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음식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을 대충 챙겨 먹으면서 점심 도시락을 싸는 일(도시락을 싸지 않으면 따로 식사를 구매해야 한다)은 내게 꽤 익숙한 일상이다.

아침은 주로 밑반찬 몇 가지와 흰 쌀밥. 내가 할 일은 그저 부은 눈으로 냉장고를 열고 파란 플라스틱 뚜껑들을 열어 식탁에 늘어놓는 일, 밥솥이 알아서 다 해놓은 밥을 주걱으로 적은 듯 퍼 담는 일, 그리고 잠에서 덜 깬 위장이 허기도 채 느끼기 전에 그것들을 씹어 삼키는 일. 아침은 어려울 것도 없고 또 거창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하루의 시동을 걸기 위한 연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첫 밥술을 뜨고 금세 밥그릇의 밥이 동이 난다. 적은 듯 담았다곤 했지만 숟가락을 몇 번 놀리지도 않았다. 설거지 거리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잠결에 내가 이 짧은 식사를 과연 하긴 한 건지 스스로 의심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아침 식사를 한 후 내가 섭취한 에너지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점심 도시락을 싸는 일이다. 냉장고에 남은 계란이 두 개. 곧 장을 봐야 하겠다. 하나 남은 치킨 햄 통조림을 꺼내면서, 이런 건 아무리 파격 세일을 한 대도 다신 사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퍽퍽하기만 하고 맛이 없다. 햄을 굽는 데도 식용유를 따로 둘러야 할 정도다.

절로 얼굴에 불만이 떠오르지만, 어쨌거나 두 손은 캔의 뚜껑을 따고 있다. 날카로운 절단면에 내 손이 절단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햄 덩어리를 꺼낸다. 분홍색 흰색이 적절하게 섞인 육각형의 덩어리. 퍽퍽 하더라도 그나마 고기류가 있는 도시락과 그렇지 않은 도시락은 차이가 크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기를 좋아했다. 위장이 약해서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또래에 비해 많이 먹는 편임에도 줄곧 지나치게 말라 있었다. 나는 내가 먹는 양의 극히 일부분만 소화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먹은 그 많은 지방과 단백질들은 어디로 증발해버렸겠는가 말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양호실에 따로 불려가기도 했다. 양호선생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전달하라며 내 손에 영양실조주의 통지표를 손에 쥐어주셨다. 그때 양호선생님의 얼굴에 걸려있던 안쓰러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뭔가 알듯 모를 듯한 감정들이 잔뜩 섞인 표정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통지표에는 나에게 하루 계란 두알, 우유 한잔, 뭐 그런 것들을 꼭 먹여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읽고 소리 내 웃으셨다.

당시 나는 삶은 계란 예닐곱 개를 간식으로 해치우는 소녀였다. 어쩌면 나는 내 몸무게만큼 먹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지나치게 많이 먹었다. 이 조그만 대식가 여자아이에게 걱정스레 통지표를 쥐어주셨을 양호선생님을 생각하니 여간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친척들을 포함하여) 그 통지표 사건을 두고두고 재미있는 사건으로 입에 올렸다. 만약 내가 먹는 대로 살이 오르는 타입이었다면, 어머니는 내가 먹는 음식의 양과 칼로리로 고민이 많으셨어야 맞을 일이다. 그나마 내가 먹는 만큼 활동량이 많고, 또 그 많은 음식들을 먹고도 크게 탈난 적 없이 마른 몸뚱이를 유지했기에, 어머니는 내가 마른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마른 것에 비해 내가 섭취하는 양이나 칼로리가 높다는 것뿐(그러니까, 혹여 내가 길을 걷다가 쓰러질까 하는 걱정이 없다는 것)이지 나의 식습관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다. 나는 당장 소아비만이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 편식 심한 입맛을 고쳐보려 어머니께서는 무단히 애쓰셔야했다.

그것이 단지 어린 시절에 잠깐, 누구나 그렇듯, 입맛이 유아적인 그 시기의 일일 뿐이라면 그 땐 그랬지, 하고 웃었겠지만(소시지를 마다하는 어린애가 어디 있겠는가!) 불행하게도 나의 경우는 그 유아적 입맛이 쭉 이어진 케이스라 하겠다. 나는 여전히 고기를 지나치게 좋아한다. 햄, 고기, 튀김! 그 군침 나고 유혹적인 이름들!

반면 나는 채소류는 거의 좋아하는 것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나마 먹는 것들도 씁쓸한 맛이 거의 나지 않고 달착지근한 것들이 전부다. 양상추나, 양배추, 상추, 배추, 양파, 파, 토마토, 감자, 무, 고구마, 참외, 그리고 약간의 콩류. 여기 굳이 말줄임표를 적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이것들을 제외한 다른 채소를 거의 먹지 않는다. 여기서 날로 먹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줄어든다. 과일인가 채소인가를 다퉈보아야 할 것들이 대다수, 양상추 정도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들어가는 풀 종류다.

