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출석, 그 씁쓸한 대학생들의 초상




교수님께서 출석부의 이름을 부르실 때면, 술렁이던 그 큰 강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강 아무개.” “네.” “권 아무개.” “네.” 호명과 대답, 호명과 대답, 호명과 대답. 인위적인 고요함 속에 오로지 출석만이 가득하다. 아주 팽팽하지도,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못한 분위기는 마치 도미노처럼 ‘네’, ‘네’ 이어지는 행렬을 더욱 괴이하게 느끼게 만든다.

출석을 하는 이 순간이 아마 강의실에서 가장 어색한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교수님께서는 이 권력도 뭣도 아닌 것을 무기처럼 들고, 자신의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이 왔나 안 왔나 확인하는 작업을 스스로 해야만 하고,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게 배움인지 출석체크인지도 확실히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네, 하는 대답할 차례를 기다려야만 한다.

난 속으로 이름의 리스트에 내 차례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보면서 네, 그 짧은 대답을 준비한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파타하. “박다빈.” “네.” 이제 곧 이다. “박소현.” “네.” 다음이 나인가? “박신영.” “네.” 오늘도 무사히 내 출석점수를 지켜냈다.

하지만 한숨 같은 안도감은 단지 도미노가 쓰러지는 그 순간뿐이다. 이미 넘어간 도미노조차 이 행렬의 마지막을 긴장한 얼굴로 기다릴 수밖에 없다. “최 아무개.” 호명,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 “…….” 대답이 없다. 아슬아슬한 밸런스가 우르륵 무너져 버린다. “최 아무개?” 교수님이 재차 호명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약간 긴장했다는 것도 알지 못 한 채 눈을 굴린다.
“최 아무개 안 왔나?” 그렇게 말씀하시며 교수님께선 출석부에 뭔가 끄적이시는 듯 보이지만, 교단이 더 높기 때문에 무어라 적으시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바로 그 점이 더 무섭다. 내 이름 옆에는 무어라 표시되는 것일까. 만약 내가 대답하지 못한다면, 최 아무개 대신에 “박신영, 안 왔나?” 하고 물어보시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다른 성실한 ‘네’ 도미노들로부터 분류되어지는 것일까. 교수님께서도 딱히 원하지 않으셨을 그 권력의 무기로, 내 학점은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최 아무개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을 느낀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되다니. 부디 오늘의 부재가 늦잠 따위가 아니라 출석이 인정되는 다른 사유로 인한 것이길 빌어본다. 내가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교수님께선 흠흠, 마치 꺼진 시동을 다시 걸 듯 헛기침을 하시곤 출석을 이어간다. 최 아무개를 제외한 도미노들이 다시 네, 네, 네, 네 넘어간다. 마지막 학생의 호명을 끝으로 긴장된 분위기가 안개 흐트러지듯 흩어진다. 교수님께서는 그제야 본인 ‘강의’의 주인공으로 돌아오신다. 학생들도 필기구를 정비한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이 끝나야 했던 시각은 10시 15분이다. 하지만 분침이 4를 넘어가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교수님의 말씀은 이어진다. 초조해진다. 다음 수업은 여기서 조금 먼 건물이다. 30분이 되면 그 강의실 안에서는 또 다른 출석이 이뤄질 것이다. 교수님께서 조금 더 시간을 오버하시면 나는 제 2의 최 아무개가 되고 말 것이다. 이전 수업이 너무 늦게 마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해 볼까. 하지만 그것이 교수님의 이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출석부에 처리된 ‘그 어떤 것’ 마저 무를 수 있는 사유인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분침과 교수님을 번갈아 쳐다본다. 하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다. 뛰어간다면 아직은 갈 수 있는 시간이다. 제발 교수님께서 ‘오늘은 여기까지’를 선언해 주셨으면 좋겠다. 5분정도 연장 강의 하시는 것이야 감사한 일이지만, 더 이상은 다음 수업도 있는 학생들을 배려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조금 야속한 마음조차 든다.

23분. 교수님께서 마지막 줄을 읽으시고, 수업의 끝을 알린다. 빛의 속도로 짐을 추슬러 다음 강의실로 전력 질주한다. 평상시 잘 뛰지 않는 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달리면서 핸드폰 시계를 본다. 27분. 3분 남았다. 건물은 저기 앞에 보인다지만 끝이 아니다. 다시 3층까지 올라가야한다. 제발 엘리베이터가 딱 도착하길! 그런 행운이 일어날 리가 없다. 엘리베이터는 3층에 있다. 그것도 여전히 올라가고 있는 채로. 계단을 뛰어서 올라간다. 여태껏 숨 한 번 못 돌리고 뛰어왔지만, 계단 역시 단숨에 오른다.

