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분명하고 명확한 사람은, 어디를 가서나 존경받는다. 특히 평상시 자상하고 친절하다가도 자신의 기준선 안까지라는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오해 살 일도 없이 태도가 분명하다고 칭송을 받는다. 완벽한 사람, 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정할 때는 다정하지만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늘, 언제나, 항상, 어떤 경우에도 다정다감한 사람이라거나 늘 철두철미한 사람은 될 자신도 없거니와, 치우치는 게 좋을 리도 없지 않은가.

다정다감하기만 한 사람은 달큰하긴 하지만 끈끈하기가 마치 녹은 캐러멜 같고, 철두철미하기만 한 사람은 이성적이긴 하지만 너무 차가워 얼음장 같다. 무엇보다도 어떤 경우에도 늘 한결같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타고나기가 그렇지 않고서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게다.

두 가지의 장점만을 완벽하게 갈라 똑 부러지게 이쪽에서는 다정다감하고, 저쪽에서는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면 정말이지 부러워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자신도 자신의 생각을 잘 모를 때가 있는데 매사 그렇게 완벽하다는 게 가능키나 할까.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분명한 사람은 종종 있긴 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도 어딘가 애매한 구석은 있기 마련이다.

분명하다는 것은 미덕이다. 또렷하고 분명한 것. 굳이 사람의 대처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든, 사람들은 완벽하고 고유한, 선명하고 분명한 영역을 지키는 것을 요구하고 또한 소망한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자 하는 것이 그렇고, 남들이 나를 볼 때 일관된 캐릭터를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이 그렇고,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이도 저도 아닌 채 방황하는 일 없이, 명확하고 분명하길,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그러하다. 끝끝내는 완벽하게 분명해질 수 없다 해도, 계속해서 그걸 추구하는 것이다. 최대한 명확해질 때까지 애매함을 없애고 또 없애는 것. 비단 사람의 성격뿐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애매함을 배척한다. 흐릿하고 애매한 것은 죄 물리칠 대상으로 본다.

흐릿함이 살아남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카메라 화질도 프린터도 텔레비전도 심지어는 ‘방송’마저도 점점 또렷하고 선명해지고 있다. 모공마저 숨길 수 없을 만큼. 그 뿐인가 염색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옷감도 고유의 색깔을 명확히 갖게 되었고, 그 선명함을 오랫동안 잃지 않기 위해 유색 섬유 세제도 덩달아 발전해왔다.

물건뿐이 아니다. 흐릿해진 시력을 되찾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안경, 콘택트렌즈, 라식이나 라섹…. 동양인은 서양인과 달라 이목구비가 선천적으로 아주 또렷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형수술로, 여의치 않으면 화장술이라도 총 동원해서 가능한 한 흐릿한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선명한 서구형 미인이 되는 것이 도저히 힘들 것 같다면, ‘개성’이라도 살려보려 노력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릿한 인상보다는 더 못생겨 보일지언정 오히려 그게 낫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애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애매한 사이, 이렇다 저렇다 정하는 바 없이 계속 그 관계를 지속하려 하면 너한테 난 대체 뭐야, 욕 한바가지 얻어먹기 딱 좋다. 이제는 제법 친한 친구인 것 같은데 속에 있는 이야기를 좀체 털어놓지 않는다면 어째선지 오히려 덜 친한 친구보다 더 나쁜 인상을 남긴다.

여자 아이들이 괜히 ‘베프’를 구두 계약으로 맺는 게 아니다. 넌 나와 베스트 프렌드이므로 그에 맞는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정해놓는 것이다. 나와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되든가, 아니면 그냥 저냥 아는 사람쯤으로 지내든가. 이도 저도 아닌 사이는 싫다는 거다. 아주 어린 꼬마들조차 애매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애매함을 배척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당장 우리 주변뿐만 아니라, 좀 더 유명한 인사들의 세계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셀러브리티들의 애매한 패션은 오히려 미친 사람마냥 극단적인 패션보다 더 많은 지탄을 받는다. 이쪽과 저쪽을 섞는 믹스매치를 선보이는 패셔니스타를 떠올린다면, 어라 아닌 것 같은데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믹스매치는 완전하게 ‘믹스매치’여야 한다. 잘 섞어서 완벽하게 ‘믹스매치’라는 패션을 선보이는 셈이다. 그건 흐릿함이 아니다. 다른 패션과 구별되는 온전한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자칫 이도 저도 아닌 패션으로 미디어 앞에 선 스타들을 대중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당장 그(혹은 그녀)는 ‘패션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애매함을 배척한다. 애매함을 싫어하고 기피하고 혐오하고 욕한다. 나에게 있는 애매함이든, 남에게 있는 애매함이든, 그저 배경에 머무르고 있을 뿐인 애매함이든, 지탄하거나 반성하면서 어떻게든 분명하게 바꾸려고 노력한다. 많은 경우에 애매함은 실로 좋지 못하다. 같은 맥락으로, 선명하다는 것은 많은 경우 보다 바람직한 가치다.

