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행복에 대한 고찰





바닷가에서 한 사내가 날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행인이 사내의 낚시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에겐 그런 사내의 모습이 꽤나 탐탁지 않아 보인 모양이다. 행인이 사내에게 말을 하길, 낚싯대보다는 그물을 쓰는 편이 좋겠다고. 행인의 충고를 들은 사내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행인에게 반문했다. “그물을 쓰면 무엇이 좋습니까?” “그물을 쓰면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 효율적이지.” 사내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으며, “더 많은 물고기를 잡으면 무엇이 좋습니까?”

사내와 행인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행인이 사내의 모습에 충고를 건넨 것은 아마 사내에게 청년다운 치열함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발전 없이 빈둥빈둥 거리는 것처럼 여겨져 안타까움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 역시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으니까. 문득 내가 발전 없이 그저 퍼져 있기만 하는 것 같아 보일 때, 내 스스로에게 충고하고, 때론 비난도 하고, 도저히 한마디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한심할 때, 나도 그런 때가 왕왕 있으니 행인이 사내에게 느꼈을 심정을 어찌 모르겠는가. 최근의 나는, 아마 ‘그런 때’인 것 같다.

얼마 전에 나는 ‘실패’를 경험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실패. 나는 아직 스물 중반 즈음, 어리다면 어리고 아니라면 아닐, 어중간하게 다 커버린 나는 내가 만든 이 실패 앞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실패한 내가 한심하고, 실패하고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내 모습은 더 한심하다.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청년들은 치열하게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넘어진 자리에 앉아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다시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크게 실패한 것도 아니다. 운이 나빴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준비가 아주 조금 모자랐을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퍼질러져 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안 그래도 뒤처졌는데, 이렇게 퍼져 있을 시간이 어디 있냐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평생 좌절 한 번 없이 평탄하기만 한 삶을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실패를 한다. 작든 크든, 실패는 그 자체만으로 꽤 고통스러운 존재다.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매년 늘 있어 온 수학능력시험으로 인한 자살 같은.

수능은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대입이라는 것 자체도 아무것도 아니다. 설령 올해는 정말 힘들 것 같아도, 내년에 다시 기회가 있는 것이 수능 아닌가. 그런데도 학생들은 채 꽃봉오리도 여물지 못한 당신네들의 목숨을 그렇듯 쉬이 버린다.

어떻게 보면 작은 실패다. 그네들이 앞으로 죽 펼쳐 나갔을 인생에 비한다면 작디작은 실패다. 후에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정말로 실패가 아닐지도 모른다. 자살과 같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야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 아니겠지만, 자신의 좌절에 대해서 유독 과하게 비관해 경험은 한번쯤 다들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매사에 긍정적인 학생이라도, 망해버린 성적표 앞에서, ‘이러다 대입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사업 앞에, 연애 앞에, 시험 앞에, ‘결국 다 실패하고 말거다’ 생각해 본 적, 아마 한 번은 있을 거다.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 비관들이 사실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종종 깨닫곤 한다.

내 친구 아무개 씨는 1학년 때에 학고(학사경고)가 뜬 것을 보고 자신이 숨 쉬는 공기가 아깝다 말을 했지만, 예비역이 된 지금은 F가 뜬 과목들을 성실하게 재수강해가며 바람직한 학점을 만들어 가고 있다. 당시 그 친구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성적으로 진로까지 꽤 심각하게 고민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함께 술잔 기울였던 내가 지금의 그 친구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본인이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는 걸 기억한다면 아마 본인도 민망하게 웃지 않을까 싶다. 그게 무슨 대단한 실패라고 그렇게 심각했었을까, 하고 말이다.