30분. 강의실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다. 아직 교수님께선 도착하지 않으셨다. 나는 이 수업에서도 ‘최 아무개 안 왔나’ 대신 ‘네’ 대답하는 문제없는 학생 중 한명이 될 것이다. 숨이 차서 책상에 엎드린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엎드린 책상에 울려 온 몸으로 반사된다. 목이 마르다. 평소 운동을 안 한 티가 난다. 그리고 한 편으로 약간의 회의가 든다. 조금 떨어진 신호등의 초록불이 들어와도 뛰지 않는 나다. 이번 것 놓치면 다음에 가면 되지, 느긋하게 걸어간다. 버스도 지하철도, 줄 설 때도 뭐 그냥 뛸 필요 있나 뭐 그거 빨라서 뭐해,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던 난데. 나는 여기에서 지금 숨이 차서 엎드려 있는 학생이다. 무엇 때문에? 수업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출석하는 시간까지 다 계산한다면 정말 강의가 시작하기까지 10분정도는 여유가 있다. 나는 단지 ‘출석’을 하기 위해 뛰어 온 거다.

나에게 수업은 무엇인가. 대학 강의란. 나는 어째서 대학 강의를 듣고 있나.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답은 간단하다. 학문을 배우고자, 또한 학점을 얻고자.

문제는 둘 중 어느 쪽에 더 치우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알아내는 방법 역시 간단하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나 학점을 거의 얻을 수 없는 수업과, 거의 배울 수 있는 게 없으나 정말 괜찮은 학점을 얻을 수 있는 수업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생각해 보면 바로 그게 답이다.

여기서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도 꽤나 부끄러운 일이나, 나는 더욱 부끄럽게도 만약 정말로 현실에서 이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거의 98퍼센트는 후자를 택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배움 보다는 학점을 위해서 대학 강의를 듣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출석을 위해 달려야 하는 학생이다. 더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라도 더 맞추기 위해서 필기를 하고 복습을 하는 학생이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숨이 차게 앉아 있지만, 그것이 결코 성실한 학생의 덕목을 실천하기 위해서가 아님이 부끄럽다.

곧 교수님께서 들어오시고, 또 다시 출석부가 펼쳐진다. 다시 강의실에 인위적이고 긴장된 고요가 내리고, 그 가운데 홀로 이름이 불리고, 대답이 들리고, 또 다시 이름이 불리고, 대답이 들리고… 난 또 네 하고, 그들과 다를 것도 없이, 대답한다. 오늘도 무사히 내 출석 점수를 지켜냈다. 강의실의 학생들. 그들도 나와 다를 것 없이, 네 하고 대답한다.

학점을 위해 학교를 다니는 것, 배움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학점의 노예가 된 학생들. 관심사는 오로지 학점이고 또 학점이고 또 학점인 학생들. 좋은 학점을 받고 성실한 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라는 점이 또한 부끄럽다. 내일도 나는 출석을 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 그리고 이것을 고칠 맘도 없고, 고쳐서도 안 된다는 점이, 모두 부끄럽다. 이것이 현실의 대학생, 그리고 대학생의 포부다.

몇 주 전, 수강 신청 기간. ‘강의 매매’에 대한 기사가 포털사이트에 떴다. 학점 경쟁이 치열해지다보니 ‘보다 쉽게’ ‘보다 후하게’ 학점을 주는 교수님의 강의는 신청하려는 학생들이 몰리게 된다. 그 결과, 그 수업을 원하는 학생 중 많은 수가 그 수업을 신청하는 데 실패하게 되는데, 이 때 이 수업을 돈을 받고 넘기는 학생이 나타난다. 주로 커뮤니티에 ‘###강의 10만원에 팜’ 하는 식으로 게시글을 올려서 그를 사려는 학생과 컨택하게 된다. 사람이 뜸한 새벽 같은 ‘특정 시간’에 온라인에서 만나 파는 사람이 강의를 포기하고 그 빈자리에 구매자가 대신 들어가는 식으로 매매가 이루어진다.

이런 강의 매매가 성행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솔직히 원하는 강의를 놓쳐본 적이 있다면, 10만원을 주고서라도 그 수업을 듣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는 된다. 같은 등록금을 내고 같이 학교를 다니는 데, 누가 학점을 못 받고 싶겠는가. 학점이 얼마나 중요한데. 학점 때문에 학교를 다니는 것 아닌가. 당장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까닭은, 아마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의 대학생이기 때문이다.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이 옳은 말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배움이 먼저고 학점은 따라오는 것이지, 학점이 우선이고 배움이 나중인 것은 아니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나 역시 강의를 사고판다는 생각을 한 것부터 비난 받아도 싸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지만, 감히 그네들을 소리 내 비난 할 수가 없었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학점을 위해 학교를 다니는,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출석을 하고 공부를 하는 학생 아닌가.

무서운 점은 내가 어떤 것이 옳은지 머리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내일도 모레도, 어쩌면 내가 졸업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학점을 최우선시하는 학생으로 남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것이 정상인 곳이니까. 정상이 아닐 만큼 용감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출석을 위해서 차오르는 숨을 참고 계속 달려야 하는, 씁쓸한 대학생의 초상이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