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창문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너희 거기 있니?
늦은 밤 창문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너희 거기 있니?
  • 승인 2012.03.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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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길고양이 그리고…




학교가 있는 동네로 돌아왔다. 하긴 이곳에 온지도 한 석 달쯤 되었으니 이제야 이렇게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 개강시즌을 맞이해서 동네가 북적인다. 신입생들이 새살거리는 학교가 이상하게도 낯설다. 하긴 원래 방학기간 학교의 한산함 같은 것보다야 이것이 실로 ‘학교’다운 모습이 아닐까. 날씨는 아직 쌀쌀하다. 해가 떠 있을 때야 꽤 포근하곤 해서, 아 벌써 봄인가 싶다가도 해가 지고 나면 다시금 쌀쌀해진다.

어둠이 내려앉고 나면 봄 같은 신입생들과 그와 어울리는 무리들이 골목골목 술집이며 어딘가로 다 찾아들어가 버리고, 학교 안은 다시금 한산해진다. 해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 지난 방학과, 지난겨울들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듯 스멀스멀 대학가를 덮는 듯한 느낌이다. 어수선한 겨울의 끝자락이다.

주로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요즘은, 나도 한때는 저런 새살스러운 신입생이었다는 것도 까마득한 기분이다. 그저 조금 북적이는 학교가, 여대생들의 머리칼 끝에 매달린 향기로움 따위가, 아직도 두터운 외투가 아니면 벌벌 떠는 나에게 이제 너도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일러주는 듯하다.

볕이 좋아 잠깐 산책삼아 동네를 걷고 있으면, 사람들이 와글와글한 모습이 낯설다. 학기 중의 휴학생은 가게 주인이나 아르바이트생 혹은 동네 주민과도 달라서, 마치 이 모든 풍경에서 한 발짝 떨어진 채 관조하는 관객이 된 듯한 감상이 든다.

지각이라며 달려가는 학생의 뒷모습에서 젖은 머리를 채 말리지 못하고 뛰어가는 옛날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선배 선배 깔깔 웃는 신입생들의 앳된 모습에서도, 신입생과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2,3학년들의 빠른 걸음에서도, 어딘가 조금씩 옛날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이 북적함이 마냥 신경질스럽기만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동네에는 고양이가 별로 없다. 그것은 사람이 많아지든 적어지든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 정 붙였던 길고양이-이미 사람들 손을 많이 타서 일반적인 길고양이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 무슨 해코지를 당했는지 아주 어린 꼬마들을 유독 무서워하던 녀석이었다. 아니 무서운 건지 귀찮은 건지, 사람인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리사이로 부비적거리며 애교를 떨다가도 그저 아이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나면 휙하니 지붕위로 올라가버리곤 했다. 아래에서 야옹아, 고양아, 부르는 꼬마 애들을 알기 힘든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사뿐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다. 구경하려고 몰려왔던 꼬마 애들이 실망해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사라진 곳과는 다른 엉뚱한 방향에서 불쑥, 애옹하고 나타나는 신출귀몰함을 보여줬다.

나는 그냥 그 애가 좋았다. 어머니는 길고양이들을 만지거나 옷에 고양이털을 붙이고 오거나 하면 굉장히 성을 내셨지만, 나는 그 고양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애옹애옹 애교를 떨고, 무릎위에 앉아서 그릉그릉 목청을 울리는 것이 좋았다.

제법 비싼 사료를 사서 고양이에게 먹이고, 이따금 간식도 사주고 하면서, 그 애의 친구들(?)과도 안면을 트게 됐다. 검은 고양이 몇 마리와 늙은 암컷고양이, 소년기를 마치고 제법 남자냄새를 풍기는 노란 고양이.

그 애들과 친해졌다곤 해도, 나는 그네들이 어디에서 머물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건지 알지 못했다. 밤늦은 시간 독서실에서 귀가하는 한산한 찻길에서 저들끼리 옹기종기 장난치고 있는 때에도, 슈퍼 앞 차 밑에서 애옹! 소리를 내며 머리를 내밀던 때도, 조금은 많이 떨어진 곳까지 나를 쫓아왔을 때도, 그들의 존재가 뜻밖의 일인 경우가 많았다. 규칙적인 듯 보여도, 어떤 법칙에 의한 것인지 인간들은 알기 힘든, 자신들만의 스케줄과, 또 길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걸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은, 그들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들이 불쑥 나타나 돌연 발밑에서 야옹, 하고 울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을 자려 누우면, 창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요즘엔 어느 골목엔가 깨어서 밤을 달리는 대학생들의 소리들에 묻혀 잘 듣기 힘들지만, 조용한 밤이면 그네들의 목소리가 바로 창 앞에 들리듯 생생하다. 고양이들이 싸우는 소리나, 혹은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 수다 떨듯 두 마리가 번갈아 앵알 거리는 소리. 그럼 창문을 훽 열고 너희 거기 있니? 찾고 싶어져 이불 속에서 발가락이 꼼질꼼질한다.

