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새것 그리고 오래된 것




자주 신던 검은색 운동화. 길이 제법 잘 들었는지, 만 원짜리 두세 장 정도에 구매한 운동화임에도 에어 빵빵한 고가 운동화만큼이나 편하다. 납작한 모양에 아무렇게나 신기도 부담 없어 가까운 길이나 먼 길이나 자주 신고 다니곤 했다.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막 신었던 때문일까. 그랬던 운동화 뒤축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진 뒤축을 끌고서도 한참을 더 신었다. 어쩐지 애착 가는 신발이라 그랬던 건가. 이왕 버릴 거라면 근처 슈퍼 갈 때라도 꺾어 신고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고. 더 망가지면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다가도, 잠깐 요 앞까지만 나가면 되는데. 도서관 갈 건데 해진 운동화가 무슨 흉이겠어, 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 신은 때문이다. 그게 선뜻 쓰레기통에 던져 넣기가 꺼려지는 것이 뒤꿈치 위쪽 발과 닿는 뒤축만 제외하면 거의 멀쩡했기 때문이다.

매장에 가서 AS를 받자니, 워낙 저렴하게 구입한 신발인데다가, 신은 기간도 2년이 넘어버렸기에 4개월의 보증기간은 옛날 옛적에 이미 끝나 버렸고. 돈 주고 수리하기도 애매하다. 뭐 그렇게 비싼 신발도 아닌데, 수리해서 2년 넘은 낡은 신발을 살려낼 바에는 차라리 같은 종류의 새 신을 하나 더 구매하는 게 낫지 않은가. 이래저래 고치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잠깐만, 잠깐만 신다보니 해진 부분은 점점 더 커지고, 나는 이 편한 신발을 버려야하는 것이 조금 아쉬워지고 있었다.
다들 버리는 것이 참으로 쉽다. 길을 가다보면 쓰레기더미 사이로 노란 딱지 붙은 가구들이 수거를 기다리고 있다. 지나가는 눈으로 잠시 훑어봐도 사용한 물건 특유의 손때가 묻어 있을 뿐, 꽤 쓸 만한 것들인데도, 그것들은 폐기물 딱지가 붙은 채로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그것이 폐기물이 된 나름의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름의 이유. 폐기물이 된 이유. 피치 못할 이유였을 수도 있지만, 아직도 한참은 더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쌩쌩한 것들이 폐기물이 되어야 할 만큼, 그렇게나 피하지 못 할 이유였을까.

스티커가 붙은 것들뿐만 아니다. 흰색 쓰레기봉투 안으로 비치는 인형, 가방, 우산. 때로는 정해진 절차를 채 밟지도 않은 채 쓰레기가 되어서 동네 골목 여기저기를 나뒹굴고 있을 때도 있다.

멀쩡한 것들도 쓰레기가 되니 언제나 쓰레기가 넘쳐난다. 자신의 집 안의 것을 쓰레기로 비워내고 새로운 것으로 채운다. 새로운 것들. 그리고 쓰레기들. 새로운 것들도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거리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다시 새로운 것이 채운다. 새로운 것이었던 것도 곧 쓰레기가 된다. 새로운 것들. 새로운 쓰레기. 매대 위의 수많은 ‘새것’들도 채 낡아져보기 전에 거의 다 쓰레기가 된다.

수명을 다 하고 쓰레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 채 망가지기 전에 폐기물 딱지를 붙이고 골목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고려장’이야기가 생각난다. 자신의 희생으로 키운 자식의 손에 버려져 산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어미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저것들은 오로지 우리의 편의를 위해 태어났는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 펼쳐보지도 못한 채로 저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나 역시 버리는 것이 쉽다. 다시 사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버린다. 양상추 한 덩이를 사도 손질하면서 거의 절반정도는 버리고, 구두 굽에 스크래치가 났다고 버리고, 스케줄러가 부정 탔다고(이건 내 미신 중에 하나로, 스케줄러를 처음 바꾸고 며칠 간 계획이 꼬여버리거나 하면 새로운 스케줄러로 갈아타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버린다.

버리는 것이 이렇게도 쉬운 나다. 한번 애착을 가지기 시작하면 잘 못 놔주는 성격이지만, 정 붙이기 전에는 휴지통을 향한 포물선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심하다면 심하다. 수정테이프가 얼마 안남아 헛돌기 시작하면 그냥 버린다. 꾹꾹 눌러쓰면 되겠지만, 그게 조금 궁상맞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하나 새로 사지 싶다. 그것 얼마 한다고. 새것을 사면 굳이 꾹꾹 눌러써야 하는 수고를 안 해도 된다. 그리고 사실 낡은 것 보다는 새것이 더 좋지 않은가. 헛돌기 시작했으니 새것을 사도 합당한 것만 같다.

친구들과 놀러갈 때 산 물건들은 아무리 많이 남아도 버리고 가자고 한다. 그걸 또 바리바리 챙겨갈 생각을 하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다시 사면되지. 나중에 필요하면 그때 또 사면되지. 그렇게 두세 번 짜먹은 게 전부인 마요네즈가 버려지고, 반통 남은 치즈가 버려지고, 일곱 번 정도 쓴 치약이 버려지고, 샘플지 몇 장이 우수수 버려진다.

나중에 아쉬울까 잠시 고민할 때도 있지만,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언젠가 그것들을 아쉬워 할 수 있을 만큼 지금의 ‘버리는 행위’를 특별하게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나중에 마요네즈가 필요할 때가 되면, 나는 목까지 남아있던 마요네즈를 버린 걸 아쉬워해볼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마요네즈를 사야겠네, 하고 생각하는 게 다일테다.  

