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자기평가




재미있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한 대학 강의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 만족도와 자기 평가로서의 강의 이해도를 수치로 대답하도록 한 설문이었다.

이 설문에서 재미있는 점은 자기평가로서의 강의 이해도와 성적의 상관관계다. 자기평가로서의 강의 이해도는, 수업을 듣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 수업을 자신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다.

자신이 수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점수는 100점에 가까워질 테고, 자신이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수록 점수는 0점에 가까워질 것이다. 본인이 내린 평가와 실제 해당수업에서 받은 성적이 완전히 일치하긴 힘들지만, 대체로 큰 오차 범위 없이 비슷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평균적으로 본다면, 분포의 불규칙성은 있겠지만 거의 자기평가의 이해도와 기말시험의 점수는 비례하는 관계에 있게 된다. 즉, 자기평가를 낮게 한 학생은 낮은 성적을 받았고, 높게 한 학생은 높은 성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설문 결과가 대체 어디가 재미있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수업이 잘 이해가 되니?’ 하고 물었을 때, ‘네, 잘 이해가 됩니다’ 하고 대답한 학생들이 높은 점수를 받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당연한 것이지 않은가.

이 설문의 흥미로운 점은, 지금부터다. 이 비례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집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강의 이해도를 100점으로 책정한 학생들이었다. 100점을 준 학생들의 성적은 평균 30점 정도로, 그 중에는 거의 0점에 가까운 학생도 있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것이, 당시 설문은 해당 정도에 체크하는 단순 객관식이 아니라, 자신이 적은 수치를 책정한 이유를 적는 항목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지하게’ 자신이 100% 수업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적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해도에 80점을 준 학생들이 평균적으로 80점을 받은데 반해, 자신의 이해도에 100점을 준 학생들이 평균 30점밖에 받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정말로 자신이 수업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복습을 할 필요성도, 시험기간에 따로 공부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된 케이스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인식을 실제보다 더 긍정적으로 하는 것을 호의적 자기 인식이라고 한다. 어떤 분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사람들마다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단지 사람들이 모두 제각각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보라고 한다면, 그 무리가 얼마나 다양한 레벨로 흩어지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해도, 나의 글쓰기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물어본다면 명확하게 대답하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정확하게 내리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단지 자신을 실제보다 더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는지 생각해 본다면, 단순히 건방짐, 혹은 자만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착각이 불러온 0점이라는 참담한 결과처럼 말이다.

시험을 망치는 것 정도는 애교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때로는 자기인식의 실패가 인생의 방향을 잃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 평생 매달려 있는 사람은, 그 나무에 자신이 오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미아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 하였고, 공자도 논어에서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풀이하자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곧 앎’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오르지 못할 것이 명백해 보이는 나무에, ‘나라면 이쯤이야, 껌이지’ 자신 있게 매달리는 사람은,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무’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 오르려 하는 것은 바보다. 자신의 이해도에 대한 평가를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했던 평균 30점의 학생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오르지 않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던 옛말은, 이젠 그야말로 ‘옛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야 신분제도가 명백하게 존재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오르지 못할 나무’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천민이 아무리 글공부를 한들, 세상을 바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성별, 신분의 벽으로 자신의 재능마저 묻어야 했던 사람들이 천지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 보았다는 명목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런 속담이 있을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때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고,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고, 또한 노력한다면 자신이 목표한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니, 지금은 오를 수 없는 나무라 하더라도 오를 수 있을 때까지 쳐다봐야한다. 지금 내 능력으로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나무들을 계속 오르면서, 자신이 그 나무를 오를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그 나무를 계속해서 쳐다봐야한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있다면 인생의 방향을 잃을 수도 있지만, 이를 바꿔 생각하면, 자기인식이 객관적으로 정확하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은, 모르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이 100점이라고 과신하는 30점짜리 사람보다는, 자신이 10점이라고 생각하는 10점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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