하지만 사람들이 애매함을 싸잡아 나쁜 것으로만, 배척해야할 것으로만 생각하는 점은 마음이 아프다. 애매한 무언가를 볼 때면 마치 결벽증 환자처럼, 어떻게든 정렬을 해놓으려고 드는 것이 때로는 조금 너무한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애매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칭찬은 못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욕된 일도 아니다. 애매함이 나쁜 녀석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바야흐로 애매함의 가치를 다시 재조명해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고 생각한다. 애매함이 충분히 바람직한 가치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나는 이것이 어쩌면 ‘유연함’으로 적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너무나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각기분야들이 세분되고 또한 전문화되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하더라도 분명함은 여전히 바람직한 가치다. 시대가 변해도 선명하고 분명한 것은 비록 적용의 폭을 줄일지언정 완벽에 가까운 밀도로 신임을 얻고 있다.

컴퓨터 내부 청소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비록 내 컴퓨터가 바이러스를 먹거나 하드가 나가거나 했을 땐 전혀 도움이 안 되겠지만, 정말 컴퓨터 내부를 청소하고 싶을 때는, 그 사람의 ‘전문성’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는가.

분명하다는 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가치 있는 일이다. 변하는 것은 ‘애매함’의 위상이다. 사회가 다양화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가속되면서 분명함이 커버할 수 없는 ‘빈 공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을 해보자. 우리 동네에 컴퓨터 내부를 청소하는 사람과, 컴퓨터 하드를 고치는 사람과, 컴퓨터 액세서리만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컴퓨터 전문인이 3명이나 있지만 내 컴퓨터가 내부 먼지 때문도, 하드문제도, 액세서리문제도 아닌 이유로 자꾸만 작동을 멈춘다면 나는 당장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져버리지 않겠는가.

좁고 깊은 것은 분명하고 전문적이지만, 넓은 범위를 커버하지 못한다. 컴퓨터야 실제로 ‘컴퓨터의 온갖 문제 전문’인 곳이 있으니 실제로 저런 곤란이 있진 않겠지만, 문제는 사회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생각지도 못한 빈 공간을 온갖 ‘전문인’들이 감당하지 못해버리는 것이다. 예기치 않게도 바로 여기서 흐릿하고 애매한 경계가 빛을 발한다. 이제는 정말, 애매함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애매함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지만, 동시에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 나는 애매함도 때론 충분히 가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애매함이 나쁜 상황도 많다. 그렇지만, 정말 ‘애매함’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은가. 단지 흐릿하다는 이유, 지금까지 쭉 그것이 배척되는 가치였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그 가치관을 유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애매함을 너무 미워해온 것은 아닐까. 너는 이쪽이야 저쪽이야? 하는 질문에 ‘글쎄’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사실 이쪽 저쪽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친구도 애인도 아닌 그 사람은, 당신에게 때로는 친구의 충고를, 때로는 애인의 어깨를, 때로는 친구와의 수다를, 때로는 애인과의 데이트를 제공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일 수도 있다.

한번 잘 생각해보라. 애매함이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지금 친구와 연인의 역할을 모두 적절하게 채워주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은 아닌가. 사실 당신은 지금 ‘완전한 연애’를 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완벽하게 친구인 것도, 완벽하게 연인인 것도 아닌 그 사람이 친구가 줄 수 있는 100퍼센트, 연인이 줄 수 있는 100퍼센트를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신이 이 사람에게 친구 혹은 연인 역할을 100퍼센트 바라고 있다면 이 관계는 나쁜 게 사실이다.

어떤 쪽으로든 확실하게 하는 편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정말로 그렇게 나쁜 것일까. 상황에 따라선, 그게 ‘절대적’으로 나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애매함은 애매함 나름의 매력이 있다. 애매함에 대한 선입견을 치우고, 당신의 ‘상황’ 위에서 판단할 때다. 애매함,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시길.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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