좌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내 남은 인생에도 앞으로 수많은 실패와 좌절들이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이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막상 실패가 닥쳐오면 이렇듯 힘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실패를 너무 크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닐까. 사실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그 ‘좌절’ 자체를 더 소화하기 쉬운, 다른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막상 실패가 닥쳐오면 우리는 그 실패를 아주아주아주 큰 것으로 인지한다. 쭉 걷다가, 잠깐 넘어지면, ‘영영 못 걷게 되는 것’처럼, 그 실패를 받아들인다. 클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사고하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실패는 사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간단한 일이다. 실패 이전을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는 왜 사는 건가. 우리는 왜 ‘실패’의 앞에 서게 되었나. 무엇을 향해 걷다가, 구덩이에 빠져버린 것일까. 갑자기 구덩이에 빠졌다면, 일단은 걷고 있었다는 소리고, 그 얘긴 결국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었던 중이라는 소리다. 걷는 ‘목적’이 있었을 것 아닌가.

우리는 어째서 실패하는 것일까. 나는 어째서 실패했던 것일까.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린 고등학생은, 어째서 실패한 것일까. 그 친구는 아마 생각했던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될 것이 두려웠을 거다. 그렇다면 좋은 대학은 왜 가고 싶었던 것일까. 좋은 대학을 가야지 좋은 직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럼 왜 좋은 직장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야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야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결론은 하나다. 행복하려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아마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일 거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삶의 질. 결국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렇게 걸어가다가, 잠시 넘어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결국 ‘행복’을 좇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행복한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 행복하다. 사랑하는 가족, 아끼는 사람들, 내게 주어진 기회들,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지금의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가진 것들을 생각해보면 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픈 곳 없이 건강해 행복하다. 나는 누구보다 화목한 가정에서 아낌없이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살 수 있기에 행복하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역시 나를 아껴주기에 행복하다. 나는 아직 젊고, 앞으로도 무궁한 기회가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렇게 많이 가졌음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하다. 나는 지금,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내가 걸어가는 이유는, 바로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나를 둘러 싼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내가 나이를 더 먹어 가면, 아마 부모님도 영원히 내 곁에서 나를 지원해 주실 수는 없을 것이고, 나도 내가 책임져야할 가정이 생길 테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도 어떤 이해관계로 나를 전처럼 아껴주진 못할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렇게 바뀌었을 때도, 나는 이 행복을 잃지 않으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만, ‘안정’된 행복을 위해 걷고 있는 셈이다. 안정, 安定. 바뀌지 않고 안전하게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불안하다. 왜냐면 행복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실패에 무너지는 이유다. 무서워서. 불행해진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걸지 모른다. 행복이 없어질까 두렵다는 것은, 지금은 행복을 ‘가지고 있다’는 뜻 아닌가! 당신이 걷고 있는 길 끝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행복해지려고’ 혹은 ‘계속 행복하려고’ 나아간다.

수능과 연애와 시험과 사업, 그딴 것들을 성공해내야만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능을 망치고, 연애를 망치고, 시험을 망치고, 사업을 망쳐도, 우리는 사실 행복하다. 단지 불안할 뿐이다. 잘 생각해보면, 대학을 못가고 좋은 직장을 못 얻고 가난한들, 행복할 수 없을까.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실패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더 큰, 더 안정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은 아름답다. 하지만 속도에만 집착하다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버리는 그 발걸음도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사내와 행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더 많은 물고기를 잡으면 무엇이 좋습니까?” 사내의 질문에,  “더 많은 물고기를 잡으면 그것을 팔아 돈을 벌 수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문답이 이어진다. “돈을 벌면 무엇이 좋습니까?” “아니, 돈을 벌면 저런 배도 한 척 살 수 있지.” “배를 사면 무엇이 좋습니까?” “배가 있으면 더 먼 바다까지 나갈 수 있으니 이곳에서 잡는 것보다 큰 물고기도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것 아닌가.” “큰 물고기를 더 많이 잡으면 무엇이 좋습니까?”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아닌가.” “더 많은 돈을 벌면, 무엇이 좋습니까?” “돈을 모을 수도 있겠지.” “돈을 모으면 무엇이 좋습니까?”

엷은 미소를 띤 사내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행인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노기를 띤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가? 나중에 늙어서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좋다마다.” “노후에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면 뭐가 좋나요?” “걱정이 없으니 한가롭게 낚시도 하고 지낼 수 있으니 좋지.”

그 대답의 끝에,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제가 바로 지금, 그리 하고 있습니다” 했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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