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애완견 그리고 유기견





얼마 전 우리 동네에 네다섯 마리의 개들이 우르르 몰려서 다니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었다. 조금 어둑해지거나, 혼자 골목을 거닐 때 이들을 만나게 되면, 역시 조금 무서웠다. 사실 커다란 개들도 아니고 누가 봐도 딱 애완견의 크기지만, 그래도 혹시 물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닥 동물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단지 구경하고, 겉모습을 귀여워 해주는 정도라면야 나 역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례로, 누군가 내게 개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나는 개를 좋아하진 않는다만, 귀여운 개들이 내 눈에도 귀엽긴 하더라 할 것이다. 눈도 채 못 뜬 강아지가 꼬물꼬물 거리는 모습이나, 티컵에 쏙 들어가는 조그만 강아지의 동글동글한 눈 따위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절로 탄성이 튀어나온다. 깨물어 주고 싶은 귀여움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귀엽고 예쁜 것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그렇듯, 나 역시 그런 동물들의 ‘귀여움’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말로 ‘좋아’하는 것일까. 겉모습을 좋아하는 것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귀여운 강아지를 보며 어머 귀엽다 감탄할 순 있지만, 딱히 그들을 나서 보호하고 싶거나 돌봐주고 싶거나 하진 않은 나는, 적당히 ‘무관심’한 사람에 속한다. 그들의 존재에 크게 해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득도 되지 않는 그런.

내 친한 친구 중에는, 어릴 때부터 줄곧 개를 키워왔던 친구가 둘이나 된다. 우리 큰이모도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개를 키우셨고.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참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이렇게 예쁜 애들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냐고. 심드렁하게 구는 내가 영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는 개들이 그저 예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냄새도 나고, 털도 날리고, 금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경을 써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언제나 사진처럼 얌전하게 예쁜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 같이 그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점들을 다 포용하면서까지 그네들을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생명의 무게다. 물건과는 다른 생명의 질량. 그것이 부담스러운 사람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차이다.

예쁜 것을 보면 가지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욕망이다. 물건이라면야, 겉모습이 예쁘거나 귀엽다거나 하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을 가져야 하겠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물건은 대개 누군가의 소유로 있는 것이 보통이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소유 그 자체에 큰 부담이 없다. 판타지 소설 속의 절대반지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너무 많이 가지게 되어버리는 것만 아니라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사람에게 주는 부담은 아주 미미하다.

예를 들어 예쁜 그릇을 하나 샀다 가정해 보자. 그 그릇이 내 소유가 됨으로 인해 응당 발생하는 책임 같은 건 거의 없다. 내가 산 그 그릇은 영원히 찬장 속에 있어도 되는 일이고, 되팔아도, 부주의로 깨뜨리거나, 단순히 재미로 깨버린다 해도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다.

물건이란 이렇듯 가볍다. 그래서 물건은 쉬이 ‘소유’된다.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많은 물건들은 애초부터 소유를 목적으로 세상에 태어난다. ‘내’ 핸드폰이 그러하고, ‘내’ 노트북이 그러하고, ‘내’ 옷이, ‘내’ 책이, ‘내’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나는 계속해서 소비하고 소유하면서 살아왔다. 이 세상에 ‘내’가 붙은 내 소유물들이 점점 늘어나는 만큼, 나는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에 점차 익숙해져간다.

특히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받는 것은, 그야말로 정형화된 ‘소유’의 방법이다. 지금 당장 요 밑 24시간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뭐든 하나를 집어 들고 카운터에서 카드를 긁고 나면, 내 계좌에서 그만큼의 돈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그 물건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게 산 내 소유의 물건을 내가 당장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대도, 그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내 소유니까 말이다.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한 내 소유의 물건을 내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은, 소유자의 권리다.