솔직히, 새것을 사는 건 기분이 좋다. 기분 좋은 일이다. 새 양말, 새 볼펜, 새 노트, 새 옷. 노래도 있잖은가.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정말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살 때는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아서 종일 그것을 생각할 때도 있다.

모카포트를 처음 샀을 때, 이제 집에서도 원두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좋아서, 택배만 손꼽으며 기다리기도 했다. 그 행복감. 기분전환으로 쇼핑을 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새것을 사는 행위, 쇼핑은 마치 마약과 같다. 매대의 물건은 새것이지만, 그것을 구입하여 더 이상 반품, 교환, 환불이 안 되게 되는 순간부터 그 물건은 빠른 속도로 새것에서 낡은 것으로 바뀌어간다. 더불어 새것이 주는 행복감도 그와 함께 빠른 속도로 퇴색되어간다.

그 행복감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새로운 것을 다시 사는 것. 시장에는 언제나 반짝반짝한 새것들이 넘쳐난다. 당연하게도 내가 가진 낡은 것보다 훨씬 새로운 것들이다. 그중에는 새로운 기능이 포함된, 업그레이드 버전도 있다.

그네들을 바라보는 우리 눈에 탐욕이 돈다. 저걸 가지면 행복할 것만 같다. 왜냐면 저것은 내가 가진 것보다 새롭고, 또 새로운 기능이 더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움을 손에 넣으면 나는 그것을 갖기 전에 비해 그 새로움만큼 더 행복해질 것만 같다. 디지털 카메라, 노트북, 스마트폰이 죄다 있지만, 아이패드를 가지면 더 행복할 것만 같은 것처럼!

사람들은 새것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있고, 시장은 이런 마약중독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새로운 것들이 더 많이 쏟아질 것이다. 당신이 가진 것 보다 늘 새로운 것들이.

‘너 돈 많나봐’하는 제목의 동영상이 인터넷 포털 메인에 떴었다. 뭔가 싶어 클릭하니 학생 나이대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공원인지 어딘지 모를 곳에 설치된 소형 폭포장치에 자신의 핸드폰을 들이민다.

내가, 어엇, 저게 뭐하는 짓인가 깜짝 놀라든지 말든지 여학생은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신을 찍고 있는 누군가의 렌즈를 향해서 깔깔 웃는다. 재미있다는 듯이. 그 여학생은 최신 기종 핸드폰을 가지고 싶어서 자신의 핸드폰을 고장 내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까지 했는데도 핸드폰이 고장도 안 나고 멀쩡하다고 푸념까지 달아 놨다.

이건 ‘고려장’도 못된다. 직접 빨리 죽으라고 목을 조르고 있는 격이다. 그런 모습을 깔깔거리며 기꺼이 촬영까지 했다는 점이 머리를 제법 띵하게 만든다. 철이 없어서? 아마 그럴 것이다. 최신 기종 핸드폰을 가지고 싶으니까. 그걸 가지면 행복할 것 같으니까. 그 게시물 밑으로 철이 없다, 개념이 없다 온갖 비난의 댓글들이 쇄도한다. 부모님이 힘들게 번 돈으로 무슨 짓이냐며 분개하는 사람. 저 여학생이 사형(?) 시키고 있는 핸드폰 기종이 뭐뭐라며, 비교적 최신 폰인데 그냥 나주지, 아까워하는 사람. 다짜고짜 욕을 퍼붓는 사람.

하지만 그 사람들도 모두, 자신은 완전히 결백한 사람이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나는 항상 버리기 전에 신중하다고, 그렇게는 차마 말할 수 없을 거다.

나는 여전히 버리는 게 쉽다. 새것을 가지는 게 좋다. 그 짧은 행복감에 도취되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는, 마약 중독자다.
하지만 내 검은 운동화 뒤축에 천을 덧대 꿰매었다. 벌써 쓰레기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값나가는 운동화도 아닌데 이렇게 고쳐 다시 신는 것이 요즘 친구들에겐 궁상맞아 보일지 모르겠다. 은근히 아무도 몰랐으면 싶은 게, 궁상맞아 보이는 건 조금 무서운 모양이다. 하지만 꿰매고 나니 버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양새가 아주 멀쩡해 보인다. 방금까지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신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새것이 주는 자극적인 행복감을 안겨주진 못하겠지만, 낡은 것은 낡은 것만의 매력이 있는 법이다. 아주 은근한 매력. 오래된 것은, 그만큼 나와 공유한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낡음은 추억의 반증이기도하다. 새것 냄새 나는 것들은 가질 수 없는, 진짜 ‘내 냄새’ 밴 것들. 그것들이 안겨주는 편안함, 만족감. 마치 가족처럼 말이다.

‘빈티지’를 돈 주고 ‘새로’ 사고, 나만의 진짜 ‘빈티지’는 버리는 지금 같은 세상에, 서툴게 꿰맨 내 신발 뒤축이 꽤 자랑스러울 지경이다. 내 신발이 수명을 다해 죽는 순간까지, 신발이 낡아가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면서, 끝내 버릴 때에도 신발에 고마움조차 들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을 다해 신을 거다. 어쩌면 이것은 연습이다. 내가 가진 다른 모든 것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더 이상 버리는 게 쉽지 않은 나, 그 첫걸음이 될, 연습 말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