이 동네에서 고양이를 마주친 것이 딱 두 번. 두 번다 덩치 크고 사나운 젖소 무늬 고양이였다. 사람을 그다지 무서워하지도 않고, 느린 걸음으로 슬쩍 나타났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휙 사라져 버리는 고양이었다.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고양이의 등장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걸음을 멈춰 고양이를 바라봤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콧방귀를 뀌듯 휙 사라졌다. 석달 간, 그 고양이 하나뿐이니 이 동네엔 고양이가 별로 없는 게 틀림없다. 그나마 그들이 이 동네 어딘가에 ‘있긴 있구나’ 싶은 때가 이렇게 밤늦게 창밖으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뿐이다. 창밖에서 들리는 소리의 다채로움에 놀라 창문을 열어 찾아봐도 골목은 그저 깜깜하기만 하고, 고양이 소리는 언제나 내 생각보다 멀리 있다. 마주친 적도, 멀리서 발견한 적도 없지만, 그네들은 저기 어둠 속 어딘가에 늘 있었고, 지금도 아마 어딘가 애옹애옹 울고 있을 테다.

사람들이 낸 길이라는 것은 효율적이고 반듯하다. 널찍하고 복잡하다. 사람의 길로도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고양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론 사람의 길이 미처 뚫려있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는, 사람들의 길보다는 자신들의 길을 애용한다.

우리 동네에 고양이가 별로 없다는 말은 사실 확실한 말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동네엔 고양이가 아주 많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내 생각보다는 많이 있을 것이다. 고양이들은 인간이 잘 모르는 나름의 길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건물과 건물사이의 담이나, 지붕, 물받이 통로, 혹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어떤 숨겨진 장소가 그들의 길이다. 그들은 원할 때만, 사람들의 길에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서 이 동네의 고양이들은 꽁꽁 숨어서 감질나게 목소리만을 들려주는 것일까.

홍대는, 고양이의 천국이다. 어디에나 고양이가 있다. 여기 저기 길고양이를 위한 밥그릇과 물그릇이 놓여있다. 고양이가 어슬렁거려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다. 고양이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양이가 그들의 길을 버리고 사람의 길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먼 곳을 돌아가진 않는다.

홍대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고양이는 그것을 안다. 티나게 반가워 할 줄도 모르는 동물이지만, 새침하게 맘을 열어 보이는 녀석들이다. 밥그릇과 물그릇, 덤덤하고 천연덕스럽게 사료에 머리를 파묻는 고양이. 그래서 홍대에는 고양이가 많다. 아니 홍대에선 고양이를 많이 ‘볼 수 있다’.

고양이는 자신에게 해를 끼쳤던 기억이 있는 대상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양이를 자주 볼 수 있는 동네라는 것은, 그곳 사람들이 고양이들에게 상냥하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홍대에서 평화롭게 볕을 쬐는 고양이나, 태평하게 앉아있는 고양이를 볼 때면 마음이 훈훈하다.

그러고 보면,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한다. 나는 세대가 달라, 그나마 고양이에 대해 친숙하지만, 옛날엔 고양이가 요물이라며 불길하게 여겨졌다. 길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칭하는 것만 봐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안 좋은 인식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우리나라의 고양이들은 사람들의 길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을까. 고양이가 어째서 도둑이 되어야 했을까. 우리 동네엔 어째서 고양이가 별로 없을까. 어쩌면 서울의 고양이들은 모두 홍대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인간들이 강에 접해있는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고양이의 길들은 사실 비밀스럽게 모두 홍대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 모르게 매일 조금씩 조금씩 홍대로 향하는 길을 가고 있는 거다. 우리 동네의 고양이들이 줄고, 홍대의 고양이들이 늘고 있는 게 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고양이들도 자신이 ‘도둑’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은 거다. 숨어서가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곳. 이따위 동화 같은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도 유치하여 우습다.

크게 해를 끼치는 동물도 아니니, 공생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닐 텐데. 우리 동네에서도 고양이들이 다가오는 봄날, 평화롭게 눈에 띄는 담장 위에서도 볕을 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들과 공생하는 것. 한국의 고양이들에게는 사실 그다지 쉽지만도 않을 일이겠지만, 그네들에게 모진 빗자루나 돌팔매질 대신 따뜻한 시선이 던져진다면, 뭐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지 않을까.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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