다들 그렇게 물건을 계속해서 소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소비’를 통한 ‘소유’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면, 돈을 내고, 가지면 된다. 간단하고 가벼운 절차다. 가지고 싶은 이유 역시 큰 고민이나 생각을 필요로 하진 않는다. 물건이 가벼운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생명과 물건은 다르다. 문제는 사람들이 ‘소유’에 익숙해져 버렸다는 점이다. 심지어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얻게 된다면, 습관적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물건’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집 안에 생명을 하나 더 들이는 건, 단순히 물건을 소유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그저 예쁜 그릇 하나 사는 것과는 아주 본질부터 다른 일이라는 거다.

그런데 어떤가, 그 과정이 크게 다를까? 예쁜 그릇을 보고, 아 저것이 갖고 싶다 생각이 들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그것과 맞바꾼다. 그리고 나면 어떻게 처분하더라도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는 내 소유의 그릇이 된다. 이렇게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키우고 싶은 어떤 동물을 돈과 맞바꾸면 끝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구매의 산물을 물건처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산, 내 소유의. 물건처럼 생명들이 진열되어 있다 보니, 마치 물건을 쇼핑하듯 생명을 구매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부추긴다. 예쁜 그릇을 본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예쁜 강아지를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예쁜 그것을 가지고 싶어, 그것을 구매한다. 생명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쁜 것을 사서 가질 뿐이다.

나는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나는 생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도 대중적인 미적 안목이 있으니 사람들이 예쁘다 말하는 애완동물들은 내 눈에도 역시 예쁘게 보인다.

하지만, 그게 예쁘다고 해서, 또 순간 가지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해서, 그것을 내 소유로 만들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접시 따위가 아니다. 나는 개 짖는 소리도, 배설물 냄새도, 사료 값도, 날리는 털도 뭐하나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사람들이 마치 접시를 사듯 생명을 생각 없이 구매하고는 자신이 생명체의 무게를 부담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는 것은, 이미 늦은 후다. 그네들은 물건이 아닌지라, 후에 키울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긴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가족들과 떨어지는 만큼의 상처를 주는 일이다.

애초부터 자신이 생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깊게 고민해 보았어야 한다. 단지 새끼때의 귀여운 모습에 반해 동물을 구매했다가, 나중에 자라면서 점점 덜 귀여워지면 내가 그때도 여전히 이들을 사랑해 줄 수 있을까. 털 때문에 기관지가 나빠져도, 그들의 수발을 들어주는 것에 내 시간을 뺏겨도, 그들이 말썽을 부린다 하더라도 내가 이들을 흔들림 없이 책임질 수 있을까.

생명에 관련된 일 만큼은, ‘사보고 아님 말고’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동네의 개들은, 혹시 그렇게 누군가의 가족이 되었다가, ‘아님 말고’로 집 밖으로 내몰린 것일 지도 모르겠다. 네다섯 마리의 꼬질꼬질한 개들이, 저들끼리 열을 맞춰서 우다다닥 달려가는 모습이, 어쩐지 측은해 보였다.

동네 개 무리의 구성원도 한두 마리 늘은 것 같고, 게다가 너무 자주 눈에 띈다고 생각 될 무렵, 갑자기 그들은 동네에서 자취를 감췄다. 위험천만한 찻길을 내달리곤 했으니 대장 격쯤 되는 녀석이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겠다. 아주 다른 동네로 가버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너무 자주 눈에 띈다 싶더니 민원이 들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려보면서, 역시 그다지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완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예쁘다고 살만큼 가벼운 일도 아니다. 그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일이다. 경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유기견, 유기묘들은 나날이 늘어가고, 안락사 되는 유기견, 유기묘들의 수도 엄청나다. 생명을 단지 물건처럼 소유하려 들었던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목숨들이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누구인가. 그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일은 아니니까. 다만 그들에게 해를 끼칠 만큼 나쁜 사람만 아니면 된다.

개를 좋아한다며 경솔하게 애완동물을 키우기로 결정하는 것은, 내가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훨씬 나쁜 일일 수 있다. 그 좋아한다는 것이, 물건을 고르는 것처럼 단지 겉모습만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개를 정말로 좋아하는가. 당신은 이 생명의 무게를 책임질 수 있는가?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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