에 속하는 나로선, 이런 변화를 대놓고 안타까워하기도, 반겨하기도 애매하다. 나는 다만 SNS가 잠깐의 유행으로 끝나는 것도 상관없고, 이렇게 쭉 나아가 대체하기 힘든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전 세대층에 공유되는 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애매한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그것만은 확실히 얘기할 수 있다. SNS가 우리의 성대가 울릴 일을 뜸하게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SNS가 아무리 효율적이라도, 효율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마주앉은 연인의 사소한 말이나 숨, 눈빛 같은, 사소하지만 사실은 전혀 사소하지 않은 감성 같은 것. 이런 것이 사라지는 것, 또는 줄어드는 것은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쩌면 나는, 오늘도 피식피식 웃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이게 단순히 곧 끝날 유행에 불과하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애매한 중립, 실격인 셈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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