이 유치한 입맛 때문에 고등학생 때인가, 어머니께서 도시락 반찬으로 오로지 브로콜리만을 싸주신 적도 있었다. 브로콜리는, 절대로 입에도 대지 않고 늘 남겨왔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브로콜리와 친구들의 반찬을 물물교환 해가며 역시, 브로콜리는 한입도 먹지 않고 도시락을 비웠었다.

어머니가 지금이라도 이것을 아신다면 꽤나 괘씸해하실 텐데, 걱정이다. 인간이 잡식 동물이라지만 나는 육식동물 쪽으로 한참이나 더 간 곳쯤에 위치할 거다 아마.

요즘 유명한데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여자 연예인(그렇다 그녀는 바로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이 채식을 시작한 일로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채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때 ‘웰빙’ 이라는 것이 거의 종교 같았던 그 시점에도 채식은 집중 조명을 받았었다. 지금은 ‘웰빙’에서 유행의 요소가 많이 기화하고 일부의 생활 패턴 등으로 자리 잡은 듯 보인다.

당시에는 ‘몸에 좋다’는 슬로건이 흥행의 보증수표처럼 여겨지고, 이를 믿고 너도 나도 부풀린 몸값으로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지금은 ‘유기농’이라든지, ‘귀농’이라든지 하는 일종의 생활 방식으로써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같다.

단지 유행처럼 너도 나도 ‘웰빙’을 머리에 이고 나왔던 때보다야 인기는 덜 하겠지만 지금의 웰빙에 대한 욕구, 열망이 그때보다 낮아졌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트렌드’, ‘유행’이라는 거품이 걷히자 진짜 ‘웰빙’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야 하나. ‘웰빙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트랜드에 편승하는 가짜들 대신 진짜를 고를 확률이 높은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더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한창 웰빙이 유행일 때 반짝 인기를 끌었던 채식은 일상생활에서 지속하기가 금연, 금주 보다 더 힘들기 때문인지, 웰빙 유행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이번 유명 연예인의 채식으로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그녀가 브라운관에 비치는 모습이 조금 더 생기 있어 보이는 이유를, ‘채식’ 덕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채식을 했더니 아기 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 말하는 그녀의 생기 가득한 피부, 에너지, 그런 모든 것들을 채식을 통해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솔깃하지 않을 여자가, 아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의 채식에 관련한 기사가 포털 사이트를 뒤덮었다. 때마침 그녀가 그녀의 입양견 순심이와 함께 동물보호운동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채식은 자연스럽게 ‘동물을 먹어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기사의 댓글들은 이런 주제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개를 먹는 것’에 대한 비난과, 그리고 일방적인 비난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대강의 패턴은, 이러하다.

‘A는 어떻게 개를 먹을 수 있죠? 개는 우리의 친구에요’하는 내용을 피력하고, B는 문화 상대주의로 응수한다. C는 ‘개를 먹는 것은 안 괜찮고 소를 먹는 것은 왜 괜찮냐’는 의문을 제시한다. C같은 사람 중 일부는 그 잣대가 먹어도 되는 동물이 단지 ‘귀엽거나 친근한 동물’이라는 점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비난하면서 만약 생명의 소중함을 운운하며 육식을 반대하는 것이라면 ‘개뿐만’이 아니라 모든 육식을 반대하든지, 그게 아니라면 생명의 소중함을 운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C의 의견에 대해 D는 처음엔 친근하고 귀여운 동물들을 잡아먹지 말자는 감성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점차 모든 생명들을 존중해야한다는 의식으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를 먹지 말자는 의견도 가치가 있다고 반박한다.

갑론을박들을 쭉 지켜보고 있자면, 나는 과연 고기 없이 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돼지고기도 좋고 쇠고기도 좋다. 나는 아직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지만, 만약 어린 시절부터 줄곧 먹어왔다면(돼지고기처럼 말이다) 그 역시 돼지고기처럼 내게는 맛있는 음식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나는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볼 때 돼지나 소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무언가를 먹어야한다. 나는 아직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기엔 나는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 또, 채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느꼈던 ‘어떤 것’에 대한 공감도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인간이 무언가를 먹는 것, 그것에 대해서 한번쯤은 더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보다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욕심을 조금만 줄여도 여럿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돼지고기나 쇠고기가 단지 맛있는 음식 이상의 무언가로 다가올 수 있도록, 우리는 더 많이 생각해야한다. 사람 역시 짐승과 마찬가지로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사람은 생각할 수 있기에, 바로 그 점이 짐승과 다르다.
음식 앞에 짐승이 되지 말자. 거창하게 풀만 먹자는 결심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음식 앞에서 조금이라도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들이 어디서 오는지, 내가 이것을 입으로 넣기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지. 무언가를 먹는 것, 생각해 볼